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 역사/전우용 사담

전우용의 픽 7화 - 우리가 몰랐던 양화진 외국인 묘지

Buddhastudy 2019. 5. 15. 20:27


사담 속 코너 전우용의 픽입니다.

정확히 100년 전, 3.1운동 소식을 외국의 긴급뉴스로 타전한 미국인 특파원 앨버트 테일러입니다.

그 사람이 짓고 살았던 집이 서울 행촌동에 있는 딜큐샤인데요,

서울시가 그 집을 리모델링해서 외국인 독립운동가를 기념하는 공간으로 개방하기로 했습니다.

(앨버트 와일더 브르스 테일러, 딜큐사: 19193.1운동 독립선언서를 외신으로 처음 보도한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의 가옥)

 

201931일에 복원공사 현장이 시민에게 공개되어 많은 관심을 끌었고, 2020년 개관할 예정입니다.

오늘의 픽은 <우리가 몰랐던 양화진 외국인 묘지>와 딜큐샤라는 이야기로 준비해 봤습니다.

 

한글과 달리 중국의 한자나 일본의 가나에는 띄어쓰기가 없습니다.

국문 고전소설에도 띄어쓰기가 없었습니다.

띄어쓰기가 없는 한글, 생각해 보셨나요?

아마 한글 띄어쓰기가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글 읽는 데 상당히 많은 불필요한 에너지를 더 써야 했을 겁니다.

 

누가 한글 띄어쓰기를 처음 만들었는지 혹시 아시나요?

세종문화회관 동쪽에 가면 주시경공원이라는 작은 공원이 있습니다.

(주시경 공원: 광화문역 8번 출구 세종문화회관 뒤쪽에 위치,

한글 발전에 기여한 주시경과 헐버트 동상이 있음)

 

한글 맞춤법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셨던 주시경 선생의 공적을 기리는 그런 의미에서 조성한 공원인데요,

(주시경 1876.11.07.~1914.07.27.

우리말 문법 최초 정립, 국어의 체계화 한글의 풀어쓰기 등 국어학의 선봉자)

 

거기에 가면 한편에 주시경 선생의 부조가 있고, 또 한편에 외국인의 부조가 있습니다.

그 외국인이 바로 호머 헐버트라는 사람입니다.

(육영공원 1886: 조선후기 한국 최초의 근대식 공립교육기관 양반 자제만을 대상으로 삼는 등 대중교육의 한계)

 

1886년 육영공원 교사로 와서 1889년 세계지리 교재라고 할 수 있는 <사민필지>를 한글로 썼는데, 그때 처음으로 띄어쓰기를 도입합니다. 한국 띄어쓰기를 만든 1등 공로자이기 때문에 그래서 한글 기념공원에 헐버트의 부조를 세웠던 것이죠.

(사민필지 1889: 한국최초의 세계지리 교화서, 근대 한국인의 세계관과 우주관 변화에 영향)

 

호모 헐버트는 1942년 워싱턴에서 열린 한국자유대회에서 연설합니다.

나는 1,800만 한국인들의 권리와 자유를 위해 싸워왔으며,

한국인들에 대한 사랑은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가치다.

결과가 어떻게 되던 나의 그러한 행동은 값어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 -헐버트 한인자유대회 발언

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한국정부수립 이후인 19497월 한국에 온 지 일주일 만에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소원대로 한국 땅에 묻혔습니다.

어디에? 양화진외국인묘지에 묻혔습니다.

 

양화진외국인묘지가 만들어진 경위를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1889년 여름, 서울에서 최초의 서양인 사망 사건이 발생합니다.

미국인 선교 의사로서 제중원에서 일하고 있던 존 헤론이라는 사람이 이질로 갑작스럽게 사망합니다.

(존 헤론 1856.06.15.~1890.07.26.

