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제가 주변에서 욕을 좀 많이 듣습니다.
근데 저한테 직접 말씀을 하시면 이분이 왜 그러실까? 하고
제가 의문을 가지고 물어볼 수 있는데, 만약 뒷말로 얘기를 하면 심증은 가는데 물증이 없어요. 이럴 때는 제가 어떻게……
제가 본인의 입으로 본인이 말하는 거니까 그냥 넘어가는데
근데 계속 그러니까 제 귀가 가득 차는 느낌이에요.
제 속에서 처음에는 괜찮은데 어느 순간에는 욕이 올라오더라고요.
사람이 절대적이면 안 된다 상대적이어야 된다고 들은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제가 상대적이라고 생각하니까 머릿속에는 분별심이 일어나더라고요.
그런데 분별심도 일으키지 말라 했는데, 상대적인 것과 분별심의 차이를 잘 모르겠습니다.//
뒷담화는 인류역사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해오던 일이거든요. 그래서 그건 신경 안 쓰는 게 제일이오. 부처님도 다 부처님 없을 때 뒷담화를 하고, 박근혜대통령도 대통령 없으면 나와서 술집에서 뒷담화하고, 그거는 인간은 다 그래요.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극소수요.
그건 자기가 신경과민이라서 그래.
욕하면 되지. 자기도.
그럼 아무도 없을 때, 밀폐된 방에 가서 하면 되지.
아이고, 그렇게 머리를 아프게 쓰네. 자, 여기 컵이 있어요. 마이크하고 3개가 있어요.
컵이 마이크보다 커요? 작어요?
컵 뚜껑 보다는?
마이크 보다는?
컵 뚜껑 보다는?
그러면 이 컵은 커요? 적어요?
이게 큰지 작은지도 몰라? 자기 몇 살인데 이게 큰지 작은지도 몰라? 모르는 것은 아니잖아. 커요? 작아요?
모르는 게 아니고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닙니다. 즉, 질문자의 말을 빌려서 대답하는 거요. ‘크냐? 작으냐?’ 고 물으니까 질문자의 말을 빌어서 뭐라고 한다?
‘크다고 할 수도 없고 작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즉,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닙니다.’ 한문으로 말하면
‘비대비소_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다.’ 이게 컵의 실상이오.
그런데 이 마이크하고 가까이 있다 보면 늘 컵을 뭐라고 우리는 부른다? 작다라고 부르는 거요. ‘작다 작다 작다 작다 작다 작다’ 이렇게 하다보면 관성이 생겨서 이 컵은 작은 게 되어버려요. 작다는 것은 이 컵에서 온 것이 아니고, 머리에 인식이 될 때 작다고 인식이 되는 거요.
이 뚜껑하고 있을 때는 나하고 인식이 될 때는 크다고 인식이 되는 거요.
그래서 크다 작다는 것은
존재에서 오는 게 아니라
인식상에서 생긴 거다.
그래서 일체유심조라고 그러는 거요.
이걸 마이크다. 이런 얘기가 아니라,
크다 작다라고 하는 이것은 인식상의 문제다.
그런데 이걸 자꾸 ‘크다크다크다크다’ 부르다보면
내가 어떤 착각을 일으키느냐?
이 컵 자체는 원래 큰 거라서 내가 크다고 인식했다.
작은 거라서 내가 작은 거라고 인식했다. 이런 착각을 한다는 거요.
이걸 뭐라고 하냐? 상을 짓는다. 그래.
크다는 상을 지었다. 작다는 상을 지었다.
즉, 상을 지었다는 말은
인식상의 문제를
객관의 문제로 착각했다.
그래서 ‘작기 때문에 작은 거지’ 이렇게 얘기하는데
‘이건 작은 것도 아니고 큰 것도 아니다.’ 이건 금강경 표현이에요.
크냐 작으냐하니까 그 사람이 언어를 빌려서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다.
그럼 반야심경의 언어를 표현하면 공이다. 이렇게 말해요. 공이다.
선적인 언어의 표현을 빌리면 ‘다만 그것이다.’ ‘한 물건이다.’
그러니까 금강경 표현을 빌려서
‘크냐 작으냐’ 하면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닙니다.’
‘무겁나 가볍나’ 하면 ‘무거운 것도 아니고 가벼운 것도 아닙니다.’
‘새 거가 헌거가’ 그러면 ‘새 것도 아니고 헌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얘기하고
반야심경 표현을 빌리면 철학적인 용어로 말하면
‘크냐 작으냐’ 하면 ‘공입니다.’
‘무겁냐 가볍냐’ 하면 ‘공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거요.
선적 표현을 빌려서 말하면
‘크냐? 작으냐?’ 해도 ‘그것입니다.’
‘무겁냐? 가볍냐?’ 해도 ‘그것입니다.’
