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만대장경을 모두 읽으려면 세월을 물 쓰듯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요약본이 필요한데 그 첫 번째가 화엄경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읽기 어려워하는 분들이 많아 금강경이나 반야심경을 보게 됩니다.
혹시 260글자로 된 반야심경도 복잡하다고 생각하면
단 하나의 글자로 줄이면 됩니다.
바로 공空입니다.
그러고 보면 팔만대장경이 空이라는 한 글자로 압축이 됩니다.
이것은 불법이 空이라는 얘기인데
도대체 어떤 과정을 통해 空이 등장한 것일까요?
익히 아시다시피 불교는 싯다르타가 무아론無我論을 들고 나오면서 출범했습니다.
당시 브라만교는 영원히 불변하는 아트만(atman)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아트만은 ‘나’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생각(정보)들이 떨어져 나가고 남은 순수한 의식으로
‘참나’ ‘진아’ ‘불성’같은 것을 말합니다.
아트만이 있기 때문에 수행의 목적은 분명해지고 열반과 해탈, 영생이 가능하게 됩니다.
그런데 싯다르타는 아트만을 부정하면서 무아無我를 주장합니다.
기존의 사상과 상반된 것을 주창함으로써 불교라는 혁명적인 종교가 탄생하게 됩니다.
싯다르타가 생존해 있을 무렵엔 무아론에 대한 문제가 별로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스승인 붓다에 의지해 法을 경청하고 수행에 매진할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붓다가 입멸하자 상황은 급변합니다.
제자들은 의지처가 사라지면서 무아론에 대한 회의가 싹트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무아를 전제로 하면, ‘나’의 실체가 없어 깨달을 대상이나 주체가 없기 때입니다.
브라만교는 가짜 ‘나’만 털어내면 구름이 걷히듯 진짜 ‘나’인 아트만(참나)이 드러나
열반과 해탈, 영생의 열매를 따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수행의 비전이 확실한 것이지요.
하지만 불교는 무아론으로 인해 그런 비전이 애매모호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붓다의 입멸 후 제자들의 방황이 시작된 것은 필연이었습니다.
이제 싯다르타의 제자들은 두 가지 과제를 떠안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무아를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불교의 비전을 확실히 세우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소홀히 하면
불교는 몇 세대도 버티지 못하고 소멸할 것이 자명합니다.
초기의 불제자들은 무아를 오온과 연기법으로 설명했습니다.
오온의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란
‘대상을 통해 들어온 정보가 생각을 거쳐 의식으로 굳어지는 과정’을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정보덩어리’라는 뜻입니다.
‘나’를 한낱 ‘정보덩어리’로 보면 자아의 실체가 모호해집니다.
이것이 연기법에 의해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보면 연기처럼 흩어질 테니,
결국 ‘나’라는 것은 환영이 되고 맙니다.
여기서 무아는 자연스럽게 ‘나’라고 할 것들이 없다는 뜻으로 굳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나’가 없다는 건가요?
아니면 그런 가짜 정보들이 떨어진 뒤에 아트만 같은 진짜 ‘나’가 있다는 건가요?
여기에 대해 불제자들은 확실한 답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아트만까지 부정하면 완전한 유물론이 되고, 동시에 불교의 비전은 영영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아트만(참나)을 인정하면 불교의 정체성이 뿌리째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튼 당시 불제자들은 무아를 지켜낼 방법을 몰랐고
하는 수 없이 오온과 연기법으로 모호하게 포장을 하는 선에서 멈추고 맙니다.
그리고 500여 년이 지나면서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됩니다.
바로 공 사상을 이용해 무아 새롭게 포장하는 것입니다.
이제 불제자들은 공이라는 신기술을 이용해 무아에 논리를 세우게 됩니다.
그 결론이 바로 반야심경입니다.
반야심경의 요점은 일체개공(一切皆空)입니다.
삼라만상 모든 것이 공이라는 뜻입니다.
생사가 공이니 생사즉열반(生死竹卽涅槃)이고
번뇌가 공이니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이고
중생이 공이니 중생즉붓다(衆生卽佛陀)입니다.
이 논리대로라면 ‘나’ 역시 공이고,
결과적으로 아트만(참나)이 아닌 무아가 성립하게 됩니다.
이처럼 불제자들은 공을 끌어와 무아의 논리를 세웠고
이쯤 되니 아트만 보다 그럴듯하게 보이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불교의 비전이 아직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모든 것을 공으로 놓게 되면
유물론의 허무주의가 팽배할 수밖에 없는 까닭입니다.
심하면 세상을 공 하나로 재단하려는 정신적 미숙아라는 비판에 직면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불제자들은 비전을 궁리하게 되고
여기서 반야심경의 후반부에 깨달음의 주체가 등장합니다.
공을 깨닫는 존재가 따로 있다는 선언이 삽입된 것입니다.
