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에서부터 하면 기도를 할 때 온갖 번뇌 망상이 일어나는 게 정상입니다. 정상. 나쁜 게 아니고 그게 정상이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인간이 다 그렇다. 사람들이 말로 안 해서 그렇지. 그러니까 그것을 뭐 큰 잘못인양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그게 정상이다. 정상이라는 말은 중생으로서는 정상이다. 이 말이오. 거기서부터 출발해서 번뇌 망상이 없는 경지로 나아가야 된다. 그러지 ‘번뇌 망상 없어져라.’ 이런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다. 이 말이오.
그건 번뇌 망상이 없어지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건 일심으로 해야 된다. 마음을 딱 한곳에 모아서 해야 된다.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번뇌 망상이 일어나든지 말든지 그것을 상관하면 안 된다. 그냥 관세음보살만 계속 집중을 해야 돼. 지금 이 방안에 허공에 아무것도 없는 거 같죠. 그런데 한 줄기 햇살이 쫙~ 들어오면 먼지가 아주 많이 보이죠. 그죠? 먼지가 보이니까 빗자루를 갖고 그 먼지를 계속 쓸면 먼지가 더 일어납니까? 덜 일어납니까? 더 일어나요.
그러니까 마치 제가 일상 생활할 때 번뇌가 없는 거 같은 거는 햇살이 없기 때문에 그래. 기도나 명상을 하면 번뇌가 더 일어나는 것은 더 일어난 게 아니고, 내가 얼마나 번뇌가 많나 하는 것을 내가 알게 된 거요. 보이는 거요. 햇살이 들어와서 보이니까 막~ ‘안 일어나야지,’ ‘번뇌를 없애야지.’ 하면 빗자루로 쓰는 것과 똑같아서 ‘안 일어나야지,’ 하는 번뇌가 하나 더 붙어가지고, 그것까지 번뇌를 더 불러일으킨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가만히 놔둬야 돼. 가만히 놔두면 결국은 가라앉아서 없어지는 거요. 그때 가만히 놔둔다. 이 말은 번뇌를 시비하지 않는다. 어떤 번뇌가 일어나든 그 번뇌를 가지고 일어나야 된다. 말아야 된다. 왜 이런 번뇌가 일어나느냐? 이렇게 시비하지 말아야 된다. 그냥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그저 번뇌가 일어나든지 말든지 어쨌든 관세음보살에만 집중하고, 지장보살을 부르면 지장보살에만 집중하고, 명상을 할 때 호흡을 관하면 들숨과 날숨만을 관해. 어떤 번뇌가 일어나든지 놔두고.
우리가 법문할 때 밖에서 공사소리가 나고 지지대도 상관 안 하고 그냥 불설 할 사람은 법문 설하고 그다음에 듣는 사람은 귀담아들으면 한 참 여기에 몰두해 있으면 공사소리가 안 들릴 때가 있죠. 없어서 안 들리는 게 아니라. 여기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그게 방해를 못 하는 거요. 그렇게 하면 번뇌의 세력이 약화된다. 화두를 들었으면 다만 화두만 탐구해야지 화두가 들리니 안 들리니 이런 생각 하면 안 된다.
시비를 일으키지 말고 오직 거기에 집중해서 안 되면 또 하고, 안 되면 또 하고, 안되면 또 하고, 다만 할 뿐이다. 이렇게 한 발 한 발 나아가야 된다. 그러니까 언제 하면 될까요? 그런 건 없어요. 죽을 때까지 기도할 때 번뇌는 항상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번뇌가 내 집중, 내 일심을 흩트려 놓지 못하는 경지로 나아가게 된다. 두 번째 질문이 뭐였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어요.
하나는 해탈지도. 해탈하는 법에 따른 설명이고, 하나는 종교로서 불교에 따른 설명이요. 해탈지도에서는 종교를 초월합니다. 이건 불교니 뭐니 이런 얘기 할 필요가 없어요. 해탈지의 입장에서 얘기를 한다면 일체가 유심조요. 부모가 내 맘 밖에 있는 게 아니고 다 어디 있다? 내 마음 가운데서 일체가 다 내 맘 가운데 있어. 그러기 때문에 그 관점에서 볼 때는 온다니 간다느니 어쩐다느니 애기할 필요가 없어요.
