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2)

[즉문즉설] 제126회 초등학교 교사, 편애없는 사랑

Buddhastudy 2012. 11. 15. 04:13
출처 YouTube 
 

우선 그 첫 번째 얘기로 돌아가서 아이가 선생님은 제만 예뻐해 할 때 그걸 너무 좀 지나치게 받아들였다. 즉 내가 사람들을 만날 때 누군가를 편애할 수도 있습니다. 또 나는 똑같이 사랑해도 각자 느낄 때 자기는 사랑을 더 받았다. 누구는 많이 받는 것 같다. 이렇게 느껴요. 부모가 자식을 3, 4명 키워도 엄마는 동생만 예뻐한다. 엄마는 언니만 예뻐한다. 엄마는 오빠만 예뻐한다. 이런 게 생겨서 부모에 대해서도 상처 입은 사람이 많잖아요.

 

그런데 하물며 34명도 아니고 내 자식도 아닌데 30명을 가르치는데 아이들 사이에서 그런 어떤 차별의식을 안 느낄 수가 없습니다. 비록 선생님이 똑같이 사랑을 해도 어차피 차별의식을 느끼게 되고. 그것은 그 아이들의 문제지. 또 선생님도 사람인 이상, 부처가 아닌 이상. 그래도 공부도 잘하고 착한 아이들을, 착실한 아이들에게 마음이 더 가고 말썽꾸러기 아이에게는 마음이 덜 가는 것 또한 현실이다. 이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내가 차별 없이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그 생각에 너무 과도하게 집착했기 때문에 이런 병이 생긴 거요. 아이가 그렇게 말할 때 그래. 아직 나는 아이들을 대할 때 차별을 할 수밖에 없는 수준이다. 이 현실을 내가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되는 거요. 또 나는 똑같이 사랑하지만, 아이들이 차별 의식을 갖고 받아들인다. 이것도 내가 인정을 해야 되는 거요. 그런데 지금 여기 두 가지 문제가 있는 거요.

 

나는 차별 없이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된다는. 그런데 그렇지 않은 점을 발견하자 그러려면 사랑을 안 하는 게 좋겠다. 이게 첫째 잘못된 생각이고. 두 번째는 나는 차별 없이 사랑했는데. 너희들이 왜 그렇게 느껴? 느낀 너희들이 잘못이다. 이것도 잘못된 거요. 나도 차별을 하고 차별을 해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또 저 아이들도 차별을 느낄 수밖에 없는 존재가 지금 우리들의 현실이라는 거요.

 

이 현실 속에서 나는 가능하면 차별을 덜 하는 그런 선생님이 되는 것이 나의 목표고. 또 아이들이 똑같이 사랑해도 차별을 느끼기 때문에 그런 차별을 느낄 수밖에 없는 그 아이들의 심정을 이해해서 그걸 다 내가 해결은 못 하지만은 그런 말 하는, 그런 상처를 입었다고 말하는 아이들에게 내가 그것을 수용해 낼 수 있는 힘을 키워 나가는 게 내가 해야 될 일이다. 그런데 그 두 가지를 본인이 다 놓쳐버리지 않았느냐?

 

내가 마치 차별 없는 사랑을 베푸는 사람 같은. 그런 착각. 그런 일종의 이데올로기 이념에 집착했다. 그리고 그러지 못한 자기를 발견하자 자기를 다시 학대했다. 자기를 내팽개쳤다. 이래 볼 수 있죠. 또 한편으로는 나는 똑같이 사랑했는데 왜 너희들이 그렇게 느껴? 하고 그렇게 느끼는 아이들을 나무라는. 그런 소위 이중적인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느냐?

 

그래서 이 문제를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가능하면 내가 아이들을 잘난 애나 못난 애나, 공부를 잘하나 못하나, 착실하나 말썽을 피우나. 가능하면 내가 차별 없이 대해야 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내 공부수준이 차별을 해 가면서 대하는 게 현재 내 수준이다. 이걸 첫째 먼저 받아들이면 돼. 그리고 두 번째는 아이들이 어릴 때 민감할 때 부모에게서 사랑을 받으면서도 동생이라고 참아라 하면 내가 동생이라고 차별한다 그러고.

 

언니라고 참아라 그러면 엄마가 동생만 예뻐한다고. 요런 민감한 시기의 아이들이니까. 아이들이 내가 하는 언행이나 행동에 대해서 그렇게 분별을 낼 수가 있겠다. 그걸 내가 극복할 수는 없다 이거야. 해결 할 수는 없지만, 아이들이 그렇게 느끼는 건 내가 이해한다면 그런 아이들을 그런 얘기를 들을 때 내가. ‘~ 그랬나?’ ‘나는 한다고 했는데 너는 그렇게 느꼈구나.’ ‘그러면 내가 앞으로 더 유의를 하지.’ 이런 태도가 필요하다.

