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2)

[즉문즉설] 제189회 저항하는 재혼한 남편의 아들

Buddhastudy 2012. 12. 6. 05:07
출처 YouTube

 

남편하고 나하고 사이에선 아이가 없어요? 그러면 지금 그럼 결혼 한지 얼마나 됐어요? 애들만 없으면 남편하고 사는 덴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면 이제 남편입장에서 먼저 생각해 보면 애기 둘에 대해서 아빠가 우리가 다른 입장 내 입장을 떠나서 생각해 보면 애기 둘 있는 남자가 새로운 여자를 만나 거기 푹 빠져가지고 애들은 안 돌보고 만약에 이렇게 한다면 다 욕하겠죠. 그러니까 결혼을 해서 아내를 사랑하는 건 사랑하더라도 자기 아이들 감싸고 잘 보살피려고 하는 건 나쁜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또, 내가 낳아서 키운 애들이면 내가 때려도 다 엄마의 사랑이라고 말하는데 만약에 내가 낳지 않는 내가 계모로 들어가서 그 아이들을 때릴 때는 똑같이 사랑으로 때린다고 하더라도 남이 볼 때 옛날에 우리 역사 속에서도 콩쥐 팥쥐 생각하잖아. 그죠? 그러니까 계모가 아이들을 학대한다. 이렇게 생각하기가 쉽잖아요? 그 자기 위치가. 그런데 그 위치를 자기가 파악을 못 한 거요.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했다면 이런 상황에서는 아이들을 야단을 치거나 때리는 거보다는 무조건 감싸주는 게 아이를 위해서도 좋고 남편하고의 관계에서도 좋고 나를 위해서도 좋죠. 주위 사람이 보기에도 그렇고. 지금처럼 애를 때리면 애도 친엄마라도 요즘 반항하는데 일단 애는 반항할 뭐가 생긴다? 반항할 자기 나름대로의 핑계가 있겠죠. ‘당신은 계모다.’ 이런 핑계가 있을 거 아니오. 그죠? 그래서 내가 부당하게 당한다. 내가 너한테 부당하게 당해야 될 이유가 어디 있느냐?

 

내가 힘이 없을 때는 몰라도 힘 있겠다.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거요. 그런데 이게 친자식일 때는 애가 핑곗거리를 찾기가 어렵다. 이 말이오. 자기 부모에게 저항할 만한 핑계를 찾기가 만들기가 어렵다는 거요. 이게 친자식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친자식일 때는 핑계를 만들기가 어렵다. 이 말이오. 그런데 친자식이 아닐 때는 핑계를 만들 수가 있다. 자기를 합리화할 핑계를.

 

그런데 아이에게 아이라는 것은 어때요? 야단을 하면 다 싫어하잖아. 그죠? 그러면 뭔가 도망갈 핑곗거리가 지금 자기는 제공된 상태에 놓여있다는 거요. 그 상황을 파악을 못 했다는 거죠. 아이라는 것은 늘 어떤 특징이 있느냐? 따라 배운단 말이에요. 그래서 애들은 절에 와서 애들이 살 때 예불하기로 약속하고 들어와도, “너희 왜 예불 안 하니?” 이러면. “스님도 안 하던데요.” 이러든지. “형님도 안 하던데요.” 이러든지, “누나도 안 하던데요.” 이러든지 행자님도 언제 누가 보니 안 하던데요.” 이러든지.

 

자기가 잘못했으면 ~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아이는 백에 한 명도 안 됩니다. 반드시 자기를 합리화할 어떤 것을 찾아서 얘기하거든요. 왜 늦게 들어오니? 그러면 겉으로 말을 안 해도 속으로 아빠는 왜 늦게 들어오는데?” 이런 게 늘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키우는 사람은 모범이 돼야 된다. 그 모범이 돼야 된다는 이유는 아이에게 도망갈 핑곗거리를 안 줘야 된다. 이 말이오. 아이는 늘 그런 자기 행동을 합리화할 핑곗거리를 찾는단 말이오.

