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일어버린 것을 슬퍼하고 울고 있을 때
영은 찾은 것을 즐거워한다.
-무명 수피
영원의 철학에 따르면
개인의 진정한 자아나 본성은
영원하거나 불멸하는 것이 아니라
초시간적이고 초월적입니다.
해탈이란
초공간적이고 초시간적인 존재의 바탕을
즉각적으로 직접 파악함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본성이 모든 것과 하나임을 재발견하면
소외되고 분리된 자기 존재라는 사실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깨달음입니다.
선불교에서 원래부터 갖추고 있다고 말하는 그것.
그것을 모든 사람들이 올바로 직관하고 있지만
그것을 자신의 분리된 자아에 적용함으로써
그 직관을 왜곡시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인간은 진정한 초월을 원하지만
거기에 반드시 필요한
분리된 자아 감각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깨달음의 원리입니다.
“개별 자아는 매우 중요하고 불멸이며,
우주의 중심이라는 것은 불가능한 욕망이지만,
인간의 진정한 본성은
실로 무한하고 영원하다는 올바른 직관에 근거해 있다.
가장 심층적인 본질이
이미 초시간적이고 영원한 신이 아니라
에고가 불멸이며 우주의 중심이고 죽음이 없으며
매우 강력한 신이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아트만 프로젝트이다.
아트만 혹은 아트만 프로젝트가 있는 셈이다.”
아트만 프로젝트는
결국 본질을 외면한 자신에 대한 보상이고,
동시에 본질을 의식적으로 회복하려는 욕망인 셈입니다.
아트만 프로젝트는
인간 본성에 대한 대체물이지만
또한 인간 본성을 회복하려는 욕망을 담고 있는 것이죠.
윌버는 역사, 진화, 개인 정신을 움직이는 것이
아트만 프로젝트라고 말하며
아트만 프로젝트가 끝날 때만
진정한 아트만 의식이 겉으로 드러난다고 합니다.
죽음을 수용하려 하지 않거나
수용할 수 없는 한
합일의식 또는 아트만 의식을 발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고립된 자아감의 포기와
죽음이 수반될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수용하여 자신의 진정한 참자아나
자신의 궁극적인 전체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참 자아에 대한 일련의 상징적 대체물을 창조할 수밖에 없다.
자아 감각이 현재 수준을 단념하고 죽음을 수용해서
다음에 나타나는 더 높은 의식 수준으로 떠오르고
마침내는 진정한 영적 영혼성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더 높은 수준,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아트만 자체에 대한 대리 만족으로
낮은 수준이 매 순간 창조되기 때문입니다.
자아는 낮은 수준이 이미 높은 수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높은 수준을 발견하기 위해
낮은 수준을 단념하지 못합니다.
그 대리 만족이 깨질 때까지 자아는
높은 수준보다는 낮은 수준을 선택하는 것이죠.
기적 수업에서 말하는 것처럼
“고통이 그에게 무언가를, 자신에게 가치 있는 무언가를
가지고 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누가 고통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직면하는 것입니다.
의식의 모든 수준이 거꾸로 진화하는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영을 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영에 대한 대체물을 창조합니다.
그래서 진화의 각 수준마다 의식은
그 대리 만족과 완전히 동일시하고 그것을 철저히 맛본 후
부족함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실제로 대체물로 만족을 주는 세상이란
문화에 불과합니다.
물질적이고 외적인 대체물이나
내적 대체물인 자아가 하는 기능은
매우 상대적이고 밀접한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에로스적 측면이며
하나는 타나토스적인 측면입니다.
에로스는 삶, 권력, 안정, 쾌락을 제공하고
타나토스는 죽음 축소, 금기를 상징하는데
인간은 에로스를 끌어당기고 타나토스에는 저항하고 방어합니다.
결국 인류학이 바라볼 수 있는 태고적 사회조차
기본 범주는 초월적 힘과 금기에 대한 것으로 점철돼 있습니다.
“문화 프로젝트 전체는 양면적이다.
그것은 폭발하는 삶의 긍정을 완전히 넘어선 것을 목표로 하지만
여기에는 죽음 부정이라는
불쾌한 핵심이 자리 잡고 있다.”
결국 인류의 문화란
자기 존재를 영속화해서
그 해체를 위협하는 모든 것들을 회피하는 것을 기반으로 하게 됩니다.
결국 내면적이고 고립된 이 허위 자아가
죽음, 해체, 초월에 맹렬하게 저항하는 동시에
우주 중심성, 전능, 불멸을 열망하고 가장하는 것을 외형적으로 표현한 것이
인류의 문화라는 것입니다.
“타나토스로부터 미친 듯이 멀어져 가는 죽음 부정은
아트만 프로젝트에서 부정적 측면의 절정이며
매우 광범위하고 보편적으로 문화를 형성한다.
