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6)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1225회]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시월드

Buddhastudy 2016. 9. 27. 19:57



[질문]
항상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저는 3년 정도 시부모님과 살다가 한 달 전에 분가를 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지금 분가를 한다면 우리와 너희, 손주까지 인연은 여기서 끝이니 분가하고 싶으면 하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저희는 분가 결정을 내렸고 부모님께서는 이사 전날 따로 부르셔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내가 인연 끊겠다는 데도 나간다고 했으니 부모, 자식 간의 인연은 너희가 끊은 것이다. 부모 탓할 생각하지 말고 니들끼리 잘 살고 명절이건 생일이건 제사건 그 어떤 며느리의 도리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또 그것이 우리의 명을 줄이지 않는 것이니 제발 부탁한다고도 하셨습니다.”
     
남편에게는 더 서운하셨는지 상속 포기각서를 쓰라고 내미셨고 저희는 써드렸습니다. 물론 시부모님은 더 분노하셨습니다. 분가로 인해 어떤 각오도 달게 받겠다고 생각하니 요즘은 마음이 이렇게 편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마음 한편에서 남편과 저, 시부모님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남편은 분가 과정에서 부모님께 실망을 많이 해서 인지 부모님을 찾아뵙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부모님이 보기 싫다는데 우리 마음 편하자고 다시 찾아가는 건 욕심이라고 하며 시간이 흐를 동안 기다려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아무리 그러셨어도 분명 기다리실 분들이니 때마다 가서 욕하시는 대로 들어드리고자 합니다. 이미 부모님은 저 때문에 아들, 손주 다 잃었다고 말씀 하셨기 때문에 저도 가서 욕먹을 게 걱정이나 저까지 모른 척 있어도 되나 싶습니다. 저도 남편도 각자 욕심에 사로잡힌 것인지, 어느 한쪽으로 마음이 내어지지가 않습니다.
     
제가 시부모님께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 건인지 스님의 좋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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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앞에 서두에 얘기했잖아요. 자연생태계를 생각해라.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될지 판단이 잘 안서면 항상 자연의 원리, 생태계에 견주어서 보면 돼. 그러니까 스무 살이 넘었으면, 자연생태계에서는 완전히 정이 끊어지는 거요. 일대일이에요. 그러니까 제비가 새끼를 키울 때, 어릴 때는 새끼를 막 깠을 때는 작은 벌레를 입에다 먹여줘요. 조금 크면 입에 안 먹여주고 벌레를 잡아서 물고만 있어요. 그러면 새끼가 어미 거를 뺏어먹어요. 그럴 때 서로 뺏어먹으려고 새끼끼리 경쟁을 하고 짹짹거리고 시끄러워서 못 살아요. 그러다가 어떤 거는 집 밖으로 떨어져 죽기도 하고.
     
그래도 어미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게 새끼들이 앞으로 벌레를 잡아먹을 수 있는 자생력을 키워주는 과정이란 말이오. 그러면 그때는 새끼지만, 더 어미 꺼를 많이 뺏어먹는 거는 빨리 크고, 못 뺏어먹는 거는 늦게 크고, 그래서 제비가 어릴 때는 똑같이 크다가 중간쯤 넘어오면 빨리 크는 게 있고, 늦게 크는 게 있고, 그래서 날아갈 때도 일주일차이정도 나는 거요. 먼저 날아가는 게 있고 나중에 날아가는 게 있고.
     
그래서 날아가면 어미를 새끼를 보호한다고 따라다니는 법도 없고, 새끼가 어미 뒤를 쫄쫄 따라다니는 법도 없어요. 그 다음에 1:1일에요. 그러니까 개체보존의 본능, 자기 생명을 자기가 보존한다. 이 말이오. 그런데 새끼를 낳게 되면 어미는 종족보존의 본능이 작동을 하는 거요. 새끼를 위해서는 자기를 희생하는 거요. 그런데 새끼가 크면 그 다음에 다시 1:1이 되고, 남남이 되고 자기 보존이 우선이 되는 거요. 이건 집에서 닭을 키우든 뭘 키우든 키워보면 다 그래요.
     