 

그게 딱 막혀있으면 꼼짝 마라가 되는데, 그게 한쪽으로 구멍이 터져있으면 바로 잡기가 매우 어렵다. 그런데 이미 내가 생모가 아니기 때문에 야단이 도에 지나쳐서 아이가 불공평하다. 이렇게 느낄 때 그것에 대한 핑곗거리, 자기 반성하기보다는 핑곗거리를 만들 수 있는 조건에 자기가 처해있다 이런 얘기요. 그걸 본인이 정확하게 자각을 못 했다는 거요. 그러니까 애가 문제다. 자꾸 이렇게만 생각을 하는 거요. 그런데 아이한테 물어보면 엄마가 문제다. 이렇게 생각할 거요.

 

자기는 안 하면서 야단친다. 이렇게. 그러고 아이들이 이미 나는 이 집에 결혼해서 이 집이 내 집이지 않습니까? 나가더라도 애들이 나가야 되겠지. 그런데 아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집은 내 집이다. 너는 내 집에 들어온 소위 객이다. 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뽑으려고 하느냐? 이런 저항감이 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미 있는 아이들 집에 들어갈 때는 그 아이들이 저항감이 있다는 것을 내가 감안을 해야 된다. 그걸 감안 안 하고 들어가서 내가 결혼했으니까

 

즉 초혼으로 한 사람과 내가 똑같이 생각을 한 거요. 그게 처음부터 내가 잘못됐다는 거요. 그래서 지금 선택해야 할 것은 현재의 남편을 선택하려고 그러면 애를 떼고 남편만을 선택할 수가 없습니다. 애와 함께 있는 남편을 선택해야 된다. 하나는 필요하니까 갖고 하나는 버릴 수가 없다. 이런 얘기요. 그리고 애를 버리려면 남편도 같이 버려야 됩니다. 지금 이제 본인은 여기서 먼저 선택을 해야 된다. 남편을 가질 때 애까지 같이 가질 것이냐? 애를 버릴 때 남편까지 같이 버릴 것이냐?

 

그래서 같이 버려 버리면 고민이 없죠. 이 문제에 한해서는 고민이 없다 이런 얘기요. 그러나 다른 문제가 있겠죠. 경제적인 문제라든지. 혼자 살아야 된다든지. 또 새로 결혼해야 된다든지. 여러 문제가 남겠죠. 그걸 혼자 한번 살아보면 애 문제보다 그게 더 클 수도 있다 이런 얘기요. 아이들 문제는 현재 발생한 문제고. 내가 혼자 살 때 생긴 문제는 아직도 발생 안 한 문제이기 때문에 그건 작게 보이고 현재 일은 이렇게 커 보이는데. 막상 살아보면 훨씬 더 큰 문제 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이미 각오를 해야 된다.

 

그래서 지금 선택으로 이혼을 하고 내 길을 가든지. 다시 말하면 내가 뭣 때문에 남이 낳아 놓은 애를 키우면서 저 반항하고, 말 안 듣고, 대들고, 내가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이렇게까지 하면서 내가 살 필요가 뭐가 있느냐? 이거는 아무리 남편이 좋아도 살 필요가 없겠다. 어릴 때라면 애들 돌봐주는 거라도 있지만, 애들이 이미 중고등학교 다 큰 애들이니까 뭐 돌볼 필요도 없고. 그러니 그들끼리 살게 하고. 나는 내 갈 길을 가야 되겠다. 이렇게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 딱 정리를 하는 길이 하나 있고.

 

그런 뭐 특별히 수행할 것도 없어요. 단박에 해결되는 거니까. 두 번째 내가 이 남편하고 살아야 되겠다. 그러면 이 남편만 보지 말고 그 남편과 함께 되어 있는 남편의 자녀들을 내 자녀로 받아들여다 된다. 그걸 귀찮게 생각하면 안 된다. 그것이 신체장애든 말썽꾸러기 아이든 뭐 사고를 치든 저항을 하든 관계없이 그것은 남편의 일부다 이거요. 우리가 보통 결혼을 했을 때 남편이 직장도 잘 다니고 돈도 잘 벌고 좋은데 입에 욕설을 많이 한다든지.

