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법문/정현스님_불설아미타경

정현스님 _ 제16회 무제불선원 (42:33)

Buddhastudy 2012. 5. 6. 20:43

  방송 보기: 불교TV

그러니까 그런 걸 하나하나씩 가까운 절에 가서 자꾸 배우셔야 돼요. 우리가 사는 것은 이것은 본인이라고 하는 것이 있어요. 본인이라는 게 있습니다. 이때 이것을 본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의미 구조가 있구요. 그다음에 나타나는 것이 뭐냐 하면 우리는 현실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이 있습니다. 그래서 보통 사람한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에서 사람이 생기는데, 이것을 근본 믿어지지 않겠지만, 根本福業근본복업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걸 보고 다른 말로 일러서 뭐라 그러냐 하면 다른 얘기로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이라고 하는 것이 있죠. 그죠? 현실복이 있습니다. 우리가 복 없으면 못살거든요. 복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한테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 그러면 근본복이 사람한테 있다는 거에요. 믿어지지 않지만 우리들한테는 근본복이 있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법장비구가 지금 여기서 뭐라고 그랬냐 하면 어떤 사람인지 불선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진짜가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착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는 뜻입니다. 거꾸로 얘기하면 불행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는 거에요. 아니 말이 이상하다. ^^ 불행한 사람은 본래 없어야 이게 맞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얘기는 무슨 얘기냐 하면 근본적으로 모든 것이 다 복으로 가득 찼다. 이런 뜻입니다. 이걸 근본 복이라고 말하고, 지금 우리 불자님들이 사용하고 저도 사용하고 있는 것이 현실 복이에요. 현실 복으로 사는 것이 현실복이라는 거에요. 조금 복잡해진 거 같은데. 이것은 근본으로 우리한테 가지고 있는 복을 이 복은 언제든지 누구한테든 평등한 상태에 있습니다.

 

누구한테나 이게 열려져 있는 거에요. 이 복은. 근본복이라는 게 사람한테 있습니다. 따라 하겠습니다. 나한테는 근본복이 있다. 그건 부처님이 베풀어 준 복이에요. 자기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자기 복이에요. 그런데 이거는 언제든지 평등해요. 그다음에 여기에는 언제든지 뭔 뜻이냐 그러면 자유로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다음에 뭐냐 하면 언제든지 행운이라는 것이 행운이라는 복이 그냥 그대로 늘 붙어 다닙니다. 언제든지 붙어 다닙니다. 그리고 제가 붙인 게 뭐냐 하면 大安대안의 세계를 내가 설명해 드리고 싶거든요. 정말로 편안한 것이 있습니다. 내 복안에는 요거를요, 오늘부터 요거 외웁니다.

 

나라고 하는 본인이라는 것이 있다면 나는 본래 없는 거거든요. 내가 없으니깐 병, 불행도 없는 건데 자기가 있으니까 자꾸 불행한 일이 생기는 거에요. 그러면 나 없으면 어떻게 삽니까? 그러는데 이런 질문은요, 진짜 초등학교 학생들 질문이에요. 나라는 존재성이 없으세요. 평생 쌓아도 나는 없는 거에요. 그런데 거기에 병, 불행이 깃들만한 내가 없는데 자기라고 하는 오만을 자꾸 내세우는 거에요. 그런데 보통 보면은 우리가 사용하는 데는 뭐라고 표현하냐 그러면 우리가 알고 있는 삶을 살아가는데, 무슨 복이 생기냐 하면 자꾸 벌어들이는 것에도 쓰는 것에도 차별이 있습니다. 모든 것에 차별이 있어요. 이게 현실복이라고 그러는데.

 

그다음에 뭐죠? 집착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말하는 것이 언제든지 있어요. 이거 글자를 잘 보면은요, 집착이라는 게 이게 보면은 양이거든요. 양에 丿작대기 하나 떡 찍고 눈으로 양을 지켜보고 보는 거에요. 그런데 양이 혼자 있어요? 여럿이 있어요? 양은 본래 떼로 다니게 돼 있거든요. 그런데 하나에만 눈이 딱 박혀가지고 봐요. 그죠. 자기가 돈이라고 말한다면은 요 돈이 자기 돈이거든요. 자기 돈에만 눈이 딱 박혀가지고 이기심이 자기를 지배하고 있는 동안 돈밖에 안 보이는 거에요. 그러면 다른 복을 들여다볼 수가 없어져 버려요. 이건 뭐냐 그러냐 하면 이건 차별이라고 말하는 거구요. 똑같은 말이거든요. 이건 뭐라고 그러냐 하면 집착이라고 말합니다. 집착하는 것. 그렇죠.

