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윤홍식_즉문즉설

32. 윤홍식의 단학경전 강의 - 옥추보경 중 지도심요장

Buddhastudy 2013. 5. 26. 20:19

출처 : 홍익학당

  

지도심요장이라고요 옥추보경에서 아주 짧은 글이에요.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지도심요장은요, 그대로 읽어보시면 지극한 도가 (깊을 심)자에 아주 (그윽할 요)자이거든요. 지극한도는요 심묘_아주 깊어서 우리 눈에 보이고 들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주 그윽하다는 얘기입니다. 이게 지금 서양에서 영국의 수도사분이 써놓은 천주교에서 무지의 구름이라고 있는데요, 하나님을 만나려면 무지해야 된다. 즉 무지의 구름이라는 게요, 예전에 모세가 구름 속에 들어가서 하느님을 만났거든요. 그걸 가지고 쓴 겁니다. 그 구름이 다른 구름이 아니라 외적인 그런 구름이 아니라 무지의 구름이다.

 

무지 속에 우리가 들어갔을 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 무지라는 건 동양의 선이랑 같죠. 선을 이렇게 쓴 거보십시오. 아까 이건 뭔 의미일까요? 원래 이 말은 참선과 관계가 없는 말입니다. 제사지낸다는 뜻이었어요. 예전에 봉선이라고 해서. 제사지내던 글자인데. 요게 지금 하느님 (윗 상)자에, 옛날 글자거든요. 하느님이 은총을 내려주거든요. 그려러면 우리도 짐승을 바치는 거죠. 제사를 지내는 건데. 그런 의미였는데. 요게 또 ()자가 되잖아요. 보다라는 뜻이 되잖아요. 요건 (하나 )자잖아요. 만물 속에서 만물이 본래 하나라는 걸 보라는 겁니다. 이거를. 이거는요, 또 달라요. 요거는 이거 틀렸다 맞았다 할 수가 없어요. 이렇게 봤다는 게 중요합니다.

 

인도말 다이아나라는 걸 비슷한 의미인 선으로 번역할 때 같은 음가의 여러 글자 중에 이 글자를 택한 거는요, 하나인거를 보라는 겁니다. 만물 속에서 하나를 보라는 메시지입니다. 또 인도말로 이런 게 있습니다. 三昧삼매. 사마디인데 사마디를 한문으로 번역할 때 이 매자 안 써도 되죠. 그런데 굳이 ()자에 (어두울 )자를 썼을까요? 요게 의도가 있어요. 석삼이요, 보십시오. 이게 인도요가 수트라 같은 이런 경에서 기본적으로 나오는 이론이 삼매에요. 요 메시지를 담은 거에요. 뭐냐 하면 인도요가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요가 수트라에서. [보는 자와 보는 행위와 보이는 대상 이 세 개가 하나로 꿰어져야 삼매다.] 그래서 삼매입니다. 요 셋의 구별이 어두워진 상태라는 겁니다.

 

나다 남이다가 어두워진 상태가 삼매에요. 요거를 후대의 선문답에서 뭐라고 하냐하면요, 스님들께서 선문답 하다가 나는 화살로 세 관문을 뚫었다. 이런 표현을 할 때가 있어요. 이게 그겁니다. 뜰 앞의 잣나무 했을 때 잣나무를 그냥 나 따로 있고 잣나무 따로 있고 잣나무를 보는 행위 따로 있어선 삼매가 아니고요. 딱 보는 순간 나와 잣나무와 내가 본다고 하는 행위가요 구별이 안 되고 딱 하나로 꿰어지면서 삼매에요. 이해되시죠? 그래서 글자에다 의미를 담은 거에요. 번역하시는 분들이 이런 의미까지 담아서. 그러면 이게 잘못됐다고 할 수 있을까요? “중국에서 선은 그렇게 안 썼어.” 라고 말하면 안 돼요. 그러면 하수에요.

 

이렇게 썼구나하고 읽어내는 사람이 상수죠. 어떻게 썼는지. 언어라는 건 이런 겁니다. 맞다 틀리다는 게 없어요. 어떤 기본적인 틀만 있지. 그거 넘어갔다고 틀렸다고 못해요. 사회적으로 합일하면 넘어가는 겁니다. 그것도 창의적으로 얼마든지 만들어 쓸 수도 있는 게 언어에요. ~ 지도심요장은요, 마찬가지로 아까 그 은주대전에 은나라 총사령관 문태사를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으로 기리는 백두산족의 경전 옥추경의 그 한 장입니다. 이제 3장이 나와요. 至道深窈章지도심요장, 道以誠入章도이성입장, 演妙寶章연묘보장, 묘한 보물을 갖다가 내가 부연해 주마. 연묘보장. 요 삼장이 옥추경에 실제 제일 중요한 경문입니다. 나머지는요, 다 주문이나 어떤 하늘나라에 일어나는 일을 이야기하는 거에요.