2대 제중원 원장으로 의료활동 중 이질_대장에서 발생하는 전염병으로 사망)

 

당시 유럽 또는 일본은 조선정부와 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자국민의 사망에 대해서 정부가 묘지를 제공할 것이란 조약을 넣었지만, 인천에 외국인을 위한 묘지를 만들어주었지만, 서울에 묘지를 만든다는 것은 한국관행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왕조차도 죽으면 도성 안에 묻힐 수가 없었던 것이 당시의 우리나라의 법률이었습니다.

왕이든 양반이든 서민이든 죽으면 무조건 성 밖으로 나가야 했던 거죠.

 

그래서 헤론이 죽자 미국인들은 조선정부에 묘지를 확보해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조선정부는 가만히 놔두면 인천에 묻겠지...’ 아니면 당시 일본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화장해서 본국으로 가져가겠지...’ 이렇게 생각하고 대책을 세우지 않습니다.

 

그러자 선교사들과 외국인들이 모여서 조선정부에 일종의 항의 시위를 합니다.

집안에 묻겠다.

서울 땅 안에 무덤을 쓰는 것은 국법으로 금지된 일이었기 때문에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말렸고, 조선정부도 부랴부랴 양화진에 작은 밭을 하나 사서 묘지를 만들어줍니다.

(양화진에 최초로 안장된 존 헤론: 조정의 신임을 받고 있던 알렌, 언더우드의 청원으로 양화진 묘지 사용허가 1893.10.24. 헤론을 처음으로 외국인묘지공원이 터를 잡게 됨)

 

그 이후로 이 땅에서 서양인이 죽을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양화진외국인묘역은 넓어졌습니다.

조선정부가 매입해서 만든 묘지였죠.

한국독립운동에 또는 한국 근대문화건설에 많은 공헌을 했던 사람들이 묻혔습니다.

 

*일제의 침략만행을 폭로하고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을 고취하는데 큰 기여를 했던 이른바 대한매일신보사주 어네스트 토마스 베델

*세브란스 병원과 의학교를 세웠던 캐나다인 에비슨,

*대한제국 군악대장으로 한국에 와서 이른바 서양음악, 근대음악을 이 땅에 뿌리내리게 도와주었던 독일인 프란츠 폰 에케르트.

*이 땅에서 최초의 크리스마스 실을 발행하는데 결핵퇴치의 선구적 업적을 남겼던 미국인 홀 일가,

*병신학교 연희전문을 세워서 근대 교육보급에 큰 족적을 남겼던 언더우드.

*배재학당 정동교를 세웠던 미국인 아펜젤러

이런 사람들의 무덤이 양화진에 자리 잡은 거죠.

 

추모인구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죽었거나 어떤 사람의 기일이면,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추모하고 서울로 되돌아오는 일을 반복했죠.

당시 양화진외국인묘지는 공식명칭이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입니다.

그리고 이 관리 주체도 기독교 교단으로 되어있습니다.

 

애초에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을 조성한 것이 조선정부였고 국유지였는데, 이게 어째서 사유지로 바뀌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묻혀 있는 분들이 전부 선교사들도 아닙니다.

선교활동을 통해 한국 독립운동에 기여한 분들도 아니구요.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대해선 다른 형태의 접근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더불어 이러한 이름이기 때문에 이곳에서 한국 독립운동을 위해 희생하고, 기여했던 분들을 추모하고 기리는 일들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앞으로 좀 더 따뜻해지면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한국 독립운동에 기여한 분들께 감사의 뜻을 표하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양화진외국인묘지와 딜쿠샤, 그리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외국인 독립운동가들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또 기억하는 것이 우리가 우리의 도리를 다하는 일이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전우용의 픽이었습니다.

유튜브 댓글을 통해 많은 분들이 응원해주고 계십니다.

역사에 대한 식견과 현재로 살아가는 통찰력을 기르게 해준다.

교훈과 일깨움을 얻게 된다...는 댓글 정말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응원에 힘입어 더욱 열심히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