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를 했다고 모두 수행승인 것은 아닙니다.
수행승이 되려면
최소한 안거제도를 지켜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기후 조건을 따져서
1년에 두 차례, 동안거와 하안거를 두어 수행에 정진하고 있습니다.
사실 몇 달씩 사찰에 머무르며 수행에 매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승려들은 안거를 지킨 횟수를
수행의 경력으로 삼기도 합니다.
물론 성철 스님 같은 경우는 안거가 늘상 하는 일이고
심지어 장좌불와를 실천함으로써 수행의 표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누워서 잠을 자지 않는다는 것은
육체의 피로가 심해 일종의 고행입니다.
그렇기에 장좌불와는
성철스님의 수행과 도력을 말해주는 표식 같은 것으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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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고행은 수행에 어느 정도의 도움이 될까요?
고생이 수행에 도움이 된다면
자이나교의 수행자들에게 초점이 맞춰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이나교의 수행자들은 실오라기 하나 몸에 걸치지 않고
인도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걸식으로 살아갑니다.
잠도 아무 데서나 자고, 수백 마리의 모기가 온 몸을 물어뜯어도
미동도 하지 않습니다.
식사과 물은 하루에 단 한 차례만 허용되고
그것도 반듯하게 서서 먹어야 합니다.
게다가 이가 썩거나 몸이 만신창이가 되도 치료하지 않고 방치합니다.
이런 고행은 싯다르타가 생존했을 무렵에도 만연했습니다.
싯다르타 역시 고행에 매진했지만
그것이 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멈추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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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왜 싯다르타는 고행에 선을 그은 것일까요?
혹시 극단적 고행에서 오는 고통과 피로감을 감내하지 못했던 건 아닐까요?
자이나교의 수행자들은 싯다르타를 고행의 낙오자라고 말합니다.
싯다르타가 해탈하지 못했기에 고통을 견딜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자신들은 해탈했든지 아니면 해탈에 근접했기 때문에
고통과 함께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도대체 누구의 말이 사실일까요?
수행의 기준을 체험이나 해탈에 두면 자이나교의 말에 타당성이 있습니다.
해탈에 가장 큰 장애가 육신이기에
고행을 통해 해탈의 마지막 퍼즐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육체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려가거나
교묘하게 타협하게 될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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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수행의 기준이 진리적 자각이라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제1원인을 화두로 잡고 궁구하기 위해서는
생각이 분산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온몸이 찢어지듯 고통스럽다면
어떻게 생각을 모을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육신이 너무 편해도 그런 안락한 쪽으로 생각이 흘러갈 수 있기에
삼가야 합니다.
결국 진리적 자각을 목표로 한다면
육신의 적당한 상태를 취하는 것이 효율적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싯다르타는 고행을 중지하고
홀로 수행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해탈에서 진리로의 전환/
이것이 바로 불교의 태동입니다.
그러니 자이나교 같은 극단적인 고행이 불교에 개입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불교는
진리보다는 해탈에 중점을 둡니다.
그래서 체험, 보시, 탐진치, 열반, 심리, 인성, 같은 것들을
쉽게 따지게 됩니다.
만일 해탈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불제자들은 전부 자이나교 수행을 따라하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육체마저 뛰어넘는 진정한 해탈의 경지를 맛볼 수 있으니까요.
요컨대, 적당한 고행은 수행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이나교 같은 극단적인 고행은 오히려 수행에 악재가 됩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궁구할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해탈이냐? 진리냐?
이것에 의해 고행의 기준이 달라집니다.
혹시 당신은 해탈을 원하시나요?
아니면 진리를 깨닫고자 하나요?
그것도 아니면
해탈과 진리를 동일시하고 있는 건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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