 

설명을 해주십사. 옥추경을 안 읽으면 어떻게 되고 읽으면 어떻게 된다. 이러 얘기들이고. 요게 도를 얘기하는 건 요 3장을 칩니다. 아까 선문하고 같이 보시면 되요. 지도심요장은요, 그중에 아주 짧은 경입니다. 보세요. 천존 원할 때 천존이 누구냐하면 구천응원뇌성보화가 천존입니다. 하나님이에요.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셨다. 이제 천인, 너희 여러 천인들이. 그러니까 하늘나라에서 얘기하는 겁니다. 지금 북극성에서 일어나는 일이에요. 북극성에서요, 북극성에 있는 다른 신선들이 하느님한테 도를 좀 가르쳐 달라고 설명을 더 해주십사 부탁드린 거에요. 그러니까 얘기한 겁니다. 너희 천인들이 용문지도. 지극한 도를 듣고 싶으냐?

 

~ 여기에 함정이 있다는 겁니다. 지극한 도리를 들려달라고? 대충 짐작 가시죠? 지극한도는 심묘. 말로 할 수 없다는 거죠. 무지의 구름. 어떤 모든 분별을 다 놔버려야만 알 수 있는 세계다. 생각. 보십시오. 이 지라고 하는 건 생각을 대표하지만요, 생각이 좀 더 구르면 감정이 되고, 좀 더 구르면 거칠어지는 오감이 되는데. 요런 마음의 작용을 다 놔버려야 된다는 얘기거든요. 특히 생각이요. 요놈이 모든 걸 흐리거든요. 뜰 앞의 잣나무를 봐라 에서 오감은요, 오히려 참나를 방해를 덜해요. 참나를 방해를 덜 한다는 겁니다. 참나 그 자체는 아닌데요. 우리가 전나무를 분별 안하고 보면, 즉 생각만 안 일으키고 하나로 꿰서 보면은 도를 찾을 수도 있다는 얘기잖아요.

 

특히 요 생각이 제일 가까이 있으면서 영을 흐립니다. 혼의 가장 심층적인 부분이라. 그래서 특히 생각을 내려놔야 되고, 심하게 말할 때는 보고 듣는 것도 결국 내려놔야 되요. 진짜 참나를 만나고 싶다면. 그래서 이 두 가지가 다 이해하셔야 됩니다. 보세요. 일반. 일반견성은요, 뜰 앞의 잣나무를 보는 중에도 견성할 수 있어요. 호흡하다가도 견성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견성만 하는 건 아닙니다. 오감을 갖다가 분별 안하고 봤더니 내 안에 참나가 느껴진 거에요. ~ 그런데 만약에 참나만 느끼고 싶다면 어떻게 될까요? 결국 생각감정오감을 다 없애야 되요. 방법도 어렵지 않아요. 참나만 보고 있으면 되요.

 

우리가 요 두 개를 같이 볼 수 있거든요. 즉 일반적인 대상에 대한 몰입을 하다 견성을 얻으면 대상도 보이고 이것도 보입니다. 참나도 보이고. 호흡하시다가 견성을 얻으면 이게 두 개다 보여요. 그때 호흡을 모른다 해버리시면 요놈만 보이겠죠. 그래서 참나만 보고 있다면 다른 게 있는지 모르는 상태가 와요. 그게 사선정 이고, 사선정과 멸진정 차이는 탁~ 보고 있는데 생각이 끊어지면 사선정이고요. 멸진정은요, 생각으로 일으킬 수조차 없는 상태가 멸진정입니다. 아까 사선정이나 멸진정이나 다 참나만 보고 있는 건 똑같아요. 다른 게 눈에 하나도 안 들어와 있는 상태.

 

사선정에서는 호흡도 못 느껴요. 호흡이 사라지는 게 사선정의 특징입니다. 호흡이 느껴지고하면 아직 사선정엔 안간 거에요. 참나가 더 강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그래서 일선정은요, 참나를 찾아낸 거고요. 2선정, 3선정은 참나만 보고 있는 비율이 점점 커지는 겁니다. 4선정 땐 참나만 보여요. 그다음에 멸진정은 생각을 일으킬 수조차 없는 상태에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참나가 보인다라는 건 똑같기 때문에 잠이라는 건 전혀 다릅니다. 참나만 보고 있는 상태인거 뿐이에요. ~ 그때 그럼 견성을 이렇게 두 개 다해야 되요. 보십시오. 견성이 늘 이루어져야 된다.

