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문즉설은 고상한 얘기를 하는 게 아니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인생에서 겪는 이런 저런 얘기들을 누구나 다 편안하게 내놓으면서, “뭐든지 물어라.” 이런 마음으로 하는 겁니다. 원래 법회라고 하면, 경전을 먼저 읽고, 그 다음에 해석을 하고, 그 다음에 생활에 적용하는 이런 부처의 얘기를 중생에게 적용한다. 이렇게 볼 수 있는데,
이 즉문즉설은 중생의 얘기를 먼저 하고, 즉, 우리들의 얘기를 먼저 하고, 고뇌를 찬찬히 살펴보다보면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번뇌가 곧 깨달음이다. 그래서 ‘번뇌 즉 보리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의 얘기는 법당에서 해야 될지 모르지만, 우리들의 얘기야 꼭 법당에서 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우리가 사는 생활공간에서 이렇게 편안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삶의 현실에서 하늘의 얘기, 부처의 얘기로 나아갈 수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즉문즉설을 하는 거니까, 여러분들이 살아가면서 겪는 그런 고뇌나 의문이 있다면 편안하게 얘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
오늘은 새벽에 4시에 일어나서 기도를 하고 왔는데요, 제가 이렇게 기도를 하고 열심히 수행해야 되겠다는 이유 중에 가장 큰 이유는 제가 딸아이한테 제가 자꾸 웃으면서 말할 수 있는 것도 자꾸 화를 내게 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 가기 전까지 준비하는 과정에서 조금 느리다고 해야 되나요? 저도 어렸을 때 그러긴 했습니다, 스님. 그런데 그것이 반복이 되니까 화를 내게 되고, 안 좋게 보내고 나서는 돌아서서는 제가 왜 그랬을까 하는 후회를 하게 됩니다.
늘 수행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그렇게 할 수 있을지 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니, 딸아이한테 웃으면서 얘기해야 되는 줄을 모르면 내가 “그렇게 화내지 마라. 웃으면서 하면 좋다.” 이렇게 알려주면 되는데, 자기는 알고 있는 데 그렇게 하면 되지, 자기가 안하는데 내가 얘기한다고 되요? 그건 부처님이 아니라 예수님이 와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요.
예를 들면 이게 뜨거운 불덩이라면 이렇게 쥐고 “아이고, 뜨거워, 아이고 뜨거워” 이래요. “어떻게 하면 이 뜨거운 데서 벗어날 수 있어요?” “놔라.” 그러면 놓으면 되잖아. 그런데 “어떻게 놔요?” 이래. “어떻게 놔요.” 이래. 어떻게 놔야 돼? 그냥 놔야지. 뜨거우면. 뜨거우면이 앞에 붙어있어요. 뜨거우면 어떻게 놓는다고? 여기 무슨 방법이 필요해요?
이렇게 쥐어보고 뜨거우면 “앗 뜨거워.” 이러죠. “어떻게 놨니?” 라고 물으면 “그냥 놨다.” 이러지, 그걸 뭐라고 대답해요? 그러니까 그럼 이거 쥐고 “어떻게 놔요?”라고 묻는 것은
방법을 몰라서 묻는 거요?
놓기 싫다는 거요?
그래. 놓기 싫으면 쥐고 있으면 되는 거요. “그러면 손 데잖아요.” 그렇지. 손을 데죠. 과보를 받지. 그럼 “손 데기 싫어요.” 그럼 어떻게 한다? 그냥 놓으면 되요. 어떻게 하더라도 놔야 된다? 놓기 싫더라도 놔야 되는 거요. 손을 데니까. 놓기 싫더라도 놔야 된다.
어떤 청년이 “아, 예쁜 여자 종아리 좀 만지고 싶어요.” “그런데 어떻게 하면 안 만져요? 어떻게 하면 안 만질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안 만지기는? 그냥 안 만지면 되지. “만지고 싶은데 어떻게 안 만져요?” 그래도 안 만져야지. 왜? 만지면 성추행 범으로 감옥 가니까.” “그러니까 이거 놓는 방법 알려주세요.” 이 말은 놓기 싫다, 이 말이오. 놓기 싫은 것은 자기가 선택하면 되요. 그럼 쥐고 있으면 돼. 그럼 손 덴다. 손 데는 과보를 받으면 돼. 손 데는 과보를 받기 싫다. 그러면 놓기 싫더라도 어떻게 해야 된다? 놔야 되는 거요. 이건 방법의 문제가 아니에요. 방법의 문제가.