그러니까 자연의 원리에 의하면 새끼를 낳았을 때 어미가 새끼를 보살피는 거는 자연 질서에요. 책임에 속한다. 의무에 속한다 이 말이오. 이걸 안하게 되면 죄악이 된다 이 말이오. 이걸 제대로 안하는 게 인간이란 말이오. 왜 인간 중에 가끔 이런 게 생기나? 그건 약간 정신이상이 생겨서 그래요. 그러나 스무 살이 넘으면, 원래 수렵채취사회에서는 그러면 이것에 자립된 연령이 몇 살이냐? 12살입니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만약에 동물계, 우리가 자연 속에서 산다면 몇 살이면 독립해야 된다고? 12살, 농경사회에서는 15살. 산업사회에서는 지금 이게 자꾸 교육기간이 길어져서 18살이에요. 만18. 우리 나이로 대충 20살. 이렇게 말하는 거요. 정확하게는 만 18살이에요. 그래서 만 18살이 넘으면 외국에서는 다 투표권을 주고 이렇게 하는 거요. 그러면 만 18살이 넘으면 부모는 자식을 보살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죽던지 말든지 그건 자기 책임이지 부모가 책임질 일이 아니다.
     
대신에 자식도 부모로부터 간섭받을 아무런 이유가 없어요. 부모의 간섭을 안 받는다고, 부모가 얘기하는 거 안 든는다고 불효다. 이렇게 생각하면 잘못된 생각이오. 그런데 문제는 스무 살이 넘어서 부모가 주는 돈을 갖고 학교도 다니고 집에서 밥 얻어먹으면서 말을 안 듣는 거는 부모자식간의 문제가 아니라 1:1의 계약 위반이오. 상대에게 도움을 얻으면서 말은 안 들으니까. 거기서 갈등이 생기는 거요. 그러니까 간섭을 받기 싫으면 자립을 하면 되고, 부모도 말 안 들으면 지원을 끊어버리면 되요. 싸울 일은 아니다. 이 말이오.
     
자연생태계에 부모자식이 싸우는 경우가 어디 있어요? 그런데 자기는 스무 살도 아니고 결혼까지 해가지고. 그러니까 이치는 딱 분명하단 말이오. 그러니까 당연히 애기까지 있다고? 애 까지 있으면 자립해서 살아야지 왜 부모 밑에 살아요? 그리고 부모가 끊는다고 말 안 해도 끊는 게 원리에요. 포기 각서 써라 안 해도 각서를 쓰는 게 원리에요. 준다 해도 안 받으면 더 좋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그거는 지금 자기들의 행위에 대해서 아무 문제가 없다. 이 말이오.
     
그런데 자연생태계는 어미가 늙었다고 자식이 어미를, 부모를 돌보는 케이스는 없습니다. 자연생태계에서는. 왜 없느냐? 어린 아이는 생존보존의문제가 있지만, 노인의 문제는 아무리 늙어도 성인이다 이 말이오. 미성년이 아니잖아. 나이 80이라도 뭐라고? 성인이기 때문에 이거는 각각 개체보존의 본능이오. 자기 생존은 자기가 책임져야 돼. 그런데 인간은 자연의 동물보다 낫잖아. 뛰어나잖아. 뛰어나니까 늙어서 스스로 생활이 어려울 때는 자식은 뭐다? 부모를 돌보는 그런 아름다움이 있는 거요. 이건 자연생태계에 없는 인간만이 갖는 아름다움이오. 선에 들어간다 이 말이오.
     
이 선은 선택이에요. 우리 인간이게. 의무가 아니고. 그렇게 하면 동물 보다 나은 거고, 그렇게 못하면 그냥 동물 수준이고. 그 다음에 애기를 돌보는 건 선이 아니에요. 그거는 짐승도 하는 일이기 때문에. 애기를 돌보지 않는 건 뭐에 속한다? 악이에요. 그건 동물도 안하는 짓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악이라고 하는 것은 금기에 들어가고, 선이라고 하는 것은 선택에 들어가는 거요. 그러니까 효도는, 효도를 할 수 있는 선택권이 우리에게 있는 거요. 즉 그거는 선행에 들어가는 거요.
     
