법륜스님/즉문즉설(2012)

[즉문즉설] 제41회 깨장을 갔다온 후 제 꼴을 보니 괴롭습니다.

Buddhastudy 2012. 10. 17. 03:56
"> 출처 YouTube

 

 

길게 얘기 안 하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하세요. ‘부처님, 관세음보살님 저는 행복합니다. 이대로 좋습니다. 아주 만족합니다. 아무 불만이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기도를 하세요. 그렇게 자꾸 기도를 하면 그렇게 됩니다.

 

 

Q2.

팔정도. 여덟 가지 바른길, 팔정도 가운데 첫 번째가 정견입니다. 바르게 봐라. 바르게 본다가 어떻게 보는 게 바르게 보는 거냐?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바르게 보는 겁니다. 있는 그대로. 사실을 사실대로. 그것이 정견이다. 이것은 지혜가 있어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있는 그대로 못 봅니다. 마치 제가 끼고 있는 이 안경에 빨간 색깔이 들어있는 안경알, 빨간 색깔의 유리를 끼고 있다고 하면. 저 흰 벽이 빨갛게 보입니다. 푸른 색깔의 안경을 끼고 있으면 저 벽이 푸르게 보인다.

 

그럴 때 나는 저 벽은 푸르다. 저 벽은 붉다.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을 정도몽상이라고 그럽니다. 저 벽은 사실은 희지마는 내 눈에는 어떻게 보인다? 푸르게 보인다. 내 눈에는 푸르게 보인다. 이게 진실이오. 사실은 희다. 이것도 진실이고. 내 눈에 푸르게 보인다. 이것도 진실이오. 내 눈에 푸르게 보이는 것은 거짓이 아니에요. 내 눈에 푸르게 보이는 것도 진실이오. 그런데 저 벽이 푸르다. 하는 것은 거짓이오.

 

즉 내 눈에 푸르게 보이는데 저 벽이 푸르기 때문에 내가 푸르다고 인식을 한다. 이렇게 착각을 한다. 즉 내 눈에 푸르게 보이는 거를 객관화 한다. 이게 뒤집어졌다. 전도몽상이라고 한다. 오늘 우리들은 각각 자기 업, 업식이 있습니다. 그 업식이 이 안경과 같아요. 그래서 바깥사물이 그 업식을 통과하면서 나에게 인식되어 지는 것은 그 업식에 의해서 변형된 색깔 모양이에요. 그런데 나는 그것을 사실이라고 잘못알고 있다.

 

그래서 넌 나쁘다. 너는 좋다. 너는 어떻다. 어떻다. 어떻다. 마치 이건 빨갛다. 이건 파랗다. 이건 노랗다. 이런 거와 같아. 안경을 딱 벗고 보면 흰 색깔이오. 안경을 벗고 보면 그건 나쁜 것도 아니고 좋은 사람도 아니에요. 그냥 그 사람이오. 그 사람.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지금 법륜스님 볼 때 좋은 사람이오? 나쁜 사람이오? 좋은 사람이지. 그럼 법륜스님이라는 이 사람이 좋은 사람이냐? 이건 좋은 사람도 아니고 나쁜 사람도 아니고 그냥 한 사람이오. 그런데 여러분들 안경을 끼고 나를 볼 때는 무슨 사람이다? 좋은 사람이오.

 

그런데 또 딴 안경을 끼고 나를 보는 사람은 어때요? 나쁜 사람이오. 어떤 여자 분이 나하고 연애 좀 하자고 선물도 하고 편지도 쓰고 10년을 따라다녀도 꼼짝을 안 한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볼 때는 어때요? 스님 참 훌륭한 스님이지. 그 여자가 볼 때는 어때요? 아주 인간 더러운 인간이오. 아시겠어요? 아주 나쁜 인간이에요. 그래서 사람은 좋은 사람 나쁜 사람 따로 없습니다. 다 각자 업식에서 형성돼요. 좋고 나쁨은, 옳고 그름은. 나에 의해서 이루어진 거다. 나에 의해서.

