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법문/일묵스님_윤회와죽음

9. 일묵스님_윤회와 행복한 죽음//3월 23일 방송 - 죽음직전의 모습 (16:13)

Buddhastudy 2012. 6. 10. 19:08

  출처: 유나방송

 

안녕하세요. 오늘은 지난 시간까지 업에 관해서 전반적인 걸 알아봤습니다. 오늘부터는 이 업이, 일생동안 지었던 업이 죽음을 맞이해서 다시 윤회를 할 때 어떤 식으로 작용을 하고, 또 우리가 일생동안 지었던 업들이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 그런 것에 대해서 간단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가 일반적으로 불교에서 말하는 죽음이 나타난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네 가지 원인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가 있습니다. 죽는다고 말하는 것은 첫째 수명이 다해서 죽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대체로 타고날 때부터 그 세계에서 가지고 있는 최대수명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욕계 천상세계인 사천왕천은 수명이 인간 년으로 약 9백만 년 정도 됩니다. 9백만 년이 사천왕천에서 살 수 있는 최대수명입니다. 그래서 어떤 존재가 만약에 사천왕천에 태어났다고 한다면 그 사천왕천에서 인간 년으로 9백 만년을 살고 나면 자연스럽게 죽게 된다는 뜻이죠. 다시 말하면 사천왕천에서는 살 수 있는 수명의 최대치인 9백 만 년을 넘길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어떤 세상에서 수명이 딱 정해져 있는 곳에서는 그 수명의 최대치를 넘길 수 없기 때문에 그 최대치의 수명을 다하게 되면 죽게 됩니다. 이런 경우를 죽음의 원인 중에서 수명이 다해서 죽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고요.

 