내가 아이한테 자꾸 성질내고 짜증낸다. 그러면 그렇게 하면 되요. 하면 되는데, 아이한테 성질내고 짜증내면 아이가 스트레스를 받아요. 어리니까 어머니한테 대항을 못해요. 그런데 애가 언제 대항하느냐? 사춘기 되면 대항을 해요. 그럼 사춘기 되면 좀 애가 성격이 적극적이면 엄마 머리채 잡고 같이 싸워요. 아니 정말이에요. 그 다음에 애가 소극적이면 어때요? 집을 나가요. 저항하는 방법이오.
그래서 어린애하고 화내고, 짜증내고, 애하고 싸우면 반드시 아이한테 맞는 과보가 생겨요. 그런데 그 아이가 스트레스를 받았으니까, 화가 나니까 감당 못하는 거예요. 여자도 대게 화가 나면 칼을 갖고 남자한테 덤비지 않습니까. 약자지만, 지금 중동에 테러 일어나는 거 봐요. 그 지난 몇 세기 동안 서양 사람들이 행패를 피우니까, 완전히 이게 악에 바쳐서 이제는 눈에 뵈는 게 없잖아요.
어떤 군사시설, 군인, 이건 게 아니잖아요. 일단 서양 사람이면 그게 뭐든지 다 적으로 보이는 거요. 우리도 예를 들어서 일제 강점기 때 대게 많이 피해를 입으면, 그러니까 처음에는 이토오히로부미만 공격한다든지, 무슨 군인만 공격을 한다든지, 총을 든 사람만 공격을 한다든지 이러다가 나중에는 무작위, 일본사람이면 다 때려죽인다. 이렇게 된단 말이오. 이게 악에 바치는 거요. 그러니까 저렇게 무작위, 거드는 사람까지 하잖아. 우리도 옛날에 독립 운동할 때 일제가 우리나라를 식민지 지배하는 데, 그걸 도와준, 미국사람 스티브, 그 사람까지 테러했잖아. 그러니까 그걸 도와주는 러시아까지도 공격을 하잖아요. 그러니까 더 참여하고 그러니까 또 늘어나고. 악에 바치면 이제 눈데 뵈는 게 없어지거든요. 이성을 잃어버리니까.
아이도 스트레스가 차게 되면 부모라도 성질나면 때리죠. 요즘도 상담해보면 자식이 부모 때리는 경우 굉장히 많습니다. 그 다음에 부모한테 때리지는 못해도 같이 욕하고 덤비는 경우, 그것도 못하는 소극적인 사람은, 애가 착해서 그런 게 아니라, 성격이 소극적이라 그렇게 못하는 사람은 집을 나가는 거요. 청소년 가출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니까 그게 손을 대는 것처럼, 이게 손을 대는 거라는 거요. 이게 훤히 결과가 눈에 보이는데, 그게 좋으면 그냥 그렇게 하시면 되요.
그러니까 두 가지, 내가 내 성질을 내가 어떻게 못해서 그렇게 하면, 그런 게 일어나더라도 그런데 일어나더라도,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저런 자식을 낳았나.” 이런 소리 하면 안 된다, 이 말이오. “아, 내가 인연을 지어서 과보를 받구나.” 그러니까 엎드려 절하면서 “아이고, 미안하다. 내가 잘못 살아서 네가 이렇게 악을 쓰구나.” 이렇게 그때 가서 참회를 하든지, 이미 결과가 훤히 보이는 일이니까, 지금 결과가 아직 안 드러나니까 자긴 모르잖아.
결과가 훤히 보이니까, 아무리 자기가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나고 성질이 나도 이렇게 하면 엄청난 손실이 있다.” 이런 것을 알면 안해야지 뭐. 안하는 방법은 없어. 안하는 거죠. 무슨 방법 같을 것을 찾고 그래요. 조그마한 애한테 그래.
그러니까 안 껴 안줘도 괜찮아. 안 껴 안아준 부작용은 없어. 성질낸 부작용은 있지. 밥 안 해주는 것은 별 부작용은 없어. 밥은 해주고, 옷은 빨아주고, 가방은 챙겨주면서 악을 악을 쓰잖아. 그러니까 내가 힘들면 안 해주면 돼. 제 말 이해하시겠어요? 안 해주면 돼. 그러나 악은 쓰지 마라, 이 거요. 그러니까 싫으면 그냥 안 해주면 되는 거요. 그런데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거나, 악담을 하거나, 때리거나 그렇게는 하면 안 돼.