 

그리고 자기 현실 복에는 늘 불행감도 같이 존재해 있습니다. 불행이 있어요. 그다음에 뭐냐 하면 불안해요. 편안하지 않습니다. 이것도 안 편하고 저래도 안 편하고. 그래서 요런 세계를 뭐라고 그러냐 하면 요쪽 세계를 무슨 세계라 그러냐하면 불성 세계라고 표현하구요. 이쪽 세계를 중생 세계라고 표현합니다.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요, 여기 가운데에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마음이거든요.

 

마음은 실체가 없으세요. 이 마음은 본질적으로 평등하고 본질적으로 자유롭고 본질적으로 행운이 깃들어있고 본질적으로 대안이 있어요. 큰 편안함이 자기를 지배하고 있어요. 그런데 현실에서 쓰기만 하면 요게 요상하게 이렇게 분별도 생기고 집착도 생기고 괴로워지는 거에요. 왜 이렇게 되느냐 살펴보니까.

 

그 가지고 있는 마음이라는 게 자기 생각과 자기 언어와 자기 행위에 의해서 이런 행위에 의해서 뭐가 깃드냐 그러면 감정이나 이런 것들이 자기 안에서 스스로 무슨 일이 생기냐 하면 왜곡이라는 것이 생겨요. 이게 맞는지 몰라. 왜곡현상이 있어요. 우리가 나타나는 현상으로 나타나요. 본질은 자기가 본래 부처님처럼 불성 세계처럼 본래 크고 편안한 거에요. 본래 행운이 가득한 거에요. 본래 자유로운 영혼이에요. 본래 뭐라고요? 본래 평등한 존재인데 자기 생각이 자기 언어와 자기 행위에 의해서 왜곡이 생겨요. 왜곡이 생길 뿐만이 아니라 찡그림 현상이 일어나요. 거울에 뭐를 비추어 보다 보면 백미러 같은데 보면은 제대로 안 보이잖아요. 뒤에 들어오는 물체가 보기보다 가까이 있습니다. 그러잖아요. 이게 찡그림 현상이거든요. 왜곡현상이라 그래요.

 

그런 것이 있다는 거에요. 삶 속에. 그다음에 뭐가 있냐하면 착각현상이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건요, 진짜 찡그림이 있어요. 찡그림의 세계가 있고. 그다음 뭐죠? 착시. 착각의 세계를 가지고 살아요. 생각에도 착각이 있고, 왜곡이 있고요. 언어에도 자꾸 말 잘 못하게 되고요. 행위도 그와 같아요. 그래서 자꾸 이렇게 뒤바뀌는 과정 안에서 현실의 복이 본질적으로 요 마음을 찾아가게 되면 자기 안에 들어있는 본질적인 자기 본업에 대해서는 언제든지 대복대안을 가지고 그걸 사용하게 돼 있는데 불구하고 밖으로 흐르면서 자꾸 뭐가 생겨요? 왜곡현상이 생기고 착시 현상이 자꾸 생겨가지고 인생이 엉뚱하게 보는데 눈이 자꾸 박힙니다. 특히 예로 심원사에 다닐 때부터 계속 오신 거사님이 한 분 계세요. 그래서 감사행을 좀 배우십시오. 지장보살 수행을 하세요. 이렇게 가르쳤거든요. 내가 좀 이상해, 팔자가 이상한지 이제 아미타불 기도하세요. 이러고 있거든요. 내가 이상한 거 같애.

 

그런데 지장보살님 기도 하세요. 이러면서 안으로 감사하세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하십시오. 감사는 무슨, 오만이 가득 차 있어 가지고 받아들일 수가 없어. 그러면 여기 왜 왔습니까? 그랬더니. 여기 오면은 좀 좋아질 거 같아서 왔다는 거에요. 그럼 정말로 좋아지려면 정말로 좋아지려면 마음을 바꾸면 당신의 사고방식을 먼저 바꾸지 않으면 내가 바뀌지 않으면 절대적으로 다른 가족이나 다른 가정에서 빛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여적지는 어둡고, 여적지는 슬프고, 여적지는 괴로워했던 가족이, 이걸 따뜻한 행복한 가정으로 만드시려면 오직 자기가 먼저 따뜻해지는 길밖에 없습니다.

