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동물생태학을 전공하다 보니까 부득이하게 살생을 하게 되는 상황이 생기는데요, 이때 발생하는 생명의 상대성, 즉 어떤 생명은 귀중하고 어떤 생명은 덜 귀중하게 되는 상황이 생기는데 이것에 대해서 너무나도 궁금해서 질문을 드립니다.//
생명의 귀중함의 상대성은 없어요, 다 똑같아. 그것은 내가 개구리를 잡을 때, 내가 볼 때는 개구리가 덜 중요하지만, 그건 개구리한테 안 물어봐서 그런 거요. 개구리한테 물어보면 자기도 중요하다 그러지. 그리고 우리가 북한도 그렇고, 임금이 밑에 사람, 백성들 목숨 하찮게 여기잖아. 그죠? 그런데 임금이 볼 때는 너무 당연한 거요. 그런데 백성들이 볼 때는 안 그렇잖아. 그래서 우리가 지금 뭐요? 민주사회를 만들었잖아. 그런 것처럼,
생명 자체는
어느 것은 더 귀하고
어느 것은 덜 귀하고
그런 건 없어요. 다 똑같아.
뭐 안타까워. 그게 현실인데. 예를 들어서 자기 어머니하고 이웃집 어머니하고 둘이 물에 빠졌다. 그럴 때 우리 어머니 목숨은 더 중요하고 이웃집 아주머니 목숨은 덜 중요하나? 그것은 아닐 거 아니야. 목숨은 다 똑같아. 그런데 자기가 둘을 다 건질 수 있으면 좋은데, 둘을 다 건질 수 있는 데, 우리 어머니는 건지고 이웃집 아주머니는 안 건졌다. 그러면 그것은 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어.
둘 중에 한 명밖에 건질 수 없다. 그러면 자기는 어떻게 할래? “이웃집 아주머니하고 우리 어머니하고 누구 건질까?”하고 망설일래? 우리 어머니부터 건질래? 그래. 우리 어머니부터 건지고 이웃집 아주머니 목숨은 덜 중요해서 안 건지나? 그것은 아니잖아. 그러면 나하고 어머니하고 같이 물에 빠졌다. 그런데 내가 어머니를 건져서 같이 나올 수 있으면 좋은데, 그건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어머니를 건지려면 같이 죽든지, 아니면 나 혼자 살든지,
이 두 길 밖에 없다면 자기 어떻게 해야 될 것 같아?
죄송할 거 없어.
죄송하다는 것이 잘못된 생각이라는 거야.
그냥 내가 나와야 돼. 왜?
그것이 생명의 본래 모습이야.
그런데 어미가 3살 된 애하고 같이 물에 빠졌다.
이럴 때 어미는 어떠냐?
애기를 버리고 자기만 사는 것을 선택할 수가 없어.
같이 죽든지, 애기를 살리고 자기가 죽든지,
둘 중의 선택밖에 못해.
이것은 [종족보존의 본능]이야.
그런데 어머니하고 내가 물에 빠졌는데,
둘 다 살 수 없을 때 나만 사는 것은
[개체보존의 본능]이야. 이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야.
모든 생명은
자기 생명은 자기가 보호해야할 권리가 있어.
그게 본능적으로 주어졌어.
그런데 어릴 때, 어린 아이일 경우에는 어미는 자기를 버리고 새끼를 보호하는 본능이 있기 때문에 종족이 이렇게 유지되는 거야. 그게 없다면 종족이 유지될 수가 없어. 그래서 여러분들이
“애 낳으면 어떻게 키우나?”
이런 걱정 안 해도 돼.
생태적으로 새끼를 일단 낳으면,
안 낳을 때 그런 생각하지,
낳으면 보살피는 본능이 일어나.
그것은 다람쥐도 토끼도 다 하는데
왜 사람이 안하겠어.
그런데 정신병이 들어서
직장에 미치거나, 돈에 미치거나,
이런 정신질환이 생기면
자기 새끼를 자기가 보호하지 않는 일이 벌어지는 거요.
가난하기 때문에는 절대 그런 일이 안 생겨.
그래서 그런 관점에서 봐야 돼. 그러니까 만약에 호랑이가 갑자기 동네 침입해서 우리 어머니를 물어 죽였다. 그래서 내가 “이 나쁜 놈.”하고 죽이면 살생이야. 그건 보복이잖아. 그지? 그러면
죽은 우리어머니하고
살아 있는 호랑이하고 누가 중요하나?
살아있는 호랑이가 더 중요해.
이건 죽었고, 이건 살았기 때문에.
그러나 그 호랑이가
이웃집 할머니를 또 물어 죽이려고 하기 때문에
나는 호랑이를 죽일 수가 있는 거야.
우리 어머니를 죽였기 때문에 죽이면
보복이 되기 때문에
이것은 수행자가 가야 될 길이 아니고,
이웃집 할머니를 물어 죽이려고 하기 때문에
할머니를 살리기 위해서 죽이는 것은
그것도 살생이지만 살생하면 과보가 있어.
그러면 내 자세가 어떠냐?
이 할머니를 살리기 위해서는
내가 살생의 과보를 짊어진다.
기꺼이
그래서 조선시대에 스님들이 일본군이 쳐들어왔을 때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일본군대를 죽였다. 그러면 그것은 승려의 본분은 아니야. 군인의 본분일 수는 있지만 승려의 본분은 아니야. 승려는 자기가 죽어도 남을 죽이면 안 돼. 그런데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이것을 막아야 돼. 그러면 이것은 살생이 아니냐? 아니에요. 살생의 과보를 받아.
살생의 과보를
내가 대신 짊어지고 지옥을 가더라도
이 많은 사람을 살려야 돼.
그러니까 그것을 보살행이라 그래.
그것을 내가 짊어지고, 누가 물에 빠져있다. 저거 건져내면 분명히 “내 보따리 내놔라.” 할 거다. 감사하기는커녕, 그래도 건져야 돼. 그 빠져죽을 사람을 건지는 일은 돈을 물어주는 한이 있더라도 건질만한 가치가 있다, 이 얘기야. 그러니까 자기가 그만한 가치가 있다면 자기가 그 과보를 받으면 되지. 그러니까 이것도 먹고, 저것도 먹고 두 개 다 먹으려고.
그러면 안 되고, 어떤 실험을 해서 많은 사람을 살려야 된다면 그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얼마가 희생될 수밖에 없다면 이것을 합리화 하면 안 돼. ‘죽을 수 있다.’ 이러면 안 돼. 이것도 아깝지만 더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죽고, 그것을 내가 한다면, 내가 그 과보는 내가 받아야 돼. 만약에 자기가 인류를 위해서 어떤 특별한 것을 발견한다면, 그것을 발견해 놓고 자기는 지옥에 가도 괜찮아.
그래서 천당 가려고 그래? 지옥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이것은 연구해서 세상에 내놓을만하다. 이런 자세로 임해야 된다. 그렇기 때문에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함부로 죽이면 안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하더라도 그것은 염불해줘야지,
그것을 갖고 당연하게 여겨도 안 된다.
그리고 또 거기에 너무 죄의식을 가져도 안 된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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