 

성격이 너무 급해가지고 집어 던진다든지. 술을 먹고 한다든지. 바람을 피운다든지. 이랬을 때 우리가 다 고민이 있잖아요? 이걸 보면 버려야 되는데 이쪽 게 아깝고, 이 아까운 걸 가지려니까 이 나쁜 것도 가져야 되겠고. 그래서 다 살까 이혼할까 살까 이혼할까? 아침에 일어나면 살아야 될 거 같고. 저녁때면 헤어져야 될 거 같고. 또 아침에 일어나면 살아야 될 거 같고. 저녁때면 헤어져야 될 거 같고. 늘 이렇게 우왕좌왕하잖아요. 그래서 집에서 도저히 못살아가지고 집을 뛰쳐나와서 절이나 어디 가서 한 일주일이나 열흘 있어보면 어때요?

 

집이 갖는 그 편안함을 가질 수가 없죠. 그러니까 또 남편하고 갈등은 며칠 없으니까 안보이죠. 그러니까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집으로 돌아와 있으니까 집에서 누리는 그 편안함은 온데간데없고 남편하고 갈등만 자꾸 눈에 뜨이잖아. 그래서 또 집에서 나가게 되고. 이 반복된다. 이 말이오. 그와 똑같이 남편은 아니지마는 남편과 함께 되어 있는 이 두 자녀를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 술주정을 한다와 처럼 남편의 일부로 봐야지 떼어 놓을 수는 없어요. 그 떼어 놓는다는 것은 윤리적으로도 굉장히 나쁜 거고. 부자지간의 관계를 끊는 거니까.

 

또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아요. 인간은 부부 관계가 아무리 크다고 하지마는 부모 자식 간의 관계보다는 작습니다. 부모입장에는 자식이 가장 끈끈한 끈이에요. 그런데 자식의 입장에서는 부부가 부모보다는 더 끈끈한 거요. 모든 사람이 다 그래. 그러니까 남편하고 자식의 관계를 끊는다는 것은 현실 가능하지도 않고 또 된다 하더라도 그렇게 하면 큰 죄를 짓는 게 된다. 그건 하나로 봐야 된다. 남편의 일부로 봐야 된다. 지금 일부로 안 보고 있다는 거요.

 

그러니까 지금부터 만약에 같이 생활하려면 지금부터 애를 야단치는 거를 다 멈춰야 된다. 오직 어떤 것도 다 수용해야 된다. 만약에 애가 불을 내서 문제가 생겼다 하면 경찰서에 쫓아가서 애를 먼저 껴안고 아이고 얼마나 놀랬느냐? 쯧쯧. 큰일 날 뻔했구나. 그래도 몸 안 다치기 다행이다. 내 경찰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게. 이렇게 해 줘야 된다. “너 또 말썽 피웠구나.” 이렇게 가면 안 돼요.

 

그렇게 지금 할 수 있겠느냐? 본인이. 그렇게 아이들에게 사랑으로 보살피는. 엄마가 아니라도 학교 선생이라도 말썽꾸러기 아이들을 야단을 쳐서 안 되면 그다음 어떻게 해야 됩니까? 사랑으로 보살펴야 되요. 야단으로 쳐서 되는 게 있고, 도가 넘어버리면 야단쳐서 안 되는 거요. 갈수록 더 행패를 피울 거요. 그러면 누가 손해냐는 거요. 그러니까 끝까지 뭐~ 그래 니 죽고, 나 죽자고 해 볼 수도 있어요. 까짓 거 애하고, 칼부림같이 막하고 우리 세게 나가면 돼요. 그래서 결국은 뭐 애가 무릎을 꿇도록.

 

그런데 부모 자식 간에도 자식하고 싸워서 이기는 부모 없다. 이런 말 있잖아. 그죠? 그런데 이 경우는 이미 자식이 끝까지 대들 거요. 끝까지 대들면 누가 두려워지느냐? 애도 엄마가 물론 두렵지마는 지금은 가진 자가 항상 두렵습니다. 여러분들이 길거리 다닐 때도 돈을 갖고 길갈 때하고 안 갖고 산길 갈 때하고 가지고 있으면 두렵죠. 그러고 남자 여자가 외길을 가면 남자가 두려워요? 여자가 두려워요? 여자가 두려워요. 애하고 어른이 싸우면 누가 두려울까?

