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적 자아의 본질에 관한 연구는 오래된 영역이다.
의식의 다발에 불과하다는 설부터
경험의 중심, 관찰로서의 자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설이 있고
특히 뇌과학에서는
몸, 기억, 계획을 중심으로 자아를 설명하기도 한다.
감정 형성을 설명하는 파페츠 회로는
인간의 뇌가 자극에 반응하여 내놓는 감정이
프로세싱의 결과이며
특정 감정을 주관하는 기관이나 영역이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심리적 자아가 꼭 필요한가에 대한 물음표를 낳게 한다.
만약 그렇다면 고통은 있어도
고통받을 심리적 자아는 없는 것이고
두 번째 화살은 불필요해지게 된다.//
오늘은 ‘고통은 있어도, 고통받는 자는 필요 없다’라고 하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절대적인 영혼]이 존재한다라고 믿는다면
이건 조금 별개의 문제지만
어찌 됐건 [나]라고 불리어지는 이것에 대한 호기심 또는 궁금증은 크기 때문에
학자들이 옛날부터 이 [탐구]를 해왔죠.
그래서 철학자나 뇌과학자나 이런 사람들이
[자아] 문제에 대해서 나름대로 연구를 했죠.
더듬어 봤는데
자아를 [에고]라고 부르기도 하고
조금 넓은 의미에서 [셀프]라고 부르기도 하죠.
근데 에고라고 하는 것은
프로이드가 워낙 강하게 에고의 개념을 설명했기 때문에
자아라고 할 때는 보통 셀프라는 얘기를 쓴 것 같습니다.
철학자 흄은
[자아]라고 하는 것이 어떤 딱 객관적인 주체이거나 실체가 아니고
[의식의 다발]들일 뿐이다.
이런 의식 저런 의식들이 이렇게 모여서
뭉쳐 있는 정도의 모습일 뿐이다
이렇게 얘기를 했죠.
단일화한 것도 아니고
구조화된 결합을 가진 것도 아니다
이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부분은 조금 [회의주의적]인 입장이죠.
허무주의까지는 아니어도.
그래서 흄은 어떤 서양 철학의 계보에서
조금 회의주의적인 입장을 대표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또 조금 완화된 자아에 대한 입장은
우리가 경험을 많이 하는데
[경험하는 중심]이 있지 않겠느냐
그걸 현미경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이 경험의 중심이 있어서
[경험하는 자아]가 있지 않겠느냐라고 얘기를 합니다.
직관적으로 “그렇지 뭐가 있어야 되지 않을까?
뭐 기억하고 또 기억한 것을 다시 끄집어내서 생각하고 하는 주체가 있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또 그 반대쪽에는
“아니 경험하는 자아도 자아지만
[관찰하는 자아]도 있는 것 같아”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를 객관적으로
이게 [메타인지]에 해당하는 것이죠.
그래서 자아가 있긴 있는데
경험의 중심과 관찰의 중심
이런 [센터]가 있는 것 같아
이런 관점으로 자아를 이해하려고도 합니다.
그리고 의학이나 뇌과학 쪽에서는
아무래도 뇌라고 하는 것이
[생각의 주제]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 뇌에 있다”
이렇게 21세기에서는 거의 그게 통념처럼 되어 있기 때문에
뇌과학에서는 뇌와 관련해서
마음을 혹은 자아를 나를
한 세 가지 정도로 보는 것 같습니다.
하나가 소머틱 셀프라고 그래서
소머틱 하는 게 [몸]이잖아요.
이 몸을 나라고 인식하는 자아가 아니겠느냐
그게 자아가 아니겠느냐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뇌 영역에서는 특히 섬엽이라든지 두정엽 같은
좌표와 그 좌표 위에서의 [나의 위치]
그리고 내장과의 센싱을 통해서 [나의 상태]를 인식하는
세상과 나를 인식하는 섬엽 중심의 자아관을 이야기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내거티브 셀프
이게 경험하는 자아하고 비슷한 개념인 것 같은데
그 모든 것을 [경험]하고 [기억]하는 것이 자아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당연히 뇌에서는 이것이 [해마] 중심이 되는 거겠죠.
세 번째는 이젝티브 셀프라고 그래서
[경영자]인 뇌 경영자인 나
이렇게 표현하는 것인데
이건 당연히 전두엽의 이야기겠죠.
계획하고 실행하고 다시 반성해서 [피드백]하는
이런 뇌를, ‘그것이 나의 자아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뇌의 입장에서는
몸, 그리고 기억, 그리고 계획
이것이 자아다, 이것이 나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 세 가지 정도의 자아관 또는 셀프관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데
물론 이것은 부족하고
영원히 목을 적혀줄 수 없는
항상 2% 부족한 갈증이 있죠.
그래서 1930년대에 이탈리아 신경과 의사인 파페츠라는 사람이
이 사람도 똑같은 것이죠.
“도대체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감정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감정의 주체는 무엇인가”
이런 궁금증이, 의문이 있었겠죠.
그렇게 해서 연구를 해봅니다.