이미 이건 부처님계율에 때리지 마라. 이유 불문하지 말고 “때리지 마라.”고 되어있고, 그 다음에 4번째 뭐요? “욕설하지 마라.”고 되어 있잖아. 그러면 결국은 화내고 짜증내고 악담하는 것은 욕설하는 것이고, 때리는 것은 첫 번째 계율이고, 첫 번째 4번째 계율에 속한단 말이오. 그러니까 그것을, “어떻게 해요. 애가 말을 안 듣는데.” 이렇게 말하는 것은 변명이에요. 그렇게 하면 반드시 스트레스를 받는 거요. 그러니까 심리가 억압이 돼. 억압이 된 심리는 반드시 언젠가는 폭발을 하게 되어있어요.
그 폭발을 하는 방식이 똑같이 때리는 것으로 나타나든, 조금 줄여서 욕설하는 것으로 나타나든, 조금 줄여서 외면하는 것으로 나타나든, 조금 줄여서 집을 나가는 것으로 나타나든, 이렇게 반드시 나타나게 된다. 그러니까 만약에 여러분들 집에서 애한테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된다면 그건 다 어릴 때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래. 과보가 분명한 줄 알면, 그러니까 부처님이 말씀하시잖아. 지은 인연의 과보는 피할 수가 없다. 깊은 산속, 깊은 바다 속에 숨는다 하더라도. 이렇게 되어있어.
내가 만든 말 아니오. 그것을 그렇게 지어놓고, 이렇다고 했는데, “부처님, 과보를 면하게 해주세요.” 안 돼. 돈을 빌렸으면 갚아야 되는 거요. 저축을 하면 나중에 목돈을 찾는 거요. 저축도 안 해놓고 은행가서 “목돈 내놔라.” 나올 수가 없어요. 빚을 져놓고 “빚을 안 갚겠다.” 안 갚을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종교의 문제점은
빚지고 안 갚아도 된다.
저축 안 해놓고도 빌면 준다.
거짓말이오.
그거 사기에요.
부처님은
그런 허황된 생각을 갖는 우리들에게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빚을 지면 반드시 그 빚을 갚아야 되고,
죄를 지으면 반드시 벌을 받아야 된다고 깨우쳐서,
빚 갚기 싫으면 돈 빌리지 말고,
돈을 빌렸으면 빚을 갚아라.
네가 잘못한 일을 했으면
벌 받을 각오를 해라.
벌 받기 싫으면
다시는 잘못을 저지르지 마라.
이렇게 가르쳤단 말이오. 예수님도 마찬가지요. 그런데 이게 엉뚱하게 지금 교회나 절에서 가르치잖아. 정신 멀쩡한 것도 교회나 절에 가면 그렇게 엉뚱한 생각을 해요. 그러니 법당 찾을 필요가 없어. 새벽기도하고 애한테 신경질 내고 그러면 뭐, 뭐하는 짓이오? 그게. 그러니까 이런 자리에서 오늘 우리가 진리에 대해서 담론을 하면 이게 곧 뭐다? 이 순간은 여기가 법당이에요.
법당 안에서도 돈 얼마 들어왔나, 돈 세면서 “돈이 적게 들어왔다. 많이 들어왔다.” 그러면 법당이 아니라 그건 뭐다? 장사요. 장사. 장소가 법당 따로 있고, 가게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장소는 그냥 장소일 뿐인데, 거기에 사람이 진리를 논하는 자리면 그게 법당이고, 그게 성당이든 학교강당이든 들판이든 관계없어요. 부처님이 설법하는 데는 건물 아니오. 전부 숲이오. 숲. 그냥 야외 공간이오.
그래서 대중에 기념해서 거기다가 건물을 지어서 부처님 여기서 첫 번째 설법 하셨다. 여기서 ‘부처님 무슨 강의 하셨다.’ 이렇게 기념탑을 세우고 기념건물을 지은 것이지, 부처님 당시에는 부처님은 건물 안에서 설법 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전부 나무 밑에서, 숲속에서 말씀을 하셨단 말이오. 그러니까 이곳이 지금, 이 시공간에서는 여기가 뭐다? 법당이에요. 그러니까 자기가 잠자면 그건 취침공간이고, 일어나서 기도하면 뭐고? 법당이고, 밥 먹으면 식당이고, 애하고 놀면 놀이터고.