 

~ 유명한 사람하고 하나도 유명 안 하는 사람하고 싸우면 누가 두려울까? 잃을 게 있는 사람이 두려워요. 지금 고등학생이 잃을 게 뭐가 있겠어요? 그러고 자기 변명거리가 있잖아. 계모의 횡포를 내가 끝까지 저항한다. 이런 자기 나름대로 합리화할 게 있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싸워서는 해결이 안 된다. 무익하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 집을 떠나든지. 그 집에서 살려면 완전히 사랑으로 감싸든지. 이게 간섭 안 하는 수준에서 외면에서 그래 니 알아서 해라.” “네 맘대로 해라.” 이렇게 해서는 치유가 안 됩니다. 그러니까 완전히 사랑으로 보살피는 마음이어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든지 안 그러면 포기를 하든지.

 

둘 중에 아이를 위해서도 그렇게 하면 아이에게 도움이 되고. 안 그러면 포기해 주는 게 아이들에게도 도움이 되고 나한테도 도움이 된다. 그건 이제 선택이오. 그러니까 그 집에 살면서 기도를 하려면 아이들에게 관세음보살이 되겠습니다. 이런 마음을 내야 돼. 항상 기도하면서 저는 관세음보살입니다.’ ‘아이들을 보살피는 관세음보살이 되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면서 살아야 돼. 본인은 지금 남편을 통해서 얻는 이익만 생각하고 아이들 귀찮은 거, 이거 손해, 이건 어떻게 떼어 버릴까.

 

어떻게 기도하면 저게 정신 차려 내가 살기 좀 편해질까? 이렇게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엄마 헤어지고 할머니 밑에 자랐으니까 아이들의 심성이 많이 꼬였겠죠. 그죠? 그럼 그걸 내가 녹여주고 풀어주는 역할을 내가 해야 되겠다. 수많은 사람은 못 돌보더라도 내 남편의 자식인 두 아이들이라도 내가 상처 입은 마음을 내가 대자대비로 어루만져서 풀어줘야 되겠다. 이런 마음을 내셔야 돼.

 

그런 마음으로 기도하면 하세요. 그냥 잘 안될 거요. 보면. 내 이기심도 있고 내가 나이가 많고, 엄마고, 윗사람이 아랫사람한테는 잘 안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관세음보살님께 기도하면서 아이들을 돌보려면 집에 있으면서 그렇게 기도하면서 아이를 돌봐야 되고, 그게 도저히 내가 불가능하다하면 빨리 하루라도 늦기 전에 안녕히 계십시오.’하고 떠나줘야 아이들도 덜 상처입고 나도 덜 상처 입는다. .

 

여러분들은 내가 어떻게 살까? 자꾸 이런 걱정을 하는데, 그냥 나라는 걸 떠나가지고 우리 사회문제로 이걸 하나 보면, 엄마아빠가 헤어져가지고 사는 두 아이들, 청소년이죠. 이 청소년 두 아이의 심성을 바로 잡아서 건강한 시민이 되도록 키워주는 게 중요해요? 40된 여자가 자기 좀 편안하게 살기 위해서 돈 있는 남자하고 관계를 계속 유지한다. 하는 이 문제가 더 중요하겠어요? 그냥 개인이라는 걸 떠나서 그냥 우리가 살펴볼 때.

 

여기서 중요한 거는 나라는 걸 내려놓고 객관적으로 보면, 지금 이 두 아이를 어떻게 심성을 좀 상처를 치유하고 아이들이 상처를 좀 덜 받고 바르게 사회에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가 도우느냐? 이 문제가 중요하다. 이 말이오. 여기에 내가 기여를 할 수 있으면 어때요? 내가 이 집에 살고, 내가 있어봤자 이 문제에 아무 도움이 안 되겠다 싶으면 내가 이 집을 떠나줘야 돼요. 이것은 내가 이 남자하고 얼마나 살았느냐 이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거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이 두 청소년을 어떻게 올바르게 인도할 거냐? 이게 더 큰 문제다. 이 말이오.