효도를 안 한다고 악행은 아니에요. 그런데 자기애기를 돌보지 않는 건 악행에 들어가는 거요. 애기를 돌본다고 선행은 아니에요. 그건 칭찬 받을 일은 아니에요. 그건 짐승도 쥐도 하고 고양이도 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런 관점을 딱 가지면 자기는 아무 문제가 없어. 그러니까 나와서 자기들끼리 잘 살면 돼. 그런데 자기가 짐승보다는 좀 나아야 되겠다. 지금 이 얘기 같네. 지금 보니까. 그래도 내가 사람인데 짐승보다는 좀 나아야 안 되겠느냐? 그거 좋은 생각이오. 아주 기특한 생각이에요. 그런데 그거 안한다고 나쁜 짓은 아니기 때문에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그러면 인간이 선을 너무 강조하다보니까 선행을 안 한다고 나쁜 놈이라고 된 거요. 우리 사회는 선행을 안 하면 나쁜 놈이라고 그래요. 선행을 안 하는 건 나쁜 놈이 아니에요. 이게 잘못된 거요. 효도를 안 하면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부모를 모시지 않는 거는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모시면 뭐한다? 칭찬받을 일이고. 훌륭한 일이다. 그러니까 선은 우리가 권장하는 거요. 선을 자꾸 권장을 해야 사회가 좋아지잖아요. 우리가 이웃사람을 도우면 그 사람을 내가 도와야 될 아무런 이유가 없지만 도우면 무슨 행위에 들어간다? 선행에 들어가잖아.
     
그러니까 이웃 사람 안 도왔다고 악행은 아니라는 거요. 남의 물건을 뺏어야 악행이지 도와주지 않았다고 악행은 아니라는 거요. 도와주지 않는 건 선행을 한 건 아니죠. 그래서 우리는 선은 권장하니까 자기가 선행을 하는 건 좋은 일이오. 그러나 그것은 나쁜 짓은 아니니까 부담 가질 필요는 없다. 그러나 자기애기를 돌보지 않는 거는 나쁜 짓에 속하는 거요. 그건 짐승보다도 못한 행위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냥 나와서 살면 되요. 그래도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짐승보다는 좀 나아야 안 되겠어요? 그죠? 그러면 어머니가 어떻게 하든 그건 어머니 사정이고, 내가 선행을 해야 되니까, 내가 선행을 해야 우리 아들도 본받을 게 있을 거 아니오. 그러니까 내가 짐승처럼 살면 애가 짐승수준 이상 본 받을 게 없잖아. 그래서 애기 데리고 내가 할머니 집에 가면 되는 거요. 할머니가 뭐라고 그러는 거는 어머니 인생이고, 나는 나대로 선행을 하면 되는 거요.
    
가서 보니까 싫어하고 욕을 하고 하더라. 그러니 내가 선행을 하러 갔는데, 할머니가 너무 화를 내니까 이건 할머니를 도와주는 게 아니고 뭐다? 오히려 괴롭히는 게 된다. 그러니까 이거는 선행을 하러 오기는 왔는데, 선행이 안 되겠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안 오면 되는 거요. 그러다가 한 1년이나 쉬었다가 또 한 번 가보는 거요. 가보니까 또 그렇다 그러면 또 좀 쉬었다가 또 한 번 가보는 거요. 가보니까 풀어졌더라하면 다니면 되는 거요.
     
그러니까 그거를 가는 게 좋으냐? 안 가는 게 좋으냐? 이렇게 정할 필요가 없고, 첫째 안가도 된다. 그러나 선행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된다? 가면 좋다. 그런데 그게 가면 좋은지 안 좋은지는 나 혼자만 결정이 안 되고 상대편하고 관계가 된다. 즉 내가 여자 분에게 당신 사랑합니다. 하고 내가 껴안았다. 이 말이오. 그런데 상대도 나를 좋아하면 이게 포옹이 되는데, 상대가 싫으면 이건 뭐가 된다? 성추행이 되는 거요. 나는 사랑한다고 했는데 성추행범으로 걸린단 말이오. 그러면 억울해 한다. 아니에요.
     
그래서 상대가 싫어하면 “아이고 죄송합니다”하고 왔다가 그래도 좋으면 또 한참 있다가 또 가서 “사랑합니다” 해보면 그래도 싫다 그러면 또 와야 돼. 좋다고 껴안으면 성추행 범이 되는 거요. 그렇게 해서 한 5번쯤 갔더니 계속 그럴 수도 있고, 마음이 바뀌어서 정성이 갸륵하니 봐주겠다. 이래서 포옹할 수도 있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그걸 내 일방적으로 선택을 하면 안 되지만, 나는 자식으로서 뭐다? 부모에게 예의를 하는 건 좋아요. 그런데 그게 간다, 안 간다가 문제가 아니라. 가서 상황에서 결정이 나는 거요.
     
