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Danye Sophia] 마음은 무엇으로 만들어졌나? 당신이 속고 있는 ‘일체유심조’!

Buddhastudy 2022. 2. 23. 18:58

 

 

 

행복은 만족 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족하지 못하면 탐욕에 억눌려 행복할 수가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깨달음은 어떨까요?

깨달음은 행복과 달리 만족에 비례해 쭉쭉 멀어집니다.

 

힌두교의 성자들이 붓다의 깨달음에 미치지 못했던 것 역시

해탈이나 열반, 영생 같은 것에 쉽게 만족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수행자들은 너무 빨리 만족해 버립니다.

오직 모를 뿐하며 의심을 버렸더니 순간 멍 때리면서 생각이 멈추고,

이 때의 의식을 참나라고 하면서 만족합니다.

 

선문답을 하다 정신이 번쩍 들며 사유 구조에 일대 변화가 찾아오자

견성을 했다며 만족합니다.

위빠사나를 하다 생각과 분리되면서 새로운 자아가 발견되자

진짜 를 찾았다며 만족합니다.

사마타 수행에 몰입해 무아지경에 이르자

이것이 열반이고 해탈이라며 만족합니다.

 

수행자들은 예외 없이 분별이 끊어지거나

소멸한 자리를 깨달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상대적 분별심이 있으면 깨닫지 못한다고 여기는 것이지요.

 

생각이 활동하면 가 분명해지고,

가 분명하면 번뇌망상과 생로병사의 괴로움에서 헤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수행자들은 생각을 멈추거나 끊어내서

를 모호하게 하거나 아예 없애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생각에 휘둘리지 않는 마음 상태가 되면

그것을 일러 참나’ ‘진아’ ‘불성등으로 부르며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봅시다.

번뇌망상이 사라지고 셍사에 초연해진 마음이 왜 깨달음인가요?

그거랑 깨달음이랑 무슨 상관인가요?

 

어느 무엇에 의해 생겨난 피조물은

결국 소멸하게 됩니다.

피조물은 시공의 한계에 걸려 영원한 해체를 피할 수 없습니다.

수행자들은 이 문제를 일체유심조로 해결합니다.

쉽게 말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나가 없다고 믿고, 그런 의식을 유지하면 생사가 무의미해집니다.

피조물의 문제가 사라지면서 깨달음의 명패를 차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신을 믿어 구원받았다는 얘기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개념화 한 것이니까요.

 

수행은 일체유심조를 깨닫는 게 아닙니다.

그건 그냥 착각이고 믿음이고 세뇌이고 환상일 뿐입니다.

 

생각이 끊어진 자리, 분별이 멈춘 자리, 번뇌망상의 소멸, 탐진치의 증발

모든 것은 마음의 작용일뿐, 이런 얘기가 도대체 왜 수행에서 나오는 걸까요?

 

수행의 관건은

마음의 어떤 특별별한 상태가 아니라

마음이 뭐냐?는 것입니다.

 

 

마음은 뉴련의 전기적 신호에서 만들어진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뇌가 죽으면서 마음도 사라질 것이 아닌가?

혹시 마음이 과학에서 발견하지 못한 미지의 물질로 되어 있는 건 아닐까?

그렇더라도 그 물질 역시 결국엔 소멸될 것이 아닌가?

아니면 마음은 물질과 다른 같은 초물질(정보)로 이루어져 사후에도 존재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런 기나 리같은 정보들은 어떻게 존재하며 어디서 온 것인가?

만일 그것들이 태초에 제1원인에서 갈라져 나왔다면

1원인은 또한 무슨 근거로 자존하는가?

이런 것들을 끝까기 의심한 결과

도대체 존재는 뭐고 마음은 뭐고 나는 누구인가?

 

 

이렇게 마음을 끝까지 추적해 그 실체를 알아내는 것이 수행입니다.

마음이 뭔지도 모르면서 깨달았다고 운운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모순입니다.

 

흔히 수행자들은 종교인들을 가르켜

진리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맹목적으로 믿는다고 손가락질을 합니다.

그런데 수행자들 역시 마음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맹목적으로 깨달음을 믿습니다.

 

수행에 있어서의 믿음은 급브레이크입니다.

설령 붓다가 직접 설했다고 해도

무조건 의심해야 하는 것이 수행자의 근본 자세입니다.

 

그래야 논리학에서 말하는 권위에 대한 모순을 피해

하나씩 알아 나갈 수 있습니다.

 

수행자에는 두 부류가 있습니다.

모르는 영역을 아는 영역으로 바꿔나가는 부류가 있고

모르는 영역을 방치하고 심리적 만족을 얻으려는 부류가 있습니다.

 

전자는 학자들이고 후자는 우리가 하는 수행자들입니다.

그래서 엄밀히 따지면 진짜 수행자들은 학자들이고

그래서 생물학적 지능이나 형이상적 영역을 따져보면

학자들이 수행자들보다 월등히 높게 나옵니다.

 

수행은 자기만족을 채우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은 모르는 영역을 아는 영역으로 바꾸는 과정입니다.

아는 만큼 의식이 커지고, 그 앎이 궁극에 이르면 차원의 걸림이 하나도 없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사사무애의 경지입니다.

 

 

이렇게 아무리 진리적 자각을 외쳐도

사람들은 자신이 만족하는 것을 원합니다.

우리가 중력의 법칙을 거스르지 못하는 것처럼

수행에 있어서도 자기만족의 힘을 꺾기는 지극히 힘듭니다.

 

그래서 결국 자신의 눈높이만큼만 보이게 됩니다.

세상에 널려있는 수행의 상품 가운데

자신의 눈에 맞는 것에 구미가 당기고

그래서 수행은 마치 백화점의 상품처럼 다양하게 공존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만족하는 수행의 상품은 과연 어떤 것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