두 번째는 생산업이 다해서 죽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전생에서 이생에 태어나게 하는 가장 주된 원인이 바로 전생의 생산업입니다. 업에 의해서 이생에 태어나게 되는데 그 업의 강도에 따라서 우리가 오래 살 수도 있고, 또 일찍 죽을 수도 있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선업의 힘이 아주 강한 경우는 또 수명이 길어질 수가 있을 것이고. 선업의 힘이 약한 경우는 오래 살지 못하고 일찍 죽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생에 올 때 그 업의 강도에 따라서 업이 강력하냐? 약하냐? 에 따라서 우리가 오래 살 수도 있고, 또 일찍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생산업이 다해서 죽는 경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업과 수명이 모두 다해서 죽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전생에 가져온 업이 그 강도가 세상에 있는 수명의 길이와 똑같은 경우에. 이런 경우에는 업과 수명이 다해서 죽는다. 이렇게 말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이해하기 쉽게 비유로서 설명을 드린다면 마치 등불이 있고, 그 호롱불, 옛날에 호롱불 같은 호롱불이 있죠. 호롱불에 기름을 부어서 불을 밝히는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호롱불을 가지고 설명을 드린다면 마치 호롱불의 심지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수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호롱불에 불이 일어나게 하는 연료. 기름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생산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호롱불이 꺼지는 원인은 세 가지로 얘기를 할 수가 있겠죠. 첫째는 호롱불의 심지가 다해서 불이 꺼지는 경우가 있을 것이고. 두 번째는 기름이 다해서 꺼지는 경우가 있을 겁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심지도 다하고 기름도 다하는 동시에 다 하는 이런 경우도 있을 수 있을 겁니다. 심지가 다해서 꺼지는 경우는 마치 수명이 다해서 죽음이 오는 경우와 같고요. 기름이 다해서 죽는 경우는 생산업이 다해서 죽음이 오는 경우를 말합니다. 또 수명과 생산업이 다해서 죽는 경우는 심지와 기름이 동시에 다하는 이런 경우를 설명을 비유로서 말씀을 들릴 수가 있을 거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의를 하실 것은 생산업이 아주 강력해서 그 세계의 수명대를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업의 힘이 만약에 남아있는 경우는 다시 한 번 그 세계에 태어나는 경우도 간혹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천상세계, 우리가 천상세계에 태어났는데 그 천상세계의 수명이 천상의 세월로 천 년의 세월을 산다고 가정을 합시다. 그런데 이 사람이 타고날 때 가지고 온 생산업은 천 년이 지나도 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경우는 일단 그 세계에서 죽습니다. 죽고 다시 그 세상에 태어나서 생산업이 다할 때까지 다시 태어나서 삶을 이어가는 이런 경우도 간혹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죽음이 일어나는 경우는 수명이 다해서 죽는 경우, 생산업이 다해서 죽는 경우? 또 둘 다 다해서 죽는 경우. 또 마지막으로 한 가지는 뭐냐 하면 앞에서 잠시 언급했던 파괴업 때문에 죽음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아까 호롱불로 비유를 하자면 마치 정상적으로 기름이 다하거나 심지가 다해서 불이 꺼지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갑자기 강풍이 불어와서. 또는 우리가 입김을 후~ 불어서 끄는 것과 같이 파괴업이 끼어들어서 삶이 지속되지 못하게 하고 죽음이 일어나게 하는 것. 이런 것이 파괴업이 일어나서 죽는 것이다. 이렇게 말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다가 죽는 경우는 이 네 가지로 요약해서 말씀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생산업이 다하거나, 또는 수명이 다하거나, 수명과 생산업이 동시에 다하거나, 파괴업이 일어나는 경우. 이렇게 죽음을 맞이한다고 불교에서는 봅니다. 그러면 이런 죽음에 가까이 가서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에 우리가 이제 우리 마음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어떻게 해서 다음 생으로 진행이 되는지. 거기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다가 이렇게 죽음에 가까이 가서 죽음을 맞이할 때 쯤 되면,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던 업들, 우리가 일생을 통해서 여러 가지 지었던 업들 중에서 가장 뚜렷하고 가장 강력한 업이 나타나서 다음 생을 생산하게 되는데요. 그 업이 나타나는 양상이 우리가 양상을 가만히 관찰을 해보면 이 죽음에 가까이 가서 나타나는 업들이 죽음 직전에 나타나는 업이 사실은 다음 생을 생산하는데 있어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죽음이라는 것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 이 생에 마지막으로 일어나는 인식과정. 이거를 임종 직전의 인식과정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이 임종 직전의 인식과정에 나타나는 어떤 업이 나타나느냐에 따라서 다음 생이 결정이 되는데.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될 것은 임종 직전에 나타나는 업이 다음 생을 결정하기는 하지만 이것이 아무런 징조가 없다가 갑자기 죽음 직전에 우리가 어떤 업이 나타나고 이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비록 죽음 직전에 어떤 나타나는 업이 가장 중요하긴 하지만 우리가 죽음에 이르기 벌써 어느 정도 전부터 그 죽음 직전에 나타나는 업에 의해서 다음 생에 나타나기 전에 그 죽음 직전의 업과 관련된 여러 가지 업들이 미리 전조현상이 나타나기 시작을 합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천상계에 태어날 그런 어떤 업을 지었고, 다음 생에 천상세계에 태어날 가능성이 있다면 죽기 얼마 전부터 벌써 마음에서는 천상의 그런 궁궐이 보인다거나 또는 천상에 태어나게 된다는 그런 여러 가지 징조들이 나타나기 시작을 하고요. 만약에 그 우리가 다음 생에 지옥으로 떨어지는 그런 과보를 받게 될 그런 악업을 많이 지어서 지옥으로 가게 될 그런 상황이라면 죽음 직전부터 지옥과 비슷한 형태의 어떤 모습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서 그 돼지백정 쭌다라고 하는 돼지를 잡아서 생계를 이어가는 그 사람은 죽기 일 주일 전부터 자기 몸이 오그라들어서 이 손등과 발도 오그라들고 해서 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손등과 발등으로 마치 돼지처럼 기어 다니면서 일주일을 보내고, 돼지울음 같은 그런 괴성을 지르면서 고통받다가 마지막에 죽음 직전에 그 악업이 나타나서 지옥으로 떨어지게 되는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이것은 뭘 의미하느냐 하면 우리가 죽음 직전에 나타난 업이 그것에 의해서 다음 생이 결정이 되지만, 실지로 죽기 직전에 이런 업들이 벌써 이렇게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을 한다는 거죠. 갑자기 죽음 직전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그 드러나는 방향이 우리가 태어나게 될 생으로 기울면서. 또는 그 생의 방향성을 가지면서 경향성을 가지면서 그 여러 가지 현상들이 드러난다. 업이 하나 둘 드러난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때 그 업들이 드러나는 형태, 양상은 마치 지금 내가 그 일을 그 업을 행하고 있는 것처럼 아주 선명하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희미하게 이렇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선명하게, 지금 이 순간에 마치 일어나는 것처럼 그렇게 업이 드러나서 그것이 우리에게 아주 선명한 형태로 이렇게 나타나면서, 우리가 태어날 곳에 그런 기우는 방향으로. 예를 들어서 천상이나 인간에 태어나면 그쪽 방향으로 기울면서 그쪽의 방향성으로 어떤 업들이 나타나고, 또 만약에 악처에 떨어진다.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 쪽으로 떨어지는 그런 업을 지었다면 죽음 직전부터 그 방향성으로 여러 가지 업들이 나타나면서 이제 우리 마음속에서 죽기 전부터 그런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을 한다는 거죠.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선업이나 불선업이 아주 뚜렷한 경우는 선처의 방향으로 기울면서 나타납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서 인간이나 천상에 태어나는 사람은 죽기 전에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고 괴롭지가 않습니다.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마치 잠을 자듯이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지내다가 죽을 때도 마치 잠을 자듯이 아주 편안하게 죽고, 잠에서 깨어난 사람이 다시 활동하듯이 다른 세상에 아주 편안하게 태어나는 이런 방향으로 죽음 직전의 모습이 나타나고요. 악업을 많이 지은 사람들은 죽기 직전부터 막~ 괴롭기 시작해서 그 고통 속에서 죽고 죽어서도 악처에 태어나서 고통을 받게 되는 그런 방향으로 태어나는데요.

