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6)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1227회] 시동생과의 악연, 이제 그만

Buddhastudy 2016. 10. 4. 20:36



 

질문) 결혼한 지 한 40년 됐는데 둘째 서방님하고 참 많은 안 좋은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늘 이렇게 저희 집에 오면 좋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마음 자세가 아니고, 하여튼 많은 불만족한 그런 생활을 많이 했는데, 한 달 전에 벌초를 하러간다고 왔어요. 왔다가 예초기를 잘못 작동하는 바람에 제가 다리를 좀 다쳤습니다.

 

그래가지고 다치는 순간에 40년 동안 시집살이 하면서 안 좋은 마음을 여기서 악연이 끊어졌으면 하는 그런 간절한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관세음보살님한테 간절한 마음으로 안 좋은 모든 악연이 여기서 끊어졌으면 하는 생각을 제가 했습니다.

 

그런데 마음은 그렇게 먹고 생각을 했는데, 또 다른 한편에서 그 번뇌 망상이 많이 원망스러운 생각도 들었어요. 그런데 앞으로 그렇게 시댁 식구들을 만나면서 좋은 마음의 자세를 가지려면 어떤 자세를 더 가져야 할지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사고가 어떻게 났는데?

그래서 예초기가 쇠판으로 되어있는 게 있고, 끈으로 되어 있는 게 있잖아요. 그래서 사고가 자꾸 나니까, 편리할수록 사고가 나서 위험하잖아요. 그래서 끈으로 된 거로 바꾸셔야 되요. 그래야 이게, 나도 그거 쓰다가 부딪쳐서 돌알이 떨어져서 안경을 때렸는데, 안경이 구멍이 뚫리더라고. 만약에 안경 안 끼고 했으면 눈 빠질 뻔 했죠.

 

그러니까 사실 보안경을 끼고 해야 되는데, 실제로 일해 보면 보안경 그렇게 잘 안 껴져요. 그러니까 우리가 안전에 좀 무디잖아요. 왜냐하면 어릴 때부터 살기를 그렇게 살아서, 그랬기 때문에 그냥 대충 하게 되는데, 그래서 그런 게 좀 위험하니까. 사실은 조심해야 되요. 농촌에서 사고가 요즘 많이 납니다. 옛날에 경운기도 넘어지고, 술 먹고 시골에서 운전하고, 왜냐하면 차처럼 운전면허증도 없고 이러다 보니까, 많이 다치고 이런 사고가 생기는데 아무튼 유의하시고요.

 

그러면 이럴 때 어떻게 받아들여야 되느냐. 저는 심리를 보셔야 되요. 그러니까 만약에 자기가 차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이거보다 더 크게 다쳤다. 그럴 때 이 사고를 상대편 차하고 부딪혔거나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될 거 같아요? 지금보다 더 다쳤을 수도 있잖아. 지금은 다리 다쳤지만, 다리 다친 거야 다리를 못 써도 뭐타고 다니면 되요? 휠체어 타고 다니면 되는데, 머리를 다치거나 다른 곳을 다치면 더 어렵지 않습니까? 그죠?

 

그랬을 때 그게 그냥 하나의 사고잖아요. 그러니까 이거는 그냥 하나의 사고에요. 그러니까 둘째 시동생이 마침 그렇게 부주의해서, 사람이 불평이 많은 사람이다 보니 부주의해서 지금 생긴 문제이지, 그게 자기가 시댁식구를 미워해서 생긴 거는 아니에요. 지금까지 우리는 늘 그렇게 생각해 왔어요. 그러니까 예를 든다면 비가 안 온다. 그래서 가뭄이다. 안 그러면 홍수가 많이 진다. 그런데 동네에서 어떤 유부남과 유부녀가 연애를 했다. 그러면 저 인간이 부정한 짓을 저질러서 가뭄이 들었다. 옛날에는 다 이런 식이었잖아요.

 

그런데 그거하고 가뭄하고는 별 관계가 없는 일이에요. 그런 것처럼, 사고하고 자기가 시댁에 대해서 시동생이 애를 먹여서 불만을 가진 거 하고는 별로 관계가 없어요. 그냥 사고가 난 것뿐이에요. 그런데 평소에 뭐가 있으니까? 불만이 있으니까 거기에 대해서 어려움이 있으니까 사고가 딱 나자마자 한쪽은 원망이 생기고, “좀 제대로 하지. 계속 애먹이더니 결국은 나까지 다치게 한다.” 이런 본질적인 원망이 있고,

 

또 반성을 하는 마음에서는 아이고, 내가 그걸 못 받아줘 놓으니까 자꾸 원망을 해 놓으니까, 하나님이나 부처님이 나한테 죄 값을 주나.” 이런 반성의 마음, 이중 마음이 지금 드는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사고는 그냥 사고로 받아들이세요. 스님이 비행기를 타고 지금 전 세계로 다니고, 맨날 차를 타고, 하루에도 전국을 돌아다니고 이러면, 스님이 마지막에 죽을 때 어떤 스님들처럼 탁~ 가부좌해서 죽겠어요? 교통사고 나든 무슨 사고 나서 죽을 확률이 높아요?