즉, 그 사람의 말귀에 끌려가지 않는다. 이 말이오.
이게 실제의 모습, 이것을 실상이라고 그래. 그런데 우리는 인식 상으로 이것을 ‘크다 작다’라고 인식하는 거요. 그런데 그것을 착각을 해서 크다고 인식하는 것을
‘크기 때문에 내가 크다고 인식했다.’ 이렇게 착각하면 이게 상을 지은 거요.
그러면 이것을 집착하게 돼.
집착을 안 하려 해도 집착하게 되는 거요. 객관화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다만 이것은 크다고 불리거나
작다고 불리는 거지,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다.
그럼 내가 다시 한 번 물어보자
“이 컵은 마이크보다 커요? 작아요?”
그런데 “컵이 마이크보다 커요? 작아요?” 하면
“공입니다.” 이런 사람이 있어요.
“이 컵이 마이크보다 커요? 작아요?” 하면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닙니다.” 이래.
그럼 이것은 진리라고 하는 ‘이게 진짜다.’ 하는 상을 지은 거요.
이걸 법상이라고 그래.
그러니까 이 컵은 실상은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지만
이 인연에서는 뭐라고 불린다? 작다고 불린다.
저 인연에서는 크다고 불린다.
그러니까 이것은 크다고 불려도 큰 것이 아니고,
크고 작은 것도 아니지만 또 뭐라고 불릴 수가 있다?
크다고 불릴 수도 있는 거요.
그러면 크다 작다고 불리는 것을 우리가 색이라고 그러고,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닌 것을 공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공이니까 색이 되고, 색이지만 공이다. 이렇게 말해요.
그래서 반야심경에서 뭐란다?
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색이다.
이게 자연스럽게 우리의 삶 속에서 작용하는 거요.
그러니까 아까 여러분들이 ‘동생이 나쁘다.’
‘그런 내가 나쁘다고 생각한 거지, 동생이 나쁜 건 아니에요.’
나쁘면 고쳐야 되는데,
내 욕구대로 안 되니까 나쁘다고 인식한 거요.
그러니까 스님이 이런 저런 대화를 하는 것은
‘아, 나쁜 게 아니네.’ 하면 번뇌가 사라지는 거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의 대화 속에는 이런 원리가 잠겨있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상대적이다. 절대적이다가 아니라,
인식은 상대적이라는 거요.
존재는 절대적인 거요.
그러니까 모든 존재는 다만 그것일 뿐이에요.
그것을 어떻게 어떤 조건, 인연 따라 그래.
어떤 인연에서 인식하느냐에 따라서
크다고 인식할 때도 있고, 작다고 인식할 때도 있다.
이것을 법성게에서는 ‘불수자성 수연성’이라고 그래.
스스로의 성품, 크니 작니, 스스로의 성품을 지키지 아니하고
인연을 따라서 이루어진다_수연성, 인연을 따라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늘 이 세상은 크다고도 불리고 작다고도 불리고,
그러니까 목욕탕에 들어가면 옷 벗고, 나오면 옷 입고,
‘벗어야 된다. 입어야 된다.’ 이게 없단 말이오.
도란 뭐냐? 추우면 옷 입고, 더우면 옷 벗는 거다.
도가 뭐냐?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자는 거다. 이런 말을 하잖아.
도가 뭐냐? 밥 먹을 때 밥 먹고 똥 눌 때 똥 누는 거다.
그럼 중생은 뭐냐? 똥 누면서 밥 생각하고, 밥 먹으면서 똥 생각한다. 이런 얘기에요.
그러니까 그게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우리는 늘 이렇게 실제로 그렇게 생활해요. 예를 들면 애기 엄마가 애기 안고, 남편하고, 친정 엄마하고 이렇게 앉아서 4명이 대화를 할 때, 애가 물으면 엄마 역할하고, 남편이 물으면 아내 역할하고, 어머니가 물으면 딸 역할하고, 이게 헷갈립니까? 안 헷갈립니까? 안 헷갈리잖아.
그러니까 나는 그 무엇도 아니지만
인연을 따라서 그 무엇도 될 수가 있는 역할을 하는 거요.
그런데 우리가 작다고 오래 불리다보면 내가 작은 거라고 착각을 하죠.
그게 상을 짓게 되면 열등의식, 작다는 열등의식이 생기는 거요.
10:47
어떻게 재미있었어요? 네.
진리라고 하는 것은
재미도 있고 유익합니다.
오늘 재미만 있었어요? 유익했어요?
유익하기만 했어요? 재미도 있었어요? 네.
재미는 없고 유익하기만 하면
스님들 법문이 주로 그래요. 그러면 다 졸거나 가버려요.
