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대학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은
기복신앙이 아니라 수행자가 되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상이 곧 수행이라면 언제나 깨어 있어야 하고,
깨어 있으려면 알아차림을 해야 한다는 것도 조금은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알아차림 이후에는 마음을 어찌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화가 날 때 ‘내가 화를 내고 있구나’ 하고 가끔 알아차릴 때가 있습니다.
평소 같으면 화가 나는 순간 조금 참거나, 성질대로 하는 것이 다반사였는데
이제는 그렇게 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알아차림 이후에 마음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알아차린 후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한다는 건
아직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제대로 알아차리면 알아차림이 끝입니다.
알아차림 이후에 어떻게 한다는 게 없어요.
알아차리지 못하면 알아차리면 되고
알아차린 다음에는 그 알아차림을 지속할 뿐입니다.
한 번 알아차리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지금도 알아차리고
그다음 순간에도 알아차리고
그다음 순간에 또 알아차리고
이렇게 알아차림이 지속되어야 합니다.
화가 나면 화가 사라질 때까지
화가 나는 상태에 대한 알아차림이 지속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알아차림 이후에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 자체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화가 사라질 때까지 알아차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만 알아차릴 뿐이다’ 하고 말하는 거예요.
알아차린 다음에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다는 것은
의지로 무언가를 하려고 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각오하고 결심하고 노력하는 것은
아직도 세속적인 관점을 갖고 있는 겁니다.
수행은 각오하고 결심하고 노력하는 게 아니에요.
다만 알아차릴 뿐이기 때문에
화가 사라질 때까지 알아차림을 유지합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화가 나는 걸 알아차리긴 했는데 그래도 계속 화가 납니다’ 하고
질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말은 화가 날 때 알아차리긴 했지만
그 뒤에는 계속 화에 끌려 다녔다는 뜻입니다.
화가 나는 걸 계속 알아차리고 있지 않은 거죠.
한 번 알아차리긴 했지만 그다음 찰나에서 놓쳐버린 겁니다.
그래서 찰나 찰나에 계속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걸 다른 말로는 ‘지켜본다’ 하고 말합니다.
지켜보는 것은 생각으로 하는 게 아니에요.
화가 나면 ‘화가 나는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화가 나는 걸 놓치고 화를 내버렸으면 ‘화를 내버렸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넘어지면 ‘넘어졌구나’하고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넘어진 걸 넘어졌다고 제대로 인지하면 저절로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넘어진 줄 아는 사람한테는 일어나라는 말도 필요가 없습니다.
알아차림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사람은 넘어지면 일어나게 되고,
‘잘못했구나’ 하고 알면 뉘우치게 되고,
‘몰랐구나’ 하고 알면 물어서 알게 됩니다.
자꾸 세속적인 방식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그다음에는 어떻게 합니까’ 하고 묻게 되는 거예요.
화가 일어나는 걸 알아차리면 화는 사라집니다.
그런데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이런 상황에서는 화가 나는 게 당연하다’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화가 나는 걸 느끼긴 해도
화가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납니다.
그런데 원리를 생각해 보면 본래 화날 일이 없습니다.
화날 일이 없는데도 화가 난 것이기 때문에
그 감정을 알아차리고 나면 화날 일이 없는 쪽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넘어지면 일어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제대로 알아차리면 화가 사라지게 되기 때문에
그다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알아차림이 지속되어야 합니다.
수행은 각오하고 결심하고 노력하는 게 아닙니다.
편안한 가운데 ‘현재 상태가 이렇구나’ 하고 알 뿐입니다.
누군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때도
‘그건 맞는 말이다’ 또는 ‘잘못된 말이다’ 이렇게 판단하는 게 아니라
‘저 사람은 저렇게 믿고 있구나’, ‘저 사람은 저걸 안 믿고 있구나’
그냥 이렇게 알 뿐이에요.
신이 있느냐 없느냐를 두고 밤새도록 논쟁을 해도 끝이 안 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믿음이 다르구나’
이렇게 알면 해결할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남편이 화를 냈다고 해도
‘아, 남편이 화가 났구나’ 이렇게 알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내가 집에 왔는데 ‘네가 왜 화를 내냐’ 이렇게 대응하면 싸움이 시작되죠.
상대방이 화가 났을 때는
‘무슨 이유인지 내가 아직 잘 모르지만 저 사람이 화가 났구나’ 이렇게 받아들이면
싸울 일이 없습니다.
그 사람 입장에서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거예요.
다만 내가 지금 그 이유를 모를 뿐이죠.
상대는 일단 화가 났으니까 ‘죄송합니다’ 하고 말하면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 물어보면 돼요.
‘조금 전에 무슨 이유 때문에 화가 났어요?’ 이렇게 물어보고
그때 이런 이유로 화가 났다고 말해주면
‘이 사람은 그럴 때 화가 나는구나’ 하고 알 수 있습니다.
남편이 ‘네가 늦게 와서 화가 났다’ 이렇게 말하면
나를 기다렸다는 거잖아요.
나를 기다렸다는 것은 나를 보고 싶었다는 뜻입니다.
남편이 나를 보고 싶어 했다는 것은 좋은 일이잖아요.
그러면 ‘내가 그것도 모르고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고 말해주면 됩니다.
이렇게 찬찬히 생각해 보면 문제가 될 게 없어요.
인생은 원래 문제 될 게 없습니다.
‘내가 좀 늦게 온 걸 가지고 네가 왜 화를 내느냐’
자꾸 이렇게 접근하니까 문제가 되죠.
상대방이 화를 내면 ‘화가 났구나’ 이렇게 알아차리고
우선 ‘죄송합니다’ 하고 말하면 됩니다.