 

부모가 아니라도. 객관적으로 봤을 때. 우린 지금 부모능력보다 오직 내 성질대로 안 된다. 내 맘대로 안 된다. 이 문제만 딱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이 해결을, 길을 찾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어쩌면 이런 법문이 필요하고 자기의 문제를 자기 입장에서만 보지 않고 우리가 사물을 객관적으로 봄으로 해서 길을 먼저 찾고, 거기서 자기가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 내가 여기 있어서 아이들의 교육에 도움이 안 되겠다. 내가 얼마나 이익이냐? 이걸 따지지 말고. 이 아이들의 교육에 내가 이 집에 있어서 도움이 안 되겠다.

 

내가 뭐 나빠서가 아니라. 현재의 관계에서는 내가 도움이 안 되겠다 하면 사랑도 포기해줘야 된다. 남편에 대한 사랑이 있다 하더라도 오히려 여보, 우리들의 사랑도 중요하지마는, 이 두 아이가 앞으로 올바르게 자라는 게 매우 중요한데, 내가 여기 있으므로 해서 아이들의 성장에 장애가 되겠습니다. 그러니 오히려 아쉬움을 남기더라도 우리가 헤어지고 당신이 이 아이들을 잘 돌보십시오. 전에 애 엄마를 데려오게 해서 돌보든지 해서 아이들을 스무 살 넘을 때까지 이걸 치유를 해서 사회에 내 보내야 됩니다.” 이렇게 의논을 해야 된다. 이 말이오.

 

그렇지 않고 내가 이 집에 남아있겠다. 그러면 목표를 딱 정해가지고 우리 부부 관계도 좋지마는 그것은 개인적인 문제고 내가 이 사회에 일원으로서 이 두 아이를 사랑으로 감싸서 지난 입은 상처는 조금이라도 치유에 도움이 되고 앞으로는 이 아이 조금이라도 덜 받도록 내가 기여를 해야 되겠다. 딴 데 가서 봉사를 하고 딴 데 가서 보시를 할 게 아니라 바로 이 두 아이를 바르게 키우는데 봉사를 해야 되겠다. 이게 내가 이 세상에 사회인으로서 나의 역할이다.

 

남이야 다 엄마로서 당연히 해야 될 일이지.’ 할지 모르지마는 엄마로서의 당연히 해야 될 것을 당연히 넘어서서 내가 보살행으로 해야 되겠다. 이렇게 다짐을 하고 새롭게 출발을 해야 된다. 관점을. 그렇게 안 가지면 결국은 시간이 흐르며 흐를수록 원수가 된다. 애들이 더 커서 스무 살이 넘으면 그리고 본인도 지금 같은 그런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러면 친어머니도 아니기 때문에 뭐~ 이런 식으로 갈등을 계속 일으키면 이제 어떤 불상사가 생길지도 모르는 그런 일이 생기죠. 그게 무슨 행복이에요.

 

그렇게 불안하게 거기서 큰방 가지고 살면 뭐하고 자동차 가지고 살면 뭐해요? 그란 불안 속에 사는 게. 라면 끓여 먹고 단칸방에 살더라도 사람이 편안하게 살아야지. 두 다리 떡 뻗고 그래 살아야지. 그렇게 애가 학교 수업 끝나고 오기만 해도 벌써 가슴이 철렁 내리는 그런 인생을 뭣 때문에 사느냐. 이거요. 내 마음을 관세음보살같이 내겠다고 비워버리면 아무 문제가 안 되죠. 애가 행패를 피워도 내가 두렵지 않죠. ‘아이고, 얼마나 답답하면 애가 저렇게 난리를 피울까. 아이고 제 엄마가 봤으면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이렇게 내가 마음을 내면 불안하지도 않고 화나지도 않는다. 이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