실로 문화란 분리된 자아의 죽음을 다루는 것이다.
자아는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으며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주관적인 삶을 구성하고 조작하면서
자신이 소망하는 불멸의 외적이면서도 가시적인 징표로
영원하고 초시간적인 문화적 대상을 세우며
죽음을 부정하기 위해 전 생애를 소비한다.”
인간은 살아있는 존재로서
자기 영속화, 즉 에로스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또한 자신의 삶이 끝난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영속화를 지속시킬 다른 방법을 찾아 나섭니다.
분명히 죽을 운명인
살과 피로 이루어진 세계를 초월하는 것처럼 보이는 방법을
고안해야만 했던 것이죠.
인간은 소멸하지 않는 세계를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불멸성을 보증해 줄 보이지 않는 프로젝트를 고안해 냅니다.
이런 관점으로 역사의 전개를 바라볼 경우
우리는 인류 문화의 기본 틀을 이해하게 됩니다.
시대를 불문하고 사람들은
물질적인 운명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문화적인 불멸의 상징이나 이념들을 제공받으려 합니다.
사회란 불멸하는 세력 구조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인류학자인 베커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영원한 번영만을 원하는 인간은
처음부터 죽음의 예상과는 공존할 수가 없었다.
인간은 자신의 종말에 대한 공포를 잠재우기 위해
노쇠하거나 소멸하지 않는 문화적 상징을 건설했다.”
문화는 죽음에 직면할 때 일어나는
공포에 대한 외부적인 주요 해독제였던 것입니다.
아트만 프로젝트는 개인적인 영역에서도 전개되고 확장됩니다.
“내면적 자아는 결국 이 끔찍한 환상을 저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트만 프로젝트를 지탱시키기 위해
죽음의 공포를 완화시키기 위해
자아를 불멸하는 것으로 보이기 위해
‘외적’이거나 ‘객관적’인 지지물을 가져온다.
개인은 수많은 외부적 또는 객관적 요구, 욕망, 재산, 소유물을
만들거나 손에 넣으려 한다.
그는 이 모든 것에 무한한 가치나 무한한 호감을 불어넣는다.
그러나 분리된 자아가 궁극적인 전체를 재발견할 때까지
죽음이라는 희뿌연 분위기가
계속 동료로 남아 있을 것이다.
어떤 보상이나 방어 억압도 이렇듯
배경에 자리 잡고 있는 불안을
완전하게 배제하지는 못한다.”
인간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정확히 무한이기 때문에
이런 외적이고 객관적이며 유한한 대상은
모두 대리 만족이 될 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구원은 있습니다.
자아가 현재 수준에 집착하고 다가오는 모든 것에 대항해서
자기를 방어하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자신이 포함된 모든 수준들의 원천과 기원을
스스로 초월하여 직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아는 아트만, 영, 신성을 집권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당연히 진정한 영원성, 절대적 불멸이라는
궁극의 지대로 이끌립니다.
“궁극의 지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의 제한되고 필멸인 현재의 자아 감각이 죽어야만 한다.
현 수준의 죽음을 수용할 수 있을 때까지
자아는 진정한 무한성의 직관을 그 유한한 수준에 적용시킬 뿐이다.”
결국 삶과 죽음,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싸움이
분리된 모든 자아에 내재하는 주된 싸움이고 기본적인 불안입니다.
이것이 바로 실존주의가 직면한 충격이며 불안입니다.
이것은 원초적인 공포감이어서 진정으로 초월했을 때만 사라집니다.
그 초월의 원리는 결국 수용과 죽음입니다.
해당 의식 수준의 에로스가
완전히 호소력을 잃을 때까지 분리는 지속됩니다.
대체물을 통해 영원을 갈구하는 욕망이 철저히 무너지고
전혀 동기를 주지 못할 때
바로 그 지점에서 그 수준의 죽음이 수용됩니다.
타나토스가 에로스를 능가하면
다음 상위 구조로의 변용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켄 윌버의 홀라키 구조에 따라 이런 일들은
계속 더 높은 수준에서 일어납니다.
하위 수준의 죽음을 수용함으로써
자아는 거기로부터 분화되어 초월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더욱 통일되고 더 의식적이며
아트만에 더 가깝고, 귀환에 더 가까운
높은 차원의 자아로 진화하거나 변용됩니다.
낮은 파편의 죽음을 수용함으로써
자아는 높은 차원의 전체를 기억하며,
변환되는 것을 멈추고 변용이 일어납니다.
점점 더 많이 기억하고, 점점 더 통일되며
점점 더 초월하고, 점점 더 많이 죽어가는 식으로 진화가 진행됩니다.
그리고 모든 분리가 재결합되었을 때
그 결과는 최종적인 전체가 됩니다.
모든 죽음을 거쳤을 때
그 결과는 오로지 신뿐이다.
-켄 윌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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