내 마음에 걸리면 해탈이 안 된 거고, 내 마음에서 놔버리면 해탈이 되는 거요. 여긴 다 극락이고 정토고 지옥이고 다 어디 있다? 마음의 산물이다. 이렇게 보는 게 근본도리입니다. 그다음 종교로서의 불교에서는 이제 아미타경과 무량수경에 보면 저 타방세계. 여기 말고 저 타방세계에 극락세계라고 하는 세계가 있다. 그런데 그 극락세계는 어떻게 만들어졌냐? 법장비구가 48대 원을 세우고 한량없는 겁 동안 수행정진해서 그런 세계를 만들었다. 원력으로 만들었다.
그 만들어진 세계가 극락세계고 그 법장비구가 성불해서 부처를 이루었는데 그 분의 이름이 아미타불이다. 그 48대원 가운데 내가 이룬 세계는 이러이러한 세계여야 한다. 이게 대부분인데, 그중에 한 개가 누구든지 내 이름을 죽기 전에 10번만 간절하게 일심으로 부르면 누구나 다 이 세계에 태어날 수가 있다. 이런 원을 세웠어.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죽기 전에 10번만 아미타불을 부르면 그 세계에 태어날 수 있다. 이런 얘기요. 누구든지. 대바닷타도 마찬가지예요. 누구든지.
그런데 이 세상 사람을 분류하면 아홉으로 분류할 수 있어. 관무량수경에 나와 이건. 그래서 9품 중생이라 그래. 상중하를 나누고 각각 다시 상중하를 나눠서 최고품이 뭐다? 상상품이고, 상품상생이고. 최하가 하품하생이고 하하품요. 이렇게 9등분으로 나누는데 첫 등급에 속하는 사람, 그러니까 마음이 해탈한 사람이죠. 이런 사람은 즉시 환생한다. 방문을 열고 나가면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가듯이 사바에서 극락으로 바로 들어간다.
이렇게 해서 한나절 만에, 하루 만에, 삼 일 만에, 일주일 만에, 37일 만에, 7일 만에 이렇게 해서 7등급이 49일 만에 환생할 수가 있다. 그래서 49재를 지내는 거요. 그다음에 8등급하고 9등급은 어떠냐? 이 사람도 극락세계에 날 수는 있는데, 지은 죄가 너무 크기 때문에 지옥에 가서 쬐끔 뜨거운 맛을 좀 보고 와야 돼. 갔다 와야 돼. 그냥 바로는 못 가고. 그럼 안가는 건 아닌데 가기는 가. 누구나 다 가기는 가는데 가서 좀 맛을 보고 와야 돼.
그래서 8등급 9등급을 위해서는 백중날 어때요? 계속 기도를 해야 된다. 지금 어디 있기 때문에? 지옥에 있기 때문에. 그래서 49재도 나오고, 백중기도도 나오고 그런 거요.
그다음 집에서 제사 지내는 얘기는 불교가 아니고 그건 유교기 때문에 여기서 논할 필요가 없다. 이런 얘기에요. 그건 유교이기 때문에. 제사를 지내는 건 유교입니다. 또는 우리 전통신앙이에요. 불교에는 제사는 없습니다. 재는 있지. 재. 재라는 것은 제사의 의미가 아니고 (베풀 재)자에요. 그러니까 목련존자가 지옥에 있는 어머니를 구제하기 위해서 어떻게 했어요? 음식을 많이 마련해서 배고픈 사람에게 베풀었죠. 베푼다. 이거에요.
그러니까 제사할 때는 그 귀신에게 뭘 주는 걸 말하고, 재라는 건 귀신한테 뭘 주는 게 아니에요. 가난한 사람에게 배고픈 사람에게 뭘 베풀어서 공덕으로 영가가 천도가 된다. 이런 원리란 말이오. 그러니까 음식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야 이게 천도제가 아니고. 여러분들이 굶어 죽는 북한 어린이를 위해서, 인도의 가난한 어린이를 위해서, 뭔가 우리 어머니의 영가 천도를 위해서, 100만 원을 보시하든 1000만 원을 보시하면 이게 바로 뭐다? 천도재다. 이런 얘기에요. 음식을 차리고 이게 아니에요. 원래는.
