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는 표준화된 죽음 부정 시스템이다.
모든 문화는 죽음을 정복할 가능성에 대한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어네스트 베커
아트만 프로젝트
처음 듣는 사람은 전혀 그 뜻을 알 길이 없는 용어입니다.
우선 아트만과 프로젝트를 나누어 뜻을 보면
이게 왜 이어지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아트만은 힌두이즘의 범아일여에 나오는 인간의 본질을 의미하며
프로젝트는 자원과 시간이 제약된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제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아트만 프로젝트는
인간의 본질을 추구하는 과제를 의미하는 것이겠죠.
그렇습니다.
그런데 켄 윌버는 이 용어를 만들면서
아트만 의식을 막고
상징적 대체물을 강요하는 식으로
아트만 의식을 추구하는 것이 자신이 쓴 의미라고 말합니다.
진짜가 아닌 가짜를 강요하는 프로젝트라는 말이네요.
아트만 프로젝트에 대해 가장 상세하게 설명하는 켄 윌버의 저서는
국내에 출간된 것으로는 <에덴을 넘어>가 있는데
인류의 의식의 진화를 커다란 틀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즉, 인류의 집단의식의 발달 과정은
무의식적인 무지 상태에서 자각하는 분별을 거쳐
본래의 본질인 아트만으로 돌아가는 과정이며
아트만에서 벗어난 적은 없지만
체험을 통해 자각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인류가 발생을 목격한 에고와 아트만을 혼동하며
에고의 분리 감각은
자신의 존재적인 본성이자 불멸인 아트만을 밀어내게 되고
거꾸로 애고를 불멸의 신으로 만드는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아트만 프로젝트입니다.
윌버를 은유적으로 이해하자면
인류사는 거대한 아트만 프로젝트이며
인류의 문화 자체가 바로 아트만 프로젝트의 전개 과정이자
표현 결과인 것이죠.
인류 의식의 진화 과정에 대한 감추어진 모순을
가장 적절하게 묘사할 수 있는 용어로
켄 윌버가 개발한 것이 ‘아트만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윌버의 사상을 재단할 능력이 저에게는 없습니다.
아마 제대로 읽을 지적 기반이 없는지도 모릅니다.
정확히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르는 상황이면 틀림없습니다.
그럼에도 아트만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하는 이유는
인류의 진화에 대한 관점,
특히 의식의 진화라는 주제에 대해
공중에 붕 뜬 깨달음이 아니라
현실 사회에 대한 냉정한 이해를 통해 볼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공부에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 스스로 이 책을 쉽게 읽지는 못했고
워낙 거대 담론의 성격이 있는 내용인 데다가
윌버의 세계관을 쉽게 동의하지 못한다면
반감을 가질 수 있는 내용도 많기 때문에
책의 내용을 해석하는 것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다만 아트만 프로젝트라는 관념과 그 주변을 살펴봄으로써
우리가 왜 전도된 세계관을 가지고 살고 있는지에 대해
이해해 보고자 합니다.
대부분 윌버의 글을 발췌해 인용하는 것이겠지만 말이죠.
윌버는 우선 대사슬을 전제합니다.
인류의 의식은 초월을 향한 여정에 있으며
위계적 수준을 따라
의식이 점점 더 증가하는
보편적인 순서인 ‘존재의 대사슬’을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존재의 대사슬’은
물질에서 신체, 마음, 혼, 영을 따라 이동합니다.
결론적으로 역사라는 것은
가장 낮은 물질과 신체에서 시작해
가장 높은 것, 영과 궁극적 전체에서 종결되는
점점 더 서열이 높아지는 구조의 전개입니다.
일본은 이 과정을 매우 낭만적으로 표현합니다.
“개인 또는 국가적 위협이 기록이 아닌
인간 의식의 전개로서
역사는 남녀를 불문하고 신성과의 러브 스토리이다.
만나고 헤어지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가까이 가고 멀어지는
브라만의 스포츠이자 윤회의 역사다.”
윌버의 이런 관점을 최소한으로 이해하려면
그가 미국인이지만
서구적 기독교와는 거리가 멀고
그가 영원히 철학으로 존재하는 것이
힌두교, 불교, 도교, 수피즘, 기독교 신비주의의 비전적 핵심을 이루는 것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영혼의 철학은 라이프니츠가 이름을 붙인 것이지만
이런 경향
즉 초과학적 신비주의의 영역을 말하는 것입니다.
