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는 예외 없이
착하게 살라고 가르칩니다.
무작정 선행만 갖오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야만 하는 이유 역시 설명합니다.
불교와 힌두교에서는
그 이유를 업=카르마에서 찾습니다.
업이란 산스크리트어인 카르마의 번역어인데
쉽게 인과를 조장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행위는 몸신과 입구 그리고 생각으로 이루어져 삼업이라고
그 뿌리는 결국 생각 하나입니다.
생각에 의해 선업과 악업, 그리고 선악에 연관되지 않는 중업이 나오게 되니까요.
업은 마치 나비효과처럼 미세한 것도 인과에 걸려 응보와 윤회의 빌미가 됩니다.
그래서 극락에 가고 싶은 사람은 선업을 짓고
해탈에 목적을 둔 수행자는 업 자체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업이란 것이 실재하는 것이 맞을까요?
인과응보가 사실이라면 선업을 쌓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선업을 쌓으려면
나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사실이 전제돼야 합니다.
오늘날의 뇌과학을 보면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가령 갈증이 생긴 나가
콜라 혹은 사이다를 마실지 아니면 물이나 다른 음료를 선택할지도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나가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에
뉴런에서 특정한 전기적 신호가 나오고
그것에 의해 생각이 일어나면서 선택하게 된다는 얘기입니다.
이런 실험들이 모아져서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심각한 회의가 싹텃고.
이것은 불교나 힌두교의 업(카르마) 이론과 잘 맞아떨어지기도 합니다.
업이란 어떤 행위에 의해 생성된 정보이고
이것에 의해 다음 행위가 정해지게 됩니다.
다시 말해 기존 업의 정보가 원인이 되어 다음 업이 조성되고
이런 면에서 보면
뇌과학에서 도출한 자유의지가 없다는 실험들과 부합하게 됩니다.
현재의 나가 과거의 업에 의해 정해져 있다면
향후 선업을 지을지, 아니면 악업을 지을지는 나의 소관이 아니게 됩니다.
나의 선택은 이미 업에 의해 정해져 있을 테니까요.
이렇게 기계론적 인과론와 업이론
그리고 뇌과학의 무자유의지 실험을 종합해 보면
나라는 존재가 참으로 우습게 됩니다.
실로 명심보감에 나오는 다음의 글귀가 심중에 와 닿습니다.
만사분이정(萬事分已定) 부생공자망(浮生空自忙)
세상만사 이미 정해져 있거늘
덧없는 인생살이에 공연히 스스로 분주하구나!
그렇다면 업의 인과론에 의해 자유의지가 없다면
도대체 나는 누구란 말인가요?
나가 성립하려면 우선 자율적 선택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업이 둥글러 가는 가운데
잠시 잠깐 생겨나는 상념의 반응이 나라면
허망하기 짝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10여 년이 지나면
구글의 알고리즘이
나보다 더 나를 잘 알게 된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나에게 과연 자유의지가 있는지
여부부터 따져봐야 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에게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업에 의한 정보들이
나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 정보들이 막강하더라도
나의 자유의지까지 침범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업의 인과론이 먹히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요?
그건 나가 바로 조물주(제1원인)이기 때문입니다.
조물주만이 업의 인과론에서 예외가 됩니다.
그렇다면 나가 조물주(제1원인)이기에
현실에서 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업에서 자유롭기 위해서는
나가 조물주(제1원인)라는 사실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무작정 나가 붓다이고
조물주라고 믿어서는 소용없습니다.
무명의 존재는 어쩔 수 없이 업의 파도에 떠밀려
인과론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중생이라고 하지 않던가요
이런 이유로 선업을 짓는 것도
과거의 업(정도)에 의해 녹록지가 않게 됩니다.
아무튼 실존(제1원인)을 깨닫지 않으면
업에 종속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깨닫고 나면
정말로 업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될까요?
힌두교의 참나 관점에서 보면
깨달은 뒤에도 업은 남게 됩니다.
붓다가 되어도 세상을 교화하는 행위를 하면 업이 생기고
그래서 유여열반이란 말이 나옵니다.
죽음과 동시에 몸뚱이가 소멸되어야
비로소 진정한 무여열반에 이른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얘기를 하는 힌두교의 참나 지지자들은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나의 실체가 없듯이
업 또한 마찬가지라는 사실입니다.
단지 진리를 모르는 무명에 있기에
나와 업에 잠시 휩쓸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붓다가 된다는 것은
진리를 깨달아
나와 업의 실체를 훤히 꿰뚫게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그것들이 신기루와 같은 환영인데
무슨 업을 짓는다고
유여열반과 무여열반의 구분을 두겠습니까?
힌두교의 참나가 심히 불완전하다 보니
깨달음에 등급을 매기는 습성이 있는데
싯다르타의 불교적 깨달음은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불교의 깨달음은
무명에서 명이 된 딱 하나입니다.
명이 된 이후에 그 명을 더 밝게 하려는
일체의 후속작업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돈오 뒤에 점수가 적합하지 않은 것입니다.
요컨대, 업은 생각이 지은 정보의 흔적이고
이것들이 작용해서 현재와 미래의 나에 끊임없이 개입하게 됩니다.
이 업의 등쌀이 너무 강력해서 자유의지가 없게 보일 수도 있지만
나는 원래 조물주(제1원인)이기에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현재와 미래의 업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업을 주관하는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지만
그렇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치 인생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업의 통제를 받게 됩니다.
당신은 업에 종속된 삶을 원하시나요?
그렇지 않으면
업을 제어해 주체적 삶을 살아나고 싶으신가요?
만일 후자라면 수행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수행이 바로
업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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