이 얘기는 일체개공을 깨다는 어떤 초월적 존재인 나가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 나가 불교의 비전인 붓다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나가 붓다라면 나가 있는 것이 되어 도로 아트만이 돼버립니다.
결국 브라만교의 아트만을 인정하고
범아일여를 받아들인 꼴이 됩니다.
처절한 항복 선언이지요.
여기서 대승불교에 불성, 진아 같은 개념이 등장합니다.
초기불교 수행자들은 이런 단어가 어색했던지
순수의식, 깨어있음, 알아차림 같은 단어로 풀어서 쓰는데
모두 아트만을 인정한다는 면에서 똑같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불교의 정체는 뭡니까?
결국 힌두교(브라만교)와 아트만과 범아일여 사상이
불교의 결론인 것인가요?
요즘 힌두교의 참나가 전세계로 퍼져나가고 있고
불교 수행자들은 참나 열풍에 맥을 못 쓰고 있습니다.
“사실 참나는 아주 간결하고 분명하지 않습니까?
정보 덩어리인 나에서 가짜 정보만 털어내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순수의식인 아트만(참나)가 남고
이 아트만은 우주의식과 하나이다.
고로 나가 조물주 하나님(붓다)이다.”
이렇게 논리도 명쾌하고 비전도 분명하지
대중적으로 퍼져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논리를 부정하면서 탄생한 것이 불교인데
불제자들은 무려 2천 5백 년 동안이나
힌두교의 논리를 말만 바꿔서 그대로 수용하고 있습니다.
이러니 힌두교 학자들이 불교를 보는 시선이 곱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힌두교가 아닌 것처럼 보이려고
장장 수천 년을 매달린 결과가
도로 힌두교이니 얼마나 우습겠습니까!
도대체 싯다르타의 무아가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요?
말 그대로 나가 없다는 얘기 아닙니까!
그런데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참나, 진아, 불성, 아트만, 브라만, 붓다 등으로 불리는
고차원의 나까지 증발하여 완전한 무가 됩니다.
깨달을 대상과 함께 그 주체도 사라지고
따라서 천국과 극락은 물론이고
영생이나 열반, 해탈 같은 열매도 자취를 감춥니다.
유물론에서 말하는 절대적인 죽음에 봉착하게 되는 것이지요.
생각만 해도 끔찍하기에
불제자들은 싯다르타의 무아를 다시 힌두교의 아트만(참나)으로 해석하게 됩니다.
용수보살이 유일하게 이런 추세에 제동을 걸었지만
그건 그때뿐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불제자들은
무아를 공아로 바꿔버렸습니다.
아트만에 포장지만 바꿔 씌워 무아라고 주장하는 꼴이 된 것입니다.
싯다르타가 이런 모습을 본다면 과연 어떤 심정일까요?
2차원 생물은 영원한 시간을 주어도 높이를 찾을 수 없습니다.
이건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불제자들은 영원한 수명을 갖더라도
무아를 풀 수 없습니다.
이것 역시 차원에 걸린 구조적 한계입니다.
이 얘기는 3차원 두뇌를 무한한 시간 동안 굴려봤자 도로 3차원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무아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괴상한 논리를 지어내지 말고
그 시간에 차원의 문제를 푸는 것에 집중하는 편이 낫습니다.
그것이 싯다르타가 몸소 보여주신 불교의 참된 수행입니다.
힌두교와 구별되는 불교의 수행은 딱 3가지입니다.
그냥 깨달아라.
위빠사나로 차원의 설계를 관하라.
화두를 참구하라입니다.
싯다르타는 이 3가지 대들보를 가지고 불교를 세웠습니다.
실제로 싯다르타는 보리수나무 아래에 앉아 이 3가지 수행을 두루하였습니다.
싯다르타는 생각들이 아트만(참나)으로 유혹해
열반과 해탈, 영생으로 자신을 끌고 가려는 현상을 위빠사나로써 관했습니다.
또한 제1원인을 화두로 삼아 이성을 궁극까지 끌어올렸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그냥 있었습니다.
이 3가지 수행의 인과가 어우러져
마침내 싯다르타는 무상정등각을 성취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불교는 힌두교에 없는 3가지 수행으로써 탄생하였습니다.
이 수행들은 위빠사나와 간화선, 그리고 묵조선으로 이어졌지만
아쉽게도 알맹이가 모두 빠져 있습니다.
위빠사나는 생각이나 호흡을 관하는 용도로 쓰고 있고
간화선은 엉뚱한 화두를 잡고 허송세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묵조선은 그냥 있는 것의 감각을 찾는 방법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셋으로 갈라져 그 구실을 못하고 있으니
불교의 정체성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컨대 차원의 설정값을 무력화시키는 위빠사나!
제1원인의 화두를 찾아 차원을 포맷시키는 간화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차원 그 자체로 화하는 묵조선이
각각 어루어져 수행해 나간다면
불교는 원형을 되찾을 뿐만 아니라
영원토록 인류 문명과 함께 찬란하게 빛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불교는 정녕 어떤 불교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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