 

나는 아무리 하는데도 부인은 그렇게 안 합니다. 요게 문제거든요. 부인이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쓸 거 없이 자기만 하면 되는데. 내가 조금 하면 내가 백일기도했는데 내 아내가 안 변했습니까? 이래요. ^^ 백일기도했는데, 기도가 부족한 게 아니라, 판을 바꿀 생각을 안 갖고 사니까 전혀 바뀌지가 않죠. 중생의 마음을 바꾸셔야 돼. 중생의 마음을 부처님 마음으로 바꾸시는 거에요. 자기 살아가는 방식이 중생의 마음을 버리고 그 나쁘다는 뜻은 아니거든요. 중생도 아름다운 거거든요. 금생에 중생으로 살지 아니 하면 붓다를 볼 수가 없고, 진리를 얻을 수 없으니까. 몸뚱아리 그 자체가 어마어마 한 거거든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고게 뭐가 붙어요? 지금 사용하고 있는 마음이 자꾸 착각이 되고 왜곡이 되고, 뭐죠? 찡그림 현상으로 자꾸 그걸 받아들이는 거에요. 자기 현상에서 마음 쓰기를 그렇게 자꾸 반복적으로 살펴보고 또 보게 돼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기는 조금이라도 마음의 값어치를 가지지 않고, 내가 기도를 하니까 저 부인이 변해오겠지. 이렇게. 그러니까 상대만 기대를 자꾸 하고 있고, 저는 계속 그대로 하고 있어요. 그래서 내가 백일이 끝나고 나서 물었어. 거사님 행복해하십니까? 물었더니 좀 편안해진 거 같은데도 또 토가 딱~ 생겨. ~ 고약한 부인이 아직도 짜증 부리고 화를 냅니다. 거기에 박혀 있는 거에요. 그걸 놓아야 되거든요. 그게 집착이에요.

 

부인이 알아주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당신만 감사를 하면 된다고 그랬어요. 그저 남편이 뭐라고 하든지 말든지 내가 감사하면 돼요. 그렇게 가르쳐주면은요, 안으로 남편이 정말로 감사하구나. 고마운 것만 해야 되거든요. 어떤 보살님한테 그걸 가르쳐줬더니 감사는커녕, 안 좋은 것만 계속 머리에 일어난다는 거에요. 이러거나 말거나 놔두고 감사행을 계속하면은 어느 순간 그 남편이 좋은 점이 보이기 시작해요. 따뜻하고 베풀어주고 은혜로웠던 것들이 자꾸 그것만 자꾸 쫓아가면 더 좋은 것이 쫓아올 길을 열어 놓아야 될 텐데 그게 안 되는 거요. 그래서 백일 더하라 그랬더니 백일 더 했어. 그런데 아직도 미진하다는 거에요. 그게 금단현상이에요. 명현 현상이고. 같은 것이에요. 그걸 보고 뭐라고 그러냐 하면 공명의 세계가 반드시 있다고 그랬거든요. 저 좀 보셔야 돼. 시간이 별로 없기 때문에. 눈을 뜨고 바로 마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기 소리나, 자기 생각이나, 자기 행위나 이런 것들은 전부 공명 세계에 있어요. 공명 세계라는 것은 무슨 소리냐 하면 공기를 통해서 공기 속에 이게 반드시 전파되거든요. 전파하고 동진이라고 하는 움직이는 진동의 세계로 옮겨져 가요. 나무아미타불 한번 부르고 지장보살 한번 부른 그 은혜 공덕은 반드시 자기 거라는 거에요. 죽었다 깨어나도 이건 나한테 공덕이에요. 죽었다 깨어나도 나한테 도움되는 일로 오지 이게 공명 세계에요. 그게 처음에는 내가 나무아미타불, 지장보살, 관세음보살. 이렇게 한 번씩 하잖아요. 이렇게 하는 것이 아주 적어요. 그런데 요렇게 하나하나씩 늘려주고 또 늘려주고 이렇게 해 놓으면은 그게 공명의 세계가 하나가 조금조금 조금 움직이다가 이게 파동이 진동이 되가지고 결국은 그것이 자기화로 완벽하게 변해가는 공명 세계가 이루어지게 돼 있어요.

 

그 공명 세계에 건너가시게 되면은 설명할 수가 없는 일들이 생겨요. 뭔 일이 생기냐 그러면 설명되지 않는 현상이 내게 알아볼 수가 있어요. 그래서 암에 걸린 사람도 나을 수가 있고요. 그 거사님은 지금은 직업이 없어서 막~ 떠돌고 절에 다니고 그랬거든요? 직장이 생겼어요. 관계가 좋아졌어요. 자식도 아버지를 찾아요. 이건 세상이 변하는 거에요. 그 사람만 그런 게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일어나는 거에요. 다만 우리는 뭐죠? 본질적으로 근본 대복을 가지고 사는데도 자기 눈앞에 하나만 거기 눈이 딱 박혀가지고 다른 복을 불러올 것을 자기가 다 차단하고 있어요. 지혜롭지 않으니까. 복이 없으니까. 금생의 복을 자꾸 쌓으셔야 돼.

