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라선공부

[릴라선공부] 불심을 깨닫는다

Buddhastudy 2024. 5. 28. 19:23

 

 

근데 이 격식을 벗어난 선에 통하려면

이것이 장애가 되고 있다라는 거를 깨달아야 돼요.

 

그래서 뭐가 장애가 되냐?

대부분의 사람들은

체험을 해야 돼

아니면 깨달아야 돼

아니면 뭘 어떻게 의지해서 앉아야 돼

명상해야 돼

이런 식의 어떤 자기만의 어떤 마음의

어떤 생각을 이렇게 쥐고 있거든요.

이것까지 다 내려놓아버려야 됩니다.

 

그래서 완전히 마음이 어떤 거에도 의지하지 않은 상태, 이완된 상태

어디에도 머물지 않은 상태,

어떤 경험이 일어나든 간에 그것을 붙잡고 있지 않고 의미 부여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가 문득 이 본성을 자각할 수가 있는 거예요.

 

그때 이렇게 죽비를 탁 친다거나

*~! 이겁니다.

아니면 뭐 이렇게 손을 든다거나

이겁니다 할 때

저절로 자각이 되죠.

 

그러니까 이때도 상당히 미묘한 어떤 차이가 있어요, 이때도.

그러니까 만약에 이겁니다 할 때 우리의 마음이

이런 식의 죽비나 어떤 죽비 소리에 와 있으면

어떤 지견에 사로잡혀 있는 거랑 구조는 똑같아요.

대상화에 빠져 있기 때문에.

 

생각의 어떤 내용에 들어가 있는 거나

드러나는 이 사물에 들어가 있는 거나

구조적으로는 똑같아요.

왜냐하면 대상에 마음이 떨어져 있는 거거든요.

 

근데 감이 잘 안 열려요.

이걸 아셔야 돼요.

나중에 어느 순간 딱 알게 되거든요.

공부를 하다 보면

이겁니다직진할 때 여전히 내가

자기 마음 이 자리에 있지 못하고

자꾸 어떤 대상을 따라갔구나” “경계에 떨어졌구나라는 거를 알게 되는 거거든.

 

근데 그런 마음이 딱 멈춰졌을 때

그게 분별 집착이죠.

? 이거.

 

저 사람이 죽비를 치고 있다라는 건 분별이죠.

분별되면 우리는 분별에 확 들어가요.

마음이 분별에 확 떨어져 버리고

이것이 객관적인 사실인 것처럼 딱 취해버려요.

 

이런 식의 어떤 분별 작용이

순식간에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 눈치를 못 채고 있을 뿐이거든요.

너무도 짧은 순간, 찰나 간에

저 사람이 죽비를 치고 있다라는 세계를 딱 창조해 버려요.

객관적인 사실인 것처럼.

 

근데 만약에 여기에 이런 일이 일어나더라도

여기에 마음이 떨어지지 않으면

그냥 어떤 시간과 공간이 없는 데서 저절로 비추고 있는 이 성품이

딱 자각이 된단 말이에요.

이거는 나와 떨어져 있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가 체험이 올 때

저거구나이렇게 안 합니다.

저거구나하면 뭔가 여기와 떨어져 있는 분리돼 있는 어떤 대상을 지칭하는 것 같은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체험이 올 때의 말이

이거구나하는 거는

나와 떨어져 있지 않다라는 얘기거든요.

그런 식의 표현을 하는 이유도 있는 거예요.

 

물론 이것이라는 어떤 분리된 대상을 가리키는 건 아니지만

그 순간, ‘저거구나라는 말 대신에 이거구나라는 말이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이유는

나의 지금, 이 자리에, 여기에서 전혀 떨어져 있지 않다 이거예요.

분리돼 있지 않다 이거예요.

 

여기에 딱 통하고 나면 알죠, 스스로가.

모든 것이 이게 소리, 생각, 느낌, 사물, 빛깔

모든 것이 다 여기서 저절로 비추고 있구나.

이 하나의 어떤 깨어 있는 성품에서

온 세상이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이 다 드러나고 있구나라는 것을

누가 얘기해주지 않아도 알게 돼요.

 

그래서 그런 체험이 오면은

막 순식간에 우리가 그 소화되지 않았던 말들이 확 소화가 되고

자기 입으로 또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거를 경험하게 되죠.

 

이 드러나는 게

우리가 말하는 이 공부의 시작이다, 시작일 뿐이다.”

 

지금 여러분이 지금 저를 잘 보고 계시죠?

잘 보고 계시고

보통 사람들은 이걸 보고 있다라고 해석을 하는데

그거는 지금 바로 이런 드러남에 대한

순간적으로 생각이 해석하고 있는 거예요.

 

저를 보고 있다라는 거는 생각이에요. 생각.

진짜 보는 이 직접적인 경험에는

본다라는 그런 소리가 없어요.

그냥 그냥 저절로 드러나고 있을 뿐이거든요.

 

가장 가장 먼저의 경험이 중요한 거예요.

첫 경험, 첫 경험이 중요한 거예요.

첫 경험이 뭐냐?

 

지금 여러분은 저를 보고 있고 꽃을 보고 있고

이런 식의 언어적으론 표현할 수 있는데

첫 경험은

여러분이 나를 보고 있다라는 이 언어가 없고, 이런 상황이 없어요.