여기 컵이 있는데, 이게 물 잔이라고 따로 있고, 커피 잔 따로 있는 게 아니오. 여기 물 담으면 물잔, 커피 담으면 커피 잔. 밥 담으면 밥그릇, 국 담으면 국그릇, 애가 오줌 눌 때가서 빨리 받으면 요강. 그릇은 그 무엇도 아니다. 이것을 공이라 그래.
그릇은 다만 그릇일 뿐이다.
그릇은 공하다.
이래요. 인연을 따라서 커피 잔이 되기도 하고, 물 잔이 되기도 하고, 밥그릇이 되기도 하는 거요.
그러니까 “법당이 어디 있느냐?” 그거 찾을 필요가 없어. 그런데 이렇게 생긴 잔 따로 있고, 커피 보통 먹을 때 잔 따로 있고, 그 다음에 와인글라스라고 동그란 거 따로 있고, 이렇게 다 따로 있다면 굳이 와인 잔에다가 물 담아 먹고, 커피 잔에다가 밥 담아 먹고 이럴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없어. 그럴 때는 밥그릇이라는 용도 정한데 밥 담아 먹고, 국그릇이라고 용도 정한데 국 푸고, 물잔이라고 용도 정한데 물 받아먹고, 커피 잔이라고 용도 정한데 커피를 받아먹으면 되는 거요.
그러니까 법당이라고 정해진 공간이 있으면 거기 가서 하면 좋아. 없으면? 커피 잔 없으면 커피 못 먹는다는 건 말이 안 돼요. 그냥 커피 담아 먹으면 커피 잔이 되는 거요. 그러니까 해외 가서 살 때, 거기 절이 있으면 절에 가면 되는데, 절이 없으면 “절이 없어서 수행 못한다.” 이런 말 하면 안 돼요. 교회 있으면 교회 가서 하면 돼. 교회 가서 “하느님”하면 교회가 되고, “부처님”하면 절이 되는 거요. 그냥 건물일 뿐이에요.
이거는 남자들 군대 가면 늘 경험하잖아요. 건물 하나 만들어놓고 여기다가 예배할 때는 십자가 걸어놓고 하고, 떼고 그다음 불상 걸어놓고, 또 떼고 이렇게 해요? 안 해요? 군대 가면 그래. 요즘은 군대도 조금 커지니까 요즘은 시설이 좋아지니까, 법당건물 따로, 성당건물 따로, 교회건물 따로 이러지만, 전에는 다 건물 한 개에 이렇게 갔다가 걸면 되는 거요. 그것처럼 제가 유럽강의를 다닐 때 대부분 다 절이 없으니까 전부 성당에서 강의했어요.
그래서 아까 그 사진에 십자가 많이 붙어있고 그러잖아. 그죠? 그러니까 가서 우리가 이러게 얘기하면 이게 법당이지, 따로 있는 거 아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중요한 것은
애한테는 절대로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거나,
소리치거나, 때리거나 이러면 안 된다.
그럼 반드시 과보가 있다.
아이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나중에 아이 심리가 억압이 되기 때문에
자유롭게 자기 얘기를 커서 잘 못해요.
항상 얘기는 하고 싶은데, 말이 여기 목에 걸려서 안 나와요. 여러분도 지금 그런 경험 하죠?얘기 하고 싶어도 손이 탁 들어져요? 안 들어져요? “들까? 말까? 들까? 말까?” 이렇게 말이 잘 안 나와. 하고 싶은데 말이 목구멍에 딱 걸려 잘 안 나와요. 심리가 억압이 되면. 술 한 잔 딱 먹으면 탁 튀어나와. 그래서 술 먹으면 잔소리가 많아지고, 주정을 하고 이렇게 되는 거요.
그다음에 심리가 이렇게 억압이 되면 밖에서 보면 말을 안 하니까 착한 거 같은데, 한번 터지면 걷잡을 수가 없어서 사람들이 “성질 더럽다. 저거 건드리지 마라. 건드리면 터진다.” 이렇게 자기 자식을 키울 이유가 뭐가 있어요? 그러려면 애를 안 낳아야지. 그래서 나는 성질이 더럽기 때문에 아예 애를 안 낳는 거요. 지는 성질 더러운 줄 알았으면 지 혼자 살지, 무엇 때문에 성질 더러운 애를 만들려고, 안 돼. 정신 차려야 돼. 이것을 대충 넘어가면 안 돼.
그러니까 만약에 한번 애한테 또 짜증내고 그러면 방법은 두 가지 있어요. 하나는 전파상에 가서 전기 충격기를 사다가 사정없이 지져서 기절을 해서 한 5번만 지지면, 화가 나려고 그러면 몸이 부들부들 떨려요.