 

사고 나서 죽는다는 게 아니라, 사고 나서 죽을 확률이, 일반 스님보다, 산에 가만히 앉아 참선하는 스님보다 아마 백배는 높다 이렇게 봐야 되겠죠. 백배는 높다고 반드시 사고 나서 죽는다. 이런 얘기는 아니에요. 그러나 확률이 높아지는 거요. 그러면 수행이라는 것은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죽으면 수행이 잘 되었고, 길거리 가다가 사고 나서 죽으면 아이고, 그 스님 그렇게 도력이 높다더니, 길 거리 가다 지 죽을지도 모르고 그랬냐?” 이렇게 평가하면 안 돼요.

 

이거는 이렇게 하면 내가 사고율이 높다는 거를 알고도, 그런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한다. 이게 수행이지. 그게 죽는 모습이 어떠냐? 이런 게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 우리는 늘 관점을 잘못잡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부처님이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자기 다리 다치게 만들고, 하나님이 무슨 그게 있어 자기 다리를 다치게 만들겠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부주의해서 생긴 사고니까, 부주의해서 생긴 사고는 그냥 하나의 사고로 받아드리고, 단지 내 마음이 원망하는 마음이 있고, 말썽피우던 시동생이 꼭 또 이 사고까지 치니까, 그냥 화가 한쪽에서는 치밀고, 또 한 쪽에서는 자책하는 마음도 들고, 이런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그거하고는 관계가 없다. 이렇게 오히려 정리를 하시고, 치료는 그냥 치료대로.

 

다 친 거는 참회한다고 낫는 게 아니고, 원망한다고 낫는 것도 아니고, 뭐해야 낫는다? 치료해야 낫는 거다. 그건 별개로 하시고, 그대로 치료하면 낫는 거요. 그러니까 수행이라는 건 뭐냐? “그래도 그만하기 다행이다.” 아시겠어요? 그거 잘못해서 다리가 두 개 다 날아갈 수도 있고, 내가 다쳤으니까 다행이지, 시동생이 다쳤으면 지 잘못한 거는 생각 안하고, 앞으로 아마 손해배상 물고 난리 피울지도 몰라요. 내가 다치고 마는 게 낫지. 더 시끄러워질 수도 있는 거니까.

 

그리고 또 내가 크게 죽을죄로 사고가 난 것도 아니니까, 만약에 불교신자라면, “아이고, 부처님 다치기는 했지만, 그래도 부처님의 가피로 이만하기 다행입니다.”하나님 같으면 하나님, 이만하기 다행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게 필요하다. 그러니까 이만하기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기도가 필요한 거고, 그 다음에 시동생에 대해서는 자기가 이렇게 일 저질러서 문제가 생겼다는 건 좀 알아요? 몰라요? 알고는 있어? 그러면 애를 조금 덜 먹일 수도 있잖아요. 미안해서. 안 그래요? 얼마 갈지는 모르지만.

 

그러니까 또 생각해보면 몸이 좀 다쳐 고생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게 남편이나 다른 사람이 사고를 쳤으면 이런 부대효과는 없잖아요. 애먹이던 시동생이 사고를 쳤으니 그게 조금 자기가 미안한 줄 아니까, 대신에 몸은 다쳤지만, 다른 부수입이 좀 생겼잖아요. 이것도 좋은 일이에요. 그러니까 길 가는 사람, 다른 사람하고 사고 났으면 이런 부수입이 안 생기는데, 애먹이던 인간이 이랬으니까 부수입이 좀 생겼어요. 원망할 일은 아니고, 어차피 날 바에야, 그 인간이 낸 데, 내가 다치는 게 오히려 나한테는 득이다. 이렇게 생각하시고.

 

그리고 자기가 말했지만, 이렇게 몇 십 년을 애먹이는 사람은 그게 쉬 고쳐질까? 안 고쳐질까? 고쳐지면 그렇게까지 안하지. 그죠? 그러니까 죽을 때까지 이런 인간이에요. 그러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받아들일 거냐는 문제거든요. 그걸 약간 좀 불쌍하게 받아들이고, “아이고, 얼마나 힘들면 저러겠나.” 이렇게 받아들이면 행위는 똑같은데 내가 편안하고, 그걸 자꾸 아이고, 저게 몇 십 년을 아직도 저 짓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내가 힘드는 거요. 죽을 때까지 그냥 갈등하다가 죽어야 되니까, 그래서 그것도 내가 다친 것도 아이고 이만하기 다행이다.” 하듯이 그 시동생도 더 자기를 괴롭힐 수도 있잖아.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 그렇게 건강도 그렇게 하고 시동생도 그렇게 생각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