 

이렇게 공명이라고 하는 것이 염불이라는 놀라운 힘이 있거든요? 지장보살. 지장보살. 지장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이렇게 부르거든요. 그리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반복적으로 하시는 거에요. 이렇게 하고 있는 과정 안에서 모세관 현상이라는 것이 생겨요. 세포 세포 하나가 세포가 변해져 오는 거에요. 아무리 내가 악을 쓰고, 아무리 얘기를 해도 돌아서면은 신발 바꿔 신다가 다 잊어버려요. 그래도 그러면 못 알아듣는다고 안 와버리면 안 되고, 자꾸 하셔야 돼. 그러며 어떻게라도 운명이 좋아져 있어요. 어떻게라도 좋은 일이 있어요. 포기해야 될 일도 돌아와서 자기 회복으로 돌아와 있고. 이것이요. 우리들의 삶 속에 전부 이렇게 자리를 잡고 있어요. 공간이 넘어서는 공간 속에 다 들어있어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요 파장을 부르는 그 힘, 원동력이 저 아미타불 부르는 것. 관세음보살 부르는 것. 지장보살 부르는 것이 진동, 주파수를 같이 맞춰주는 게 곧 뭐죠? 염불이에요. 지극히 앉아서 부인이 알아주거나 말거나, 그렇거나 말거나, 정성으로 하셔야 돼. 모든 만물의 존재는 고유한 에너지의 파장을 가지고 있어요. 그 파장을 끄집어내는 거에요. 그게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거에요. 근본복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큰 소리로 한번 따라 해보세요. 근본복. 다 복 없으면 안 됩니다. 복 있으셔야 돼. 요거 끄집어다가 현실에 갖다 써야 되는데 생각에서 왜곡이 되는 거에요. 생각에서.

 

앎을 잘못 알고 있으니까. 나는 요게 팔자가 이래서 안 되지. 이러고. 그래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질만이 똑같은 거에요.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우리 불자님들이 가지고 있는 물질세계가 내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그 물질세계를 불러온다는 뜻입니다. 화엄경의 말씀이고 놀라운 거에요. 그런데 우리가 매일 살면서도 물질 때문에 허덕이거든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지족하지 않는 거에요. 그걸 보고 용탁 큰스님 법문에는 뭐라고 그랬냐 하면 이미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 감사할 줄 모르고, 이미 이루어진 것에 대해서 감사하지 않는 거에요.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하찮게 시원찮다 생각하는 거에요. 지금 가지고 있는 것에 고마워하지 않은 거에요.

 

그러니까 왜 괴로운 일이 생긴 줄 아세요? 없는 것을 자꾸 구하려고 하니까 괴롭구요. 이미 이루어진 것은 어디 가고 없고 계속 앞으로 더 구하려고 노력을 하니까, 거기에 자꾸 괴로움이 따라다니는 거에요. 그런데 정말로 이미 가진 것을 존재해있는 것을 더 복되게 하고 이미 이루어진 것을 더 성장하게 하려면 딱 두 가지거든요? 이미 가지고 있는 존재한 것을 더 많이 확보하게 하고,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더 많이 성장하게 하려면은 그것에 대해서 먼저 감사하셔야 돼. 범사감사라 그러잖아요. 아주 작은 것에서 이렇게 감사를 하셔야 돼. 지족의 세계는, 지족의 세계는 만족의 세계거든요. 부자 되는 비결은 만족하는 거에요.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감사해야 돼요.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을 우리가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셔야 돼. 내가 지금 존재해있는 이 자체가 다 감사한 대상이에요. 자기 자신에게도. 대다수의 불행이라고 느끼는 것은 실제로 없어요. 불행이라고 하는 것은 실체로 없거든요. 그거는 사실은 전부 행복한 일인데 자기 생각만 왜곡이 돼 있는 거에요. 자기 생각만 착각이 돼 있고. 자기 아까 말했죠. 수상행식에. 앎이 자꾸 거꾸로 알고 사는 거에요. 전부. 그러니까 행복하곤 거리가 멀고, 늘 허덕이다가 평생 그것을 좋아졌다가 싫어졌다고. 나빠졌다가 괴로워졌다가 조금 좋아지고 그러면 돌아서면 또 힘들고 억울하고 분하고 이게 굴레잖아요. 이게 윤회 아니에요. 그것에서 벗어나는 뜻이 윤회에서 벗어난다는 말이죠. 그죠. 마음을 좀 챙기세요. 으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