깨달음 전통에서 말하는
궁극, 실재, 본성을 이해하고 묘사하고 추구하는 경향이
바로 ‘영원의 철학’이라는
서구식 표현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것은 서구 종교와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지만
뿌리와 단절된 종교에 비해
여전히 자양분을 얻고 있으며
그 자양분을 통해
초월적인 이해를 적극적으로 경험하는
많은 철학자, 과학자들의 경향성이기도 합니다.
이런 경향에서 제한된 것이
바로 ‘존재의 대사슬’이라는 설명인 것이죠.
개체 발생이 계통 발생을 반복하듯
인간의 진화적 역사가
대사슬의 낮은 단계에서 시작해 위로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초기 단계의 유인원, 전의식 충동의 지배를 받는 상황에서
인간 특유의 자기반성적 의식 양식
즉 에고로 진화하고
또한 종국적으로는 에고를 넘어
혼과 영이라는 초의식으로 발전해 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드디어 아트만 프로젝트가 등장하는 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영원의 철학에 따르면
이런 무관하고 영원한 전체의 재발견은
인간의 가장 위대하면서도 유일한 필요이자 욕구다.
아트만은 모든 영혼의 기본 성질일뿐더러
개인은 그런 사실을 알고 있거나 직관하기 때문이다.
모든 개인은 자신의 원초적 본성이
무한하고, 영원하며 전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직관한다.
즉 그는 진정한 아트만 직관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동시에 진정한 초월에 대해서는 겁을 먹는다.
초월에는 고립되고 분리된 자아 감각의 죽음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분리된 자아를 놓아버리고 싶지 않고
자아에 대해 죽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참되며 실재하는 초월을 발견할 수 없고
통합적 전체에서 더 큰 충족감을 발견할 수 없다.
스스로에게 집착하여 아트만을 내쫓으며
자신의 에고만 붙잡은 채 나머지를 모두 부정한다.”
인간이 직면하는 딜레마는 매우 근본적인데
각 개인은 진정한 초월, 아트만 의식, 궁극적인 전체를 원하지만
분리된 자아의 상실, 고립된 에고의 죽음을 무엇보다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전체를 원하면서도 하는 일이란
오히려 두려워하면서 전체에 저항하는 것이라는 것이죠.
전체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분리된 자아의 죽음을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인간은 진정한 초월을 원하기 때문에
그러나 반드시 필요한 자신의 분리된
자아 감각의 죽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는 그것을 막고
상징적인 대체물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초월을 구하는 데 힘쓴다.
이런 대체물은 성, 음식, 돈, 명성, 지식, 권력처럼
갖가지 다양한 형태로 다가온다.
이 모든 것은 결국
대리 만족, 전체 안에서의 진정한 해방을 대체할 뿐이다.
이런 이유로 인간의 욕망을 만족시킬 수 없으며
모든 기쁨은 무한을 열망하는 것이다.
개인이 원하는 것은 아트만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발견하는 것은 이를 위한 상징적 대체물 뿐이다.”
분리되고 고립된 개별적인 자아라는 개인의 느낌조차
인간의 진정한 본성에 대한 대체물입니다.
궁극적 전체의 초월적 참자아, 셀프, 아트만의 대체물인 것이죠.
모든 사람은 자신이 아트만과 동일한 성질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올바로 직관하고 있지만
자신의 분리된 자아에 적용함으로써 그 직관을 왜곡시킨다.
분리된 자아가 불멸하며
우주의 중심으로서 매우 중요하다고 느낀다.
즉 자신의 에고를 아트만과 바꾼다.
사람의 직관은
분명 자신이 초시간적이고, 초월적인 아트만임을 알지만
에고라는 대체물로 자신의 기반을 넘겨주고
이런 분리를 통해 전체를 발견하는 대신
영원히 살고 싶은 소망을 추구합니다.
결국 우주와 하나가 되는 대신
우주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을 추구하며
신과 하나가 되는 대신
에고 스스로 신 노릇을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아트만 의식을 막고
상징적 대체물을 강요하는 식으로
아트만 의식을 되찾으려는 시도를
나는 아트만 프로젝트라고 부른다.
-켄 윌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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