연구를 해보고
이 ‘뇌가 어떻게 작동하는가?’ 하는 방식을 추적해 봤더니
무슨 옛날에 회로가 이렇게 움직이듯이
어떤 [자극]이 들어오면
이게 이런 식으로 [회로]를 따라서 움직이면서
어떤 값]을 내어놓더라.
그것이 감정적 [정향] 또는 [태도]
이런 것이다라고 하는 거죠.
그래서 마음은
단일한 주체가 아니고 어떤 회로와 같다.
각각의 요소들이 상호작용하는 회로와 같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고
그 회로의 이름을 의사 이름을 따서
[파페츠회로]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그래서 이 파츠회로라고 하는 것은 아주 간단하게 얘기하면
우리가 시각, 청각, 체감각 등등
감각정보가 들어오면
이거는 연합영역에서 그 정보를 전기화학적 신호로 취합하고
이 정보를 [변연계]에 보낸다는 것이죠.
변연계의 핵심은
[해마]와 [편도체]잖아요.
그래서 헤마는 “이게 무슨 상황이야?”
편도체는 “이게 위험한 거 아니야?”
그다음에 측좌핵에서는 “이거 어떤 좋은 일인가?”
이런 것들을 물어본다는 것이죠.
그리고 편도체, 해마, 편도체 측좌핵이
사실은 감정에서 굉장히 역할을 크게 하는데
그다음에 그것을 초기적인 전두엽, 판단 기능을 했던 [대상회]라든지
그다음에 감각정보가 들어오는 통로인 [시상]이라든지
심지어는 [연합영역]까지 다시 보내고
또 전두엽에 1차 자료를 보내고
이렇게 해서 계속 시뮬레이션 혹은 서로 인트랙션을 하더라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전광석화와 같이 [뇌 전체]를 사용해서
하나의 감정적 태도적 입장을 정하더라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입장에서 보면은
단일한 주체가
셀프를 대표하는 혹은 그 자체, 셀프라는 것은 없다.
[모든 요소]들이 어울려서 굉장히 빠르게 상호작용한 [결과값]들이
우리의 기본 감정, 생각, 느낌 이런 것들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 감정 태도는 해마 같은 혹은 전두엽 같은
이런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는 특정 영역의 소관이 아니고
그냥 프로세싱의 결과물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죠.
그래서 자아는 프로세스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죠.
프로세스라는 말 자체가 [과정]이니까
[주체]는 없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자아는 프로세스가 아닌가?’ 하는 얘기를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만약에 우리가, 마음이, 자아가 프로세싱의 결과라면
나라고 생각되어지는 에고라고 해도 좋고, 셀프라고 해도 좋은데
이것이 뭔가 어떤 회사의 주인처럼, 집주인처럼, 땅 주인처럼
그렇게 주인이 있을 필요가 있는가라고 하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됩니다.
/그래서 경험하거나 인식하거나 행동하는
그 관념적인 주체가 없이도
마음은 생겨나고 마음은 사라진다./
즉 마음이 생겨나서
경험도 하고 인식도 하고, 느끼기도 하고, 심지어 행동도 한다.
전혀 문제가 없다
그러면 [나]라고 하는 것은
그냥 [심리적인 하나의 가설물]일 뿐이다.
그래서 이것이 꼭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자아라는 주체가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주체 없이도 경험할 수 있고, 행동할 수 있다면
그것을 [고통]과 관련해서는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그 말은 뭐냐 하면
우리가 고통을 겪을 때 [통증]이 있죠.
통증이 있고
배가 고프면 배가 고프고
또 사랑하는 사람이 안 좋은 일을 겪게 되면 슬프고
이런 생리적, 감정적, 또는 인식적 리액션, [반응]이 일어나는데
그 반응이 꼭 [주체]가 있어야 되는 게 아니라는 거죠.
그냥 그렇게 프로세싱의 결과로 반응이 일어난다는 거죠.
좀 다르게 이야기하면
/고통은 있어도
고통은 있어도 고통받을 자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거죠.
그래서 불교에서는
고통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러운데
고통받을 자
“나는 괴로워, 내 인생은 끝났어
이렇게 되면 인생 나가리야”
이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는 [불필요한]
심지어는 [두 번째 화살]이다, 이렇게.
내가 맞을 필요가 없는데 자청해서 맞는 두 번째 화살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불교적 관점하고도 [상통]한다
이렇게 말을 할 수 있겠습니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고통은 있지만 고통받을 자는 없다
그러면 불필요한 심리적 고통은 필요하지 않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심리적 타격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셀프 이미지의 훼손
자기가 생각하는 삶이 안 될 것 같은 좌절감
이런 것일 텐데
그런 거 원래 없다는 겁니다.
/그런 건 원래 없고
이 모든 요소들의 상호작용으로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행동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셀프 이미지에 전전긍긍하는 그 에너지]
세이브, 아낄 수 있고
그것으로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심리적 자아가 꼭 필요하지 않다.
그래서 고통은 있어도 고통받을 자는 없다, 하는 것을
우리가 오늘 한번 얘기를 해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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