 

그런데 선업도 어느 정도 있고, 불선업도 어느 정도 있고. 그래서 두 선업과 불선업이 경중을 가리기가 힘들 정도로 비슷한 형태인 경우는 선한 쪽의 표상이 나타나기도 하다가 선한 쪽의 어떤 흐름으로 업이 나타나기도 하다가 악처의 업이 나타나기도 하고 이렇게 좀 교대해서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선처에 태어나는 그런 형태의 기울면서 아주 행복하고 좋은 기억들이 자꾸 일어나기도 하다가. 또 어떤 때는 굉장히 괴로운 마음과 내가 지었던 악업들이 생각나면서 괴로워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의 사람에게 죽음 직전에 정신을 바짝 차려서 옆에서 또 스님들이나 옆에 있는 도반들이 죽을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죽어야 된다는 것을 도와준다면 이 두 가지가 비슷한 경우는 죽기 전에 그런 마음가짐을 잘함으로써 선처에 태어날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된다고도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말 중요한 것은 죽음 직전에 일어나는 인식과정, 그러니까 이 생에 마지막에 일어나는 그 생각, 업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고 순간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벌써 죽기 한참 전부터, 어느 정도 전부터 그런 경향성을 가지고 나타난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좀 이해를 하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나타나다가 죽음에 가까이 가면서부터, 우리가 태어날 곳의 경향성을 가지고 이렇게 이러저러한 업들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을 하다가 마지막에 이생에 아까 말씀드린 죽음. 죽음이라는 것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 그때 이생에 마지막으로 일어나는 생각. 그 생각이 일어날 때, 그때 어떤 업이 나타나느냐가 다음 생을 결정을 한다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이때 업이 나타나는 형태가 꼭 업의 형태로만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인식과정에서 나타나는 대상은 업이 나타날 수도 있고, 또 업의 표상이 나타날 수도 있고, 또 태어날 곳의 표상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중에 한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이 업의 표상이나 태어날 곳의 표상은 어떻게 보면 업이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업이 일어나게 된 상황이라든가. 또는 그 업에 의해서 태어날 곳을 간접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그 업이 드러나는 형태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면 죽음 직전에 나타나는 세 가지 대상에 대해서 잘 이해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세 가지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