 

그래서 앞에서 얘기한대로 아버지가 문제다. 엄마가 문제다. 남편이 문제다. 이런 게 생겨요. 아버지도 문제고, 엄마도 문제고, 남편도 문제면, 누가 괴롭다? 내가 괴로운 거요. 내가 비참한 인생이오. 지지리 복이 없지? ? 태어나니 나를 낳아준 부모도 문제지. 어찌어찌 결혼했더니 재수 없게 또 남편도 문제지. 좀 있으면 또 재수 없게 애도 문제지. 지지리 이제 불행한 인간이 되는 거요. 이 불행을 자기가 계속 만들어 가는 거요.

 

그런데 할머니 손에 자랄 때는 엄마아빠가 그리웠어요? 안 그리었어요? 그리웠지. 그러면 술주정뱅이든 싸웠든 어쨌든 엄마 아빠가 없는 거보다 있는 게 좋다. 이렇게 생각해야 돼. 없는 사람도 있는데 그래도 나는 있지 않으냐? 이렇게 사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남편의 문제도 좋은 남편을 만나든지, 또 남편을 만나도 좋은 면이 보일 텐데. 한 번의 상처가 있으니까 자꾸 나쁜 면만 자꾸 보이는 거요. 자기 불행을 자기가 자처하는 거요.

 

그래서 정견이라고 하는 것은 이 업식을, 이 안경을 벗어버리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정견이라고 한다. 이런 얘기요. 다른 말로 하면 지혜라고 한다. 정견. 법의 실상을 본다. 그러면 안경을 못 벗었더라도 어떻게 하면 정견에 가까우냐? . ‘내 눈에 푸르게 보인다.’ 이렇게 생각해야 돼. ‘저 색깔이 푸르다.’ 이러지 말고 어떻게 말하라고? ‘내 눈에 푸르게 보인다.’ “너는 나쁜 인간이야.” 이러지 말고, ‘내가 보기에는 나쁘게 보인다.’

 

내가 보기에는 나쁘게 보인다는 것은 그 사람을 나쁘다 좋다 라고 말할 수가 없어. 아무튼 내가 보기에는 그렇게 보인다.’ 여러분이 내 설법을 듣고 에이 법륜스님 설법 틀렸어.” 이러면 내가 기분 나쁘나? 안 나쁘나? 나쁘지. 그런데 여러분들이 법문을 듣고 여러분 생각에 에이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단 말이오. 그럴 때 스님한테 와서 스님 법문을 듣고 제 생각에는 스님 법문이 이해가 안 됩니다. 제 생각에는 내 생각에는 틀린 것 같습니다.” 이러면 나보고 틀렸다는 얘기가 아니지. 자기 생각이 그렇다는 거요.

 

나 기분 하나도 안 나빠. “, 그래요? 생각은 자유니까.” 그죠?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푸르다고 그러고. 어떤 사람은 붉다 하면 이게 싸움이 되는데. 제 눈에는 푸르게 보입니다. 한 사람은 제 눈에는 붉게 보이는데요. 하면 싸움이 안 돼. 자기 눈에 그래 보인다는데 어떻게 할 거요. 그럴 때는 ~ 저 사람 눈에는 저게 빨갛게 보이구나.’ ‘저 사람 눈에는 저게 좋게 보이구나.’ 옛날부터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이 있죠? 그죠?

 

그러니까 그게 달리 보이는 데도 갈등이 안 생기고 공존이 되는 거요. 차선책이오. 아시겠습니까? 그래서 안경을 벗고 흰 것을 희다 하고 아는 게 정견이지마는, 내 눈에 푸르게 보일 때는, 내 눈에 푸르게 보인다면 그것도 진실입니다. 이해하시겠어요? 실지로 내 눈에 푸르게 보이니까. 그러니까 시비분별을 하지 않는 마음이면 좋은 마음이지마는, 시비분별을 해도 괜찮아요. 시비분별을 할 때 고집하면 다툼이 되지마는 내 눈에 좋게 보이는 거요.

 

그 사람 말 들으니까 내가 내 기분이 좋은 거요. 내 기분이 그냥 나쁠 뿐이오. 스님 그 말씀들이니 제가 기분이 나쁩니다. 자기 기분 나쁘다는데 내가 뭐라고 그럴 거요? 그야 뭐 바다보고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바다 보고 기분 나쁜 사람도 있는데, 나를 시비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그렇다는 거요. 적어도 차선책은 가야 된다. 이 말이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이 대부분 하수요. 하수. 네가 나쁜 놈이야. 여기에 지금 사로잡혀 있다. 즉 전도몽상의 상태다. 그래서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