 

시간적으로 늘 이루어져야 된다고 하면요, 뭐냐 하면 생각감정 오감 속에서 견성, 참나를 볼 수 있어야 되요. 왜냐? 우리는 생각감정오감이 아예 없이는 못사니까요. 생각감정이 일시적으로 없는 그런 멸진정을 체험한다고 해도 멸진정 외에 우리 생각감정을 일으키고 살아야 할 시간이 더 많을 겁니다. 분명히. 그렇죠? 그러니까 이런 지속성, 견성의 지속성을 얘기할 때는요, 생각감정이 있건 없건 참나를 볼 수 있느냐만 물어봅니다. 많은 화두들이 그걸 물어봐요. 그런데 이것만 체크해서는 안 돼요. 멸진정에 들어갈 수 있느냐도 체크해야 되요. 이게 뭐냐 하면 오메일여가 가능 하냐라고 물어보는 겁니다.

 

동정일여는요, 늘 깨어있을 수 있느냐면, 오메일여는 깊은 잠속에서도 네가 있을 수 있느냐? 이건 멸진정을 물어보는 겁니다. 생각감정오감 다 띄고도 너 있을 수 있느냐? 깊이의 문제에요. 지속성의 문제와 얼마나 깊이 들어가냐. 요 두 가지를 다 체크해야 견성이 원만해집니다. 그러니까 참나를 늘 찾을 수도 있어야 되고, 참나만 볼 수도 있어야 되요. 이해되시죠? 지도심요장에서 얘기하는 이 견성은요, 아주 깊은 참나, 참나가 생각감정오감을 일체 초월해있다는 그거를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려면 그걸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생각도 오감을 다 내려놔야 겠죠. 무지의 구름에 들어가야 됩니다. 즉 그 얘기를 하는 겁니다. 보십시오.

 

至道深窈지도심요_지극한 도는 깊고 그윽하니 不在其他부재기타_다른 곳에 있지를 않다. 그러면 어디 있느냐? 보십시오. 爾旣欲聞이기욕문_그대가 이미 귀로 듣기를 원했다. 도를. 그런데 無聞者是무문자시_들리지 않는 것이 옳은 것이다. 참나가 왜 들리겠냐? 이 얘기입니다. 그렇죠? 여기서는 그 포인트가 들리지 않는 귀로 들을 수 없는 그 자리가 도다 라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 자리도 아셔야 되요.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아야 참도다. 無聞無見무문무견 卽是眞道즉시진도. 참도는요, 오감을 초월해있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초월을 강조하는 지금 설명법이에요. 일상 안에서 참나가 늘 보고 듣는 것도 도다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실제로는.

 

그러니까 지금 지도심요장은 지극한 도는 생각감정오감을 다 초월해 존재한다는 걸 강조하는 장입니다. 3절가죠. 聞見亦泯문견역민_보고 듣는 것이 역시 사라진다면 보고 듣는 게 모두 사라지고 나면 惟爾而已유이이이_그대에요. 그대만 있을 뿐이다. 오직 그대만 있을 거다. , 오감이 다 사라지고 나면 나만 존재하겠죠. 그렇죠? 참나입니다. 나만 존재하는 겁니다. 하지만 尙爾非有상이비유_그대 또한 오히려 존재 하지 않는데 하물며 도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 상태가 되면요. 보고듣고를 다 내려놓으면 나만 존재, 나의 존재만 남는데요, 그런데 그때는 나만 나오면요, 나라고 할 게 없어지죠. 왜냐하면 구별이 돼야 나지.

 

나의 존재는 느껴지지만, 존재만 하지 나니, 너니하는 말이 없어집니다. 그땐 무슨 도를 듣겠다는 게 있겠습니까? 아무것도 없겠죠. 그 상태가 진도라는 겁니다. 보고 들을게 없어져서 나의 존재는 있지만 오직 그대만 있겠지만, 그대라고 할 것도 없어진 상태. 그런데 도를 듣겠다는 생각도 없어지겠죠. 4절요. 들리지 않는데 듣고자한다면 어떠한 도를 얘기할 수 있겠는가? 들을 수 없는 자리인데 만약에 그대들이 여전히 도를 듣고 싶다고 말한다면 무슨 도를 얘기하겠냐? 거기다가. 이제. 그렇게 얘기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라는 겁니다. 오직 모를 뿐이다. 무지의 구름에 들어가야만 신을 만날 수 있다. 지금 같은 얘기죠.