그러든지 그게 돈이 없어 전기 충격기를 못 사면 무조건 화 한번 내면 방에 들어가서 2시간동안 천배 절을 해야 돼. 그렇게 해서 이것을 딱 끊어야지.
그리고 애가 말을 안 들으면 내버려두느냐? 아니에요. 엄마가 할 수 있는 거 많잖아. 그러니까
방청소 해주고 성질내는 게 낫나?
성질 안내고 청소 안 해주는 게 낫나?
그래. 가방 챙겨주지 말고, 짜증을 내지 말란 말이오.
그럼 안 가져가면 안 가져가는 데로,
“그래 잘 가라.” 이러면 되지. 이거 잘 아셔야 되요.
그러니까
남편이 아내를 껴안고 사랑해주면서
밤마다 뺨 때기 때리는 게 낫나?
껴안아 주지 말고 안 때리는 게 낫나?
좀 생각해 봐.
우리 얘기해 봅시다. 어른이 볼 때 애들, 저도 그렇고, 어른이 볼 때 애들 말 안 들으면 두드려 패서라도 바로잡고 싶잖아. 그래요? 안 그래요? 그런데 우리가 어릴 때 기억을 해봤을 때, 내가 초등학교 때가서 숙제를 안 해서 맞았든, 뭐 청소를 안 해서 맞았든, 기왓장을 떨어뜨려서 맞았든, 집에 엄마한테 뭘 내가 잘못해서 맞았든, 선생한테 두드려 맞은 거 여러분들한테 기분 좋게, “아, 맞으면서 크게 깨달았다.” 이런 거 있어요? 있는 사람 손들어 봐.
맞으면서 크게 깨달았어? 몇 살 때? 그런데 대부분 다 어릴 때는 이유 불문하고 야단을 맞으면 심리가 억압이 되고, 세월이 지나서 상처가 됩니다. 그러데 커서는 틀려요. 커서는 야단맞고 뭐할 때가 있다? 깨우칠 때가 있어요. 야단을 맞은 게 오히려 나한테 약이 될 때가 있어요. 그런데 그것은 어느 정도 커서 가능해요. 그런데 어릴 때는 안 돼요. 커서도 지금 스님이 저렇게 야단치면 기분 억수로 나빠요.
그래서 항상 질문할 때 벌써 유튜브 보고 “이 질문했다가는 스님한테 야단맞겠다.” 그러면서 시작하면서 “이 질문하면 야단칠지도 모르는데” 그럼 하지를 말지. 그래서 사람이 크면 깨우친다는 게 있어요. 야단을 맞아도 탁 깨우치면 야단이 아니에요. 그런데 어린애는 깨우치기가 어려워요. 어린애라는 것은 어리석다는 뜻이거든. 어린애는 야단치면 깨우치는 게 아니고, 심리가 억눌려집니다. 그래서 어린애는 야단치는 것은 안 좋다.
그렇다고 내버려 두는 것은 안 돼요. 어린애의 특징은 따라 배우기입니다. 뭐든지 따라 배워요. “엄마는 왜 그래?” 항상 뭐라고 하면 그러잖아요. 일찍 들어오라 그러면 “아빠는?” 이러고. 그러니까 따라 배우기이기 때문에 항상 모범을 보여줘야 되요. 그러니까
어린애들의 교육의 핵심은
가르치는 게 아니라,
따라 배우기, 보여주기입니다.
이게 핵심이에요.
그다음에 조금 크면 클수록 가르쳐야 되겠죠. 그러니까
가장 어릴 때는 보살피기,
두 번째, 초등학교 들어가면 모범 보여주기. 따라 배우기.
중고등학교 되면 조금 깨우쳐 주기.
성년이 되면 그건 자기가 깨우쳐야 돼요.
아이들이 자라는 수준에 따라. 그런데 자기 지금 아이가 어리다고 그랬잖아. 어린데 성질내고 짜증내고 그러면 어떻게 해? 으흠.
스님이 애 얘기만 하면 이렇게 열을 내어서 얘기해. 아이들은 자기를 대변할 수가 없잖아. 말 못하는 아이들을 내가 대신해서 좀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요. 알았죠? 그 애가 자기 힘만 있어봐라. 엄마한테 맞고 있을까? 안 맞고 있어. 그러니까 사춘기만 넘어가면 대들어.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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