화난 걸 받아주다가 ‘그런데 왜 화가 났어요?’ 하고 물어보고
‘네가 늦게 왔잖아’ 하면
‘나를 기다린 줄도 모르고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됩니다.
물론 처음에는 잘 안 되죠.
이번에 해보고 안 되면 ‘이번엔 안 되네’ 이렇게 알고
다음에 또 해보면 됩니다.
해보고 알아차리고, 또 해보고 알아차리고
이렇게 조금씩 해나가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에요.
담배 피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담배를 피우는 게 어려워요, 안 피우는 게 어려워요?
가만히 살펴보면 담배를 피우는 게 더 어렵습니다.
담배를 피우려면 일단 담배 살 돈이 있어야지,
담배를 사 와야지,
담배를 빼물어야지,
불을 붙여야지,
연기를 들이켜야지, 내뱉어야지,
일이 엄청나게 많아요.
그런데 담배를 안 피우는 건 아무 일을 안 해도 되니까 아주 쉽습니다.
수행이란 이렇게
담배를 안 피우는 것과 같이 아무런 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쉬운 것이 어려운 사람이 있어요.
어떤 사람일까요?
바로 담배를 피우는 습관이 든 사람입니다.
담배를 피우는 습관이 든 사람은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금연이 가장 어렵습니다.
그러니 누군가 담배를 안 피우는 게 어렵다고 하면
‘저 사람은 담배 피우는 습관이 들었구나’ 이렇게 알 수가 있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화를 안 내는 게 더 어렵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아, 저 사람은 화내는 습관이 들었구나’ 이렇게 알 수 있는 거죠.
누가 욕심을 안 내기가 어렵다고 하면
‘저 사람은 욕심 내는 습관이 들었구나’ 이렇게 알 수가 있습니다.
수행은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길이기 때문에 쉬운 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수행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알아차리기만 하면 됩니다.
화가 날 때는
‘어, 내가 지금 화가 났네’ 이렇게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생각으로 옮겨가니까
일이 자꾸 복잡해지는 거예요.
마치 ‘저는 이제 담배를 안 피우는데
담배를 안 피운 다음에는 뭘 해야 할까요?’ 이렇게 묻는 것과 같습니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할 일이 있지만,
담배를 안 피우는 사람은 아무런 할 일이 없습니다.
‘담배를 안 피우면 그다음에는 뭘 할까요?’ 이렇게 묻는 것은
또다시 할 일이 있는 쪽으로 나아가는 거예요.
...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여러분이 인생을 살면서 고생을 안 하려고 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일부러 찾아가서 고생하는 건 고행이니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만
어차피 주어지는 건 피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차가 없이 걸어가면
걸어가는 심정이 어떤지 알 수가 있고,
차를 타고 가면 차를 타고 가는 심정이 어떤지 알 수가 있고
싸우면 싸우는 심정이 어떤지 알 수가 있고
실수를 하면 실수했을 때 마음이 어떤지 알 수가 있기 때문에
모든 게 다 공부거리입니다.
-일상속에 깨달음이 있다-
스님이 농사짓는 모습을 여러분에게 보여주는 이유도 특별한 게 아닙니다.
수행이나 깨달음이 신비한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려는 거예요.
법륜 스님도 호미를 쥐면 밭을 매는 사람이고,
예초기를 돌리면 풀을 베는 사람이고,
감자를 캘 때는 감자를 캐는 사람이고,
설거지를 할 때는 그냥 설거지를 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일상을 사는 가운데 지혜가 작용하는 것이지
산에 가서 뭘 안 먹어야 깨달음을 얻고
솔잎만 먹어야 깨달음을 얻고
등을 땅에 안 붙이고 자야 깨달음을 얻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들이 자꾸 깨달음에 대해 신비감을 갖고 바라보기 때문에
제가 틈나는 대로 평범한 일상을 보여주려고 하는 겁니다.
깨달음에 대해 신비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내가 땅에 등을 안 붙이고 자야 하는데 그게 안 돼서 못 깨닫는다’,
‘고기를 안 먹어야 되는데 내가 고기를 못 끊어서 못 깨닫는다’ 하면서
자꾸 쓸데없는 핑계를 댑니다.
깨달음은 그냥 일상 속에 있는 거예요.
여러분은 일상에서 괴로움을 느끼고 상처를 받잖아요.
아직 지혜가 열리지 않은 상태여서 그런 겁니다.
지혜가 열리면 어떤 것도 다 경험이 됩니다.
고생을 해도 경험이 되고, 욕을 얻어먹어도 경험이 되고,
넘어져도 경험이 되고, 다쳐도 경험이 돼요.
작은 일 하나하나가 다 깨달음의 길로 연결됩니다.
꼭 고생을 많이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고생을 하는 게 꼭 나쁜 게 아닙니다.
저는 어릴 때 농촌에서 자랐기 때문에
제3세계에 가면 그곳 사람들과 금방 친해집니다.
그 사람들의 일상이 다 제가 어릴 때 경험한 것이기 때문에
조금만 말해도 금방 알아들어요.
경험도 해보지 않은 사람이 공감하는 척하려고 하면 스트레스를 받죠.
저는 일상이 그랬으니까
과거의 경험이 자연스럽게 도움이 되는 거예요.
저는 비행기를 탈 때도 가장 저렴한 티켓을 끊어서 다닙니다.
여러 곳을 경유해서 가면
그 돈으로 가난한 마을에 핸드펌프를 몇 개나 더 설치할 수 있는데
굳이 빨리 갈 이유가 없잖아요.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검소하게 살면 내가 힘듭니다.
그러나 저는 어릴 때부터 검소하게 살았기 때문에 검소하게
사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 것처럼 여러분도 일상 속에서 괴로움이 없는 상태로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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