 

옥추보경에서도요, 결국은 지금 가장 심법이라고 얘기하는 게 이겁니다. 지극한 도는 보고 들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결국 보고 듣는 걸 내려놓고 나면 그대의 존재만 남을 거고, 결국 그대의 존재라고 말 할 수도 없고, 그냥 존재라고 밖에 말할 수 없을 거다. 그럼 그때 이미 도죠. 존재한다라고 하면 우주의 존재 그러면요. 보십시오. 존재라는 이름은 신의 다른 이름이에요. 존재라고만 한다면요. A라는 존재, B라는 존재. 이렇게 하면 개별자가 되지만, 존재 그 자체는 신입니다. 생명 그러면 신이에요. 이미. 그런데 어떤 구체적인 어떤 특정 시공간에 나타난 생명을 우리가 개별자라고 부르는 거죠. 생명 그 자체는 신이에요. 존재이니 생명이니 하는 거.

 

그래서 서양철학에서도 아주 오래된 그 진리지만, 존재하는 건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할 때 이 존재는 신이에요. 존재해 온 놈은요. 영원히 존재할거고요. 애초에 없었던 놈은 생겨날 리가 없다는 겁니다. , 우리가 지금 존재하죠. 존재라는 게 있기 때문에 그래요. 우주에. 우리는 그 존재의 변형들이에요. 그래서 사실 다르게 얘기하면 어떤 한 생명의 변형들입니다. 여러 모습으로. 특정 시공간에서. 하지만, 우리 모두를 다 포함해서요, 생명 그 자체는 그냥 신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신인 이유고요. 동물식물도 사실은 신이에요.

 

생명이라고 하는 거 자체가 신이기 때문에요. . 이해되십니까? 그걸 시공간 안에서 쪼개지 않으면요, 그냥 그건 하나라는 겁니다. 제가 잘 드는 비유지만, 이런 컵에 대기가 하나의 신이라면 요 컵에 담긴 이 공기는요, 개별자처럼 보이지만, 사실 열어보면 하나라는 겁니다. 식물 안에 담긴 생명이든, 동물 안에 담긴 생명이든, 인간 안에 담긴 생명이든, 컵의 질이 다르기 때문에 부리는 작용이 틀려요. 식물은요, 주변을 자각할 수는 있어요. 동물은요? 움직이면서 훨씬 더 많은 기능을 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수행해 냅니다. 인간은요? 이제 말도 하고, 이성적인 표현까지 해내요. 동작도요, 동물보다 이제 더 어떤 계산적인 동작을 해요. 이성적인 동작을 해요.

 

하지만, 기본적으로 신이라는 측면은 똑같아요. 존재라든가 생명이라는 측면에선. 뭐죠? ~ 횟집 지나다보면 생선 개불 움직이는 거 있죠. 식물이냐? 동물이냐? 싶은 그 존재가 꿈틀 거리는 것도요. 의식이 있으니까 꿈틀거리죠. 생명이 있으니까. 고 생명이나 우리 생명이나 공통의 생명이라는 걸 찾으면 신이 뭔지를 아실 겁니다. 내가 개불로 한번 존재해보시는 것도 명상법이 될거에요. 식물로 존재해보는 것도요. 존재는 하시죠? 그럼 아까 그 상태입니다. 보고 듣는 게 떨어져나가고 존재만 남아요. 그러면 그게 우주의 가장 베이스가 되는 기본의 신입니다. 그 안에는 엄청난 정보를 갖고 있지만, 존재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그 자리. 그게 시공간에 나타나면 개불도 되고 식물도 되고, 인간도 되고 동물도 되고 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모른다고 하는 게 결국 신과 만남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나의 모든 걸 모른다고 해도요. 생각감정오감밖에 내려놓을 수가 없어요. 존재는 내려놓을 수가 없어요. 존재는 존재하기를 멈춘적이 절대 없으니까요. 즉 우리가 모든 걸 내려놔도 존재는 남습니다. 즉 그래서 모른다고만 하면 신과 하나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요. 안다고 하면 시끄러워져요. 내가 아는 작은, 저의 시공간 안에서 경험된, 특정된 어떤 경험이 자꾸 나오거든요. 특정된 선입견이나. 그래서 안다라고 하면 멀어지고요. 모른다고 하면 신과 하나가 될 수밖에 없는 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존재는 모른다고 할 수가 없거든요.

 

내가 모른다고 존재하더라도 존재는 있거든요. 그러면 그게 신입니다. 그래서 그 원리를 얘기하는 겁니다. 여기까지 옥추보경 두 장이었습니다. 다음시간에는 나머지 옥추보경 두 장을 마저 하겠습니다. .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