재미는 있는데 유익하지 못하면 코미디언 프로그램 같으면
들을 때는 웃었는데, 나올 때 허전해요.
즉, 재미가 있다는 것은 지금 좋다는 거고,
유익하다는 것은 나중 좋다는 거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아이들을 가르칠 때, ‘지금은 힘들지만 나중에 좋다.’ 이 얘기만 해봐야 애한테 잘 안 먹힙니다. 지금 재미있기만 하고 나중에 불리한 것도 많이 있어요.
그러니까 아이들은 지금 재미있는 것만 찾고
여러분들은 나중에 유익한 것만 찾잖아.
그러니까 지금 재미도 있고, 나중도 유익해야 되요.
이것을 함께 할 수 있어야 된다.
나는 좋은데 남한테 손해다.
남은 좋은데 내가 손해다.
이것도 진리가 아니에요.
이건 지속가능하지가 않습니다.
나도 좋고 너도 좋고,
너도 좋고 나도 좋아야 되요.
그러니까 진리의 가르침은 이런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공이니, 이런 용어 몰라도 되요.
그래서 이러한 가르침을 여러분들이 일상 속에서 체험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 여러분들의 괴로움이 사라지고 행복해지는 거요. 죽어서 천당 가니, 지옥 가니, 극락 가니 하는 것은 종교에서 알아서 하라 그러고, 여러분들이 그런 게 걱정이 되면 교회나 절에 다니면 되요.
그러나 여러분들이 지금 교회를 다니든, 절에 다니든, 종교가 있든 없든, 어느 절에 다니든, 그건 개인이 알아서 하시고,
지금 여러분들이
조금만 이 진리에 대해서 이해를 하게 되면,
지금 보다 덜 괴로워진다.
괴로움은 작아지고 행복도는 높아져요.
완전한 행복 이러면 열반,
완전한 자유 이러면 해탈이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수행의 궁극적인 목표는
극락가고 천당 가는 게 아니라
해탈과 열반을 증득하는 거다.
그러나 그것도 너무 ‘완전한’
이러면 우린 늘 부족해집니다.
‘어제보다는 오늘, 안할 때보다는 할 때가, 집착을 놓으면 안 놓을 때보다
훨씬 더 자유롭게 행복해진다.‘ 하는 것을 알면, 이렇게 공부를 해 나가면 되요.
그런데 우리가 자유롭고 행복해지는 데는
‘내가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되느냐?’
‘긍정적 마음가짐을 가지면 좋다.’ 하는 이런 자세 문제가 있고, 관점의 문제가 있고
하나는 만약에 한국에서 남북간에 전쟁이 난다면
지금보다 괴로움이 늘어날까? 줄어들까? 늘어나겠죠.
그러니까 전쟁이 나지 않도록 우리가 평화를 정착시켜야 된다.
빈부격차가 큰 게 더 행복할까? 적을수록 행복할까?
그래서 우리가 빈부격차를 줄여야 된다.
우리가 어떤 사고나 재난이 있을 때
그래도 최소한도 안전망이 구축되어있는 게 덜 불안해요? 상관없는 게 더 불안해요?
그런 게 구축되어있는 게 덜 불안하죠.
그러니까 사회적인 조건도 개선되어야 되요.
요번에 이런 사건이 터지니까 여러분들도 마음이 힘들잖아. 그죠?
그러니까 이런 가운데도 행복해야 된다. 하는 것도 맞고,
이런 조건, 개선하면 내가 좋다.
그래서 행복으로 가는 길은
이런 어떤 마음가짐을 갖느냐 하는 수행의 문제와
어떤 환경을 만드냐 하는 주변 조건의 문제.
즉, 곡식으로 말한다면
씨앗이 좋아야 되고, 밭도 좋아야 돼.
밭만 좋으면 된다? 아니에요.
씨앗만 좋은 거 심으면 된다? 아니에요.
좋은 씨앗에 좋은 밭을,
밭도 잘 가꾸어야 되고, 이게 정토요.
씨앗을 잘 골라야 되요. 이게 수행이오.
그래서 이것을 함께 가야 되는 거요.
이것을 인연이라고 그래요.
인은 씨앗이고, 연은 밭이에요.
그러니까 인연에 따라서 과보가 생기는 거요.
그래서 저희들이 이제는 종교가 있느니 없느니, 어느 종교니, 또는 어느 절에 다니니, 이런 거 하지 말고, 정말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우리 함께 모여서 ‘어떻게 하면 좀 더 자유롭게 행복해질수 있느냐’ 이런 공부를 해보자.
어느 절에 다니든, 어느 교회 다니든 상관하지 말고, 정말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는 것을 우리끼리 서로 대화해보자는 거요. 박근혜 대통령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의 행복을 만들어야 되는 거요. 여러분들의 삶이 조금 더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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