그러니까 그건 테스트를 해보면 되는 거요. 싫어하니까 아예 안 간다든지, 싫어해도 계속 간다든지, 그런 거는 아니에요. 테스트를 싫어하는 강도를 봐서 전에 보다 조금 나은 거 같나? 싫어하는 건 하는데 조금 약해졌다. 그러면 조금 자주 가면서 테스트를 하고, 오, 싫어하는 강도가 더 강해졌다. 그러면 텀을 조금 더 멀리해서 가야 돼.
     
자기가 상대를 봐서 이게 다른 길이라는 것은 정해져 있는 길이 아니야. 두 사람의 관계가 내가 상대를 좋아하면 사랑이다. 이렇게 정할 수가 없어. 상대하고 견주어서 적절해야 돼. 그러니까 그거는 자기가 테스트를 해보면 되요. 3개월 만에 한번 가보고, 3개월 만에 한번 가보고. 안 그러면 조금 강도가 세면 조금 시간을 늦춰서 가보고, 강도가 약해지면 조금 당겨서 가보고, 이렇게 실험을 해보면 감이 오죠.
     
그런데 남편한테는 악행이잖아. 그러니까 둘의 균형을 잡아야지. 남편한테는 악행을 해서 어머니한테 선행하려고 그래? 그러니까 남편이 싫다하면 그것도 기준을 잡아야죠. 그러니까 어머니도 싫다고 그러고 남편도 안가겠다 그러면 자기가 거기에서 중간에 끼어서 자기가 뭘 해보겠다하면 안 되고, 그러면 남편한테 자기가 첫째는 같이 사는 사람이 우선적이니까 남편의 동의를 얻고 가야지. 남편이 절대 안 된다. 그러면 안가야지 뭐.
     
그런데 같이는 안가더라도 “그래, 네가 가는 건 허락한다. 난 안가겠다.”그러면 나만 가면 되고, 그러면 가서 내가 테스트를 해서 어머니가 괜찮아졌더라하면 남편도 같이 가면 되고, 남편이 안 된다. 그르면 안가는 게 낫지. 그리고 남편이 안 된다 그래도 자기가 어떤 일도 우리가 돈을 자립해서 살면 좋지만 대게 급할 때 꾸어오는 거 있듯이, 남편이 안 된다. 그래도 한 몇 년이나 그렇게 된다면 살짝 한번 가보는 건 좋지. 가서 테스트를 해보고 어머니는 풀렸는데 남편이 안 풀렸다. 그러면 어머니는 놔놓고 남편을 풀 도록 정성을어머니한테 쏟을 게 아니라 남편한테 쏟아야지.

그럴 때 부담은 갖지 말고 해야 된다. 왜냐하면 그거 안한다고 악행은 아니기때문에. 그러니까 가장 중요한 거는 일단 자기가 부모로서의 역할, 즉 자식을 정성 것 돌보는 게 우선이어야 돼. 그런데 유교적인 이런 부모중심으로 자꾸 윤리가 생기다보면, 옛날에 우리 조선시대에 그러잖아요. ‘자식은 낳으면 되지만 부모는 죽으면 다시는 못 보기 때문에 자식을 죽여서라도 부모가 굶으면 부모를 먹여 살린다.’ 이런 거는 자연생태계에 어긋나는 거요. 자연생태계에 어긋나는 거는 인간 윤리는 자연생태윤리에 기반을 한 윤리라야지, 자연생태계를 거슬러서 하는 거는 좋은 게 아니야. 부모에게 효도하지 마라가 아니라, 그것은 선택의 문제다.


즉 선이기 때문에 선은 선택의 문제고, 악은 의무의 문제에요. 선과 악은 그래서 조금 달라요. 그래서 지악, 악은 멈춰라. 수선. 선을 닦아라. 닦는 거는 선택의 문제잖아. 멈추는 거는 금기란 말이오. 그래서 그것은 성격이 조금 달라요. 좋은 일은 할 수 있으면 하고 못하면 그만이고, 하는 데까지 해라. 이런 얘기고. 나쁜 일은 무조건 딱 중지를 해라. 나쁜 일도 하는 데까지 해라 이런 말은 안 돼요. 나쁜 일은 딱 멈춰야 되는 거고 좋은 일은 하는 데까지 해라. 이런 얘기란 말이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