이거는 생각이

이 두 번째 이 경험 뒤에 일어난 생각이

이렇게 설정하고 있는 것이고

또 그것이 되려면

그런 생각을 믿어버리는

세 번째 단계는 뭐냐? 믿어버리는 거예요.

두 번째 일어난 생각을 믿어버리면

믿는 것이 세 번째 단계죠.

 

지금의 여러분이 저를 보고 있는 것이

객관적인 사실인 것처럼 느껴지시는 분 있죠?

있습니까? 있잖아요. 솔직하게 얘기를 해 보세요.

 

여러분이 저를 보고 있잖아요.

제 말을 듣고 있고.

보통 사람은 이런 식의 생각을 한단 말이에요.

 

근데 이게 가능 하려면

크게 거칠게 나눠서 3과정이 들어가야 돼요.

 

-눈을 떠서 어떤 상이 탁 드러나야 되고

그다음에 일단 어떤 시각적인 상이 드러나야 되고

그다음에 어떤 청각적인 어떤 경험이 딱 이루어져야 돼요, 즉각적으로.

 

-여기에다가 이 상황에 대한 해석이 두 번째 단계로 들어갑니다.

생각이 그동안에 살아오면서 익힌 언어와 어떤 이해의 구조 속에서

저 사람이 지금 설법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일어나요.

 

근데 거기에서 끝나지 않아요.

이 객관적인 사실이 되려면

그 일어난 생각을 믿어야,

그걸 취착이거든요, 취해야지 믿어야지

무슨 소리야 저 사람 저기 앞에서 얘기하고 있는 게

이게 객관적인 사실이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그러니까 그 과정을 거쳐야지

제가 여러분 앞에서 법문하고 있는 그 사실이 객관적인 사실화 된다.

 

그럼 자기가 지금

그런 것처럼 느껴지고 받아들여지고 있다면

벌써 분별이 몇 번은 작동된 상태인 것이다 이 말이에요.

 

근데 이거는 뭐냐 하면

그런 식으로 떨어져 버리면

이상하게 저절로 깨어서 비추는 마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밀밀하게 다 어떻게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게 자각이 안 돼요.

그것이 이상하거든요.

 

분별심은 너무 미묘해서, 분별심에 탁 갇혀버리면

그것밖에 안 보이는 거예요.

그런 식의 어떤 경험적인 일이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이게 뭔가 의심스러워.

 

만약에 내가 여기에서 뭐 생각이 없으면

이런 일이 가능할까?

하나씩 하나씩 조건을 달리해 보면

이거는 어떻게 보면 조건이 어우러져서

객관적인 사실처럼 드러난다라는 걸 스스로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이해할 수 있게 되면 어떻게 되냐?

지금 내가 고정시킨 이 사실을 믿으면 안 돼요.

공부를 하려면.

그런 거를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어

아니야 나는 몰라. 이거는 내 분별의 결과일 뿐이야.”

 

나는 그동안에 살아온 어떤 경험이나

그런 걸로 봐서 분명히 저 사람이 앞에서 얘기하고 있는데

근데 조건을 달리해 보면

그런 일이 불가능하겠네라는 거를 납득을 하게 되면

 

자기가 지금 이거는 공부가 안 돼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지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구나라고

이게 받아들여야 돼요.

 

그럼 어떻게 되냐?

그런 생각이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그거를 의미 부여한다거나 믿으면 안 되죠.

그게 공부 지금 2단계의 공부라는 거예요.

 

근데 자꾸 습관은 일어납니다.

습관은 일어나면 이제 그냥 놓아버려야 돼.

이거는 내가 몰라서 이러는 거야.

내가 실상을 보는 눈이 열리지 않아서 이런 것이기 때문에

나는 틀렸어. 내 생각은 틀렸어.

내 앞에 펼쳐진 이 세계는 객관적이라고 할 수가 없어.”

 

그래서 그걸 딱 그런 생각이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내려놓으셔야 돼요.

내려놓다 보면 어떻게 되느냐?

점점점점 분별이 작동하는 게 멈춰져요.

멈춰지는 거예요.

 

믿지 않다 보면 분별이 힘을 못 쓰게 되거든요.

그럼 멈춰지게 되는 거예요.

믿는 마음도 내려놓아지고.

그렇게 생각이 일어나도

이거는 또 내가 몰라서 이런 것이지해서 내려놓게 되고.

 

그러다 보면

이상하게 객관적인 사실인 것이

흐릿해지고. 아닌 것처럼 자기한테 다가오거든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탁 마음이 이렇게 분별이 작동되는 마음이 탁 멈추게 되면

그때서야 가장 어떻게 보면 분별에 가리고 있던 그 각조심

저절로 비추는, 깨어서 저절로 비추는 마음과

딱 조우하게 된다. 해야 되나요?

딱 체험하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그냥 어떻게 표현할 수 없지만

스스로가 부정할 수 없는 어떤 사실과 만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모든 일이 이 일이었구나.

내가 하는 일도 아니고

내가 듣는 일도 아니고

내가 보는 일도 아니고

이것으로 인해서 모든 것이 생겨나고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있구나라는 걸 스스로 알게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의법 출생]

법에 의지해서 생겨났다.

이게 이 얘기를 하는 거예요.

위법 출생이라는 건.

이거에 의지해서 생겨나고 있다, 이거예요.

지금 이 제목이 이겁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우리가 마음을 깨닫는다.

부처, 불심, 불심을 깨닫는다.

이때부터 공부의 시작이라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