 

그렇게 편안하게 수업을 하시면 되지. 새삼스럽게 내가 아이들을 차별 없이 사랑을 해야 되겠다. 뭐 이렇게 너무 각오하고 결심한다고 되는 건 아니오. 선생님이라는 직업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옛날에는 선생님이라는 직업은 스승의 역할이 더 강했다. 즉 인격적으로 아이들을 지도하는 비중이 더 컸다. 이거야. 글자를 가르치거나 하는 이런 기술적인 것이 적고 인격적인 것이 더 컸다.

 

또 글자를 가르치더라도 그 글자 속에 대부분 다 인격을 담아서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곧 스승이 됐어요.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인격적인 그런 지도를 하기보다는 기술적 지도를 더 많이 한다. 이거야. 수학을 가르친다든지, 영어를 가르친다든지. 과학을 가르친다든지. 그리고 그러한 기술에 인격이 또 별로 담겨 있지도 않다. 오히려 거기는 재능이 담겨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학원선생 쪽으로 가면 거의 기술적인 수준이다. 인격이 적다. 그 다음에 옛날 선생님들은 인격이 다수다. 그럼 오늘날 선생님들은 기술이 다수지만. 그래도 스승의 역할, 인격적인 것도 같이 겸하고 있다. 그런데서 어느 게 더 비중이 크냐? 기술적 비중이 현실적으로 더 크다 이 말이야. 그러면 내가 영어선생님이다 하면 아이들에게 영어를 잘 가르쳐야 된다. 수학선생이라면 수학을 잘 가르쳐야 된다.

 

수학 선생 중에 내가 최고다. 이거는 아니더라도. 기본적으로 배우는 아이들에게 그 부분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게 매우 중요하다. 그걸 반기하고 인격적으로만 지도한다. 그러면, 옛날에는 먹혔지만, 지금은 안 먹힌다. 그래서 자기 직업에 충실해야 된다. 자기 과목, 자기가 해야 할 역할에 대해서 먼저 해야, 아이들로부터도 존경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자동차 기술자가 자동차는 고칠줄 몰라. 그런데 사람은 참 좋아. 이것만 갖고 안된다. 이 말오.

 

그러니까 자기 직분에 대해서 충실해야 된다. 두 번째는 아이들에 대해서 뭔가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그런 교양훈련을 할 수 있는 인격이 돼야 된다. 그거에 가장 중요한 바탕은 사랑이에요. 아이들에 대해서 아끼는 마음이 있어야 돼. 사람에 대해서 아끼는 마음이 없으면 인격적 지도가 나올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 영어를 가르치든, 수학을 가르치든, 생물을 가르치던 초등학교 같으면 전반적으로 다 가르치니까.

 

그런데 그 속에 아이들에 대한 사랑을 담고 가르치면, 애정을 담고 가르치면 아이들이 그 속에 저절로 존경심이 생기는 거요. 그러니까 그걸 잘 가르치는 것은 아이들이 인정을 하는 거요. 그건 인격적 존중하고는 달라요. ~ 우리 선생님 실력 괜찮다. 얕보지 못한다. 이런 얘기요. 두 번째는 거기에 애정을 담아서 가르치면 감동이 오는 거요. 감동이 오면 존경이 따르게 되는 거요.

 

그러니까 특별히 애들에게 이 과목 외에 내가 뭐 딴 어떤 교양 있는 말을 해 줘야 되겠다. 이런 생각 할 필요가 없다. 정을 가지고, 애정을 가지고. 그 하나로도 더 알뜰하게 이해하기 쉽게 가르쳐주려고 이렇게 하면, 수업시간에 들어와 대충 적당하게 하고, 종 치면 나가고. 이런 게 아니라. 다 아이들 모르는 아이들 심정을 생각해서 지도해주고, 질문하면 다 받아주고. 이렇게 하면 거기 저절로 감동이 일어난다. 그게 사랑이에요.

 

뭐 특별히 어떻게 할 거냐? 이렇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그렇게 하면 그렇게 수업에 열중하면 또 아이들이라는 거는 말썽도 피우고 하니까. 말썽 피우고 할 때는 야단칠 거는 야단도 치고. 그다음에 격려를 해 줄건 격려도 해 주고. 애가 의도적으로 삐뚤어진 것은 야단을 쳐서 바로 잡아야 되고. 자기도 모르게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일은 비록 큰 사고를 쳐도 오히려 격려를 해 주고. 이렇게 해서 지도를 하면 되지.

 

거기 뭐 새삼스럽게 특별히 어떻게 해야 될 길은 없다. 그렇게 할 때 내가 내 직업에 대해서, 그렇게 하고 있는 내 순간순간에 대해서 자부심이 있고 행복해 지죠. 그것이 곧 아이들에게 훌륭한 선생님이 되는 길이에요. 이 분리 되지 않는다. 일부러 애쓰고 노력할 거는 없다. 내가 가장 내 삶에 충실하게 되면 그건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이다. 이런 말씀 드리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