그런데 이렇게 음식을 마련해서 베풀 때, 먼저 부처님께 올렸다가 베풀다 보니 불단에 올리는 습관이 생긴 거고. 또 우리나라에 유교하고 같이 들어와 살다 보니까, 제사 지내는 거 하고 결합해가 영단에다 차렸다가 내죠. 그런데 영단에 차렸다가 먹는 거 봤어요? 불단에 차렸다고 먹는 거 봤어요? 다 먹긴 누가 먹어? 사람이 먹으니까 이건 예의에요. 예의. 그러한 습관에 따른 예의일 뿐이다. 이 말이오.
그래서 절에서 제사를 지내는 건 유교와 흡수가 돼서. 그래서 이조 500년 동안 유교식이였잖아. 그죠? 그래서 제사를 지내는 거지. 불교는 베푸는 재, 재만 있다. 제사는 없고. 그러기 때문에 지금은 우리가 같이 결합해 있으니까. 절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그건 뭐 관습이니까. 하더라도 원뜻은 베푸는 데 목적이 있다.
그다음 첫 번째 아들이 두 번 이혼했는데 앞으로 결혼해서 잘 살 수 있겠냐? 잘 사는 건 내가 모르겠고. 결혼을 하는 건 할 수가 있겠죠. 왜? 10번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 헌법에 안 된다고 한 게 없으니까 할 수는 있는데, 문제는 결혼하는 게 좋다. 이 생각을 좀 버려야 된다. 벌써 두 번 이혼했다 하는 것은 여자를 탓하면 끝이 없고, 우리 불교로 보면 이 사람이 남하고 같이 살 준비가 안 돼 있다.
그러니까 여자가 마음 붙이고 살만한 남자가 못 된다. 이런 얘기에요. 그럼 이런 남자를 누가 만들었을까? 내가 만들었지. 내가 오냐오냐하고 키웠기 때문에 어디 가서 엄마 같은 여자를 만나면 모르겠는데, 엄마하고도 자라면서 갈등이 있었다면 엄마 같은 여자하고도 못하는 남자다. 이 말이오. 그런데 어느 여자가 거기 붙어살겠어. 이렇게 딱 돌이켜서 내가 보고. 내가 참회를 해야 돼요.
내가 지금 남편하고 잘 산다고 하더라도 내가 마음이 어떠했는가? 어떤 갈등이 있었는가? 이것이 이 아이에게 마음에서 까르마, 업이 전수됐기 때문에, 똑같이 이런 일이 벌어진다. 그때는 내가 못산다고 해서 요즘 세월 같았으면 벌써 이혼을 해도 몇 번을 했을 텐데. 그때는 다른 길이 없어서 그냥 살았고. 요즘은 사람들이 마음이 달리 들면 나가버린단 말이오. 헤어져 버린단 말이오. 그래서 내가 그때 어떤 마음이었나를 살펴보면서 아들을 논하지 말고 남편에게 내가 참회를 해야 된다.
그렇게 해서 내 맘속에 쌓여있던 남편에 대한 거부감, 미움이나 이런 것들이 다 청소가 되면 아들에게도 영향을 줄 수가 있다. 그러면 결혼을 할 수도 있고. 해도 잘 살 수가 있지마는. 현재의 업장으로는 잘 살기가 어렵다. 그러니까 결혼할 수 있느냐 없느냐. 또 그런 우리 아들 낳아놓고 또 예쁜 여자 찾아가 결혼을 시켜가 이런 노력은 할 필요가 없다. 아들은 탁! 잊어버리고 내 참회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이 내가 편안해지는 길이고 아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길이다.
일체유심조라고 앞에 얘기했죠? 마음에서 일어나는 거요. 마음에 있다. 그분의 마음에 남아있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돼요.
'법륜스님 > 즉문즉설(2012)'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제252회 참회 (0) | 2012.10.11 |
---|---|
[즉문즉설] 제25회 머리로 알아도 안돼 번민이 생길 때 기도법 (0) | 2012.10.11 |
[즉문즉설] 제22회 상처, 피해의식 때문에 괴롭습니다 (0) | 2012.10.11 |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제251회 직장 (0) | 2012.10.10 |
[즉문즉설] 제21회 시어머니 때문에 괴로워요 (0) | 2012.10.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