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윤홍식_즉문즉설

41. 윤홍식의 즉문즉설 - 성선설과 성악설

Buddhastudy 2013. 6. 16. 18:02

출처 : 홍익학당

 

선악 나오면 좀 헷갈리시죠? 이것도 한번 이번기회에 정리를 해 보십시오. ~ 선이니 악이니 하는 건 이원성의 세계죠. 선악은 에고에만 있을 거라는 거 아시겠죠? 선악은 에고한테만 있어요. 이원성의 세계에서. 선은요, 뭔가요? 악은 뭔가요? 초기 불교이래에 모든 종교가 불교 떠나서 모든 종교가 선은 뭐라고 하나요?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는 거, 악은요, 모든 사람을 불행에 빠뜨리는 거, 고통을 주는 거, 마이너스 감정을 일을 키는 거, 플러스 감정을 일으키는 거, ~ 그런데 나만 +고 남들이 괴로우면요, 결과적으로 나도 괴로워지기 때문에 이건 악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렇죠? 선악. 그런데 참나는 선악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선악은 없어요.

 

그러면 참나는 광명하다고 하면 좀 좋은 쪽으로 분명히 선적으로 얘기하고 있는 거 같은데 선악이 없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받아들이나? 참나 뜻에 맞는 게 선, 참나 뜻을 어기는 게 악입니다. 이해되세요? 그러니까 참나는 선하다고 말할 수가 있죠. 에고입장에서는요, 이해되세요? 참나는요, 참나에서는 나와 남이 없죠. 그럼 사랑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사랑이니 뭐니 하는 게 없겠죠. 참나 자리에서는. 나오면 사랑은요, 참나 뜻에 맞고. 그렇죠. 증오는 참나 뜻에 안 맞겠죠. 왜냐하면 여기선 나와 남이 없었는데, 나와 남이 생기고 나니까 나와 남간에 하나가 되려고 하면 참나 뜻을 따르는 거고 현상계에서.

 

증오는 남을 거부하고 남을 죽이려는 마음이 생기면 참나 뜻하고 안 맞겠죠. . 이러니까 이런 식으로 보셔야 됩니다. 맹자가 성선설, 본성은 선하다할 때 사실은 선악이 없지만, 왜 선하다고 했을까요? . 에고의 입장에선 선하다고 하는 게 본성이 원하는 거니까요. 이렇게 해서 결과적으론 과거 七佛通戒칠불통계. 본성은 선악이 없는, 열반일 뿐이다. 번뇌가 없는 탐진치가 없는 자리라고 선언하셨던 부처님께서 석가모니께서 법구경에서 결국 과거의 일곱 부처가 공통으로 설한 건 뭐냐 했을 땐 뭐라고 했나요? 諸善奉行제선봉행. 일체의 선은 다해라. 諸惡幕作제악막자. 일체의 악은 절대하지마라. 요게 다 이해되셔야 됩니다. 회통적으로.

 

선악이 본래 없지만, 여러분은 선을 하셔야 되요. 그러니까 보살도의 극치는 뭘까요? 선악이 본래 없다는 걸 아시면서도 늘 선을 하시는 존재가 보살입니다. 말이 오묘하지만, 맞죠. 제가 예전에 어디 잡지에 인터뷰할 때 제가 그랬어요. 더 닦을게 없지만, 매순간 진화한다. 이게 제 삶의 모토다라고 난 이 길을 갈거다. 이게 보살도거든요. 참나자리에선 닦을게 없지만, 보신자리서는요, 끝없이 매순간 우리는 육바라밀을 더 잘하려고 진화해요. 어저께까지 육바라밀 대게 잘했어요. 오늘 안 해도 되나요? 그게 없어요. 보신의 세계는. 인과응보의 세계는요, 절대 여러분한테 영원히 굴러가는 자리지 휴식이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잘해놨어요. 시간이 흘렀어요. 재행무상이니까 다시 또 해야 되요. 여러분이. 이거 울컥하시면 보살이 아니에요. 울컥하실 때 이것도 본래 청정하다 하고 또 하실 수 있는 그런 무서운 분들이에요. 보살은요, 니체가 짜라투스트라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진정한 초인이란 진짜 이 힘든 고행, 번뇌로서의 삶을 한 번 더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거는 너무 지금 좀 자기적이고요, 보살에는 그런 단순히 그런 한 번 더 그냥, ~ 나 이런 고통 괜찮아. 좀 변태 같은 느낌도 있잖아요. 나 대게 괜찮았어. 이번엔. 힘들었는데.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겁니다. 청정한 입장에서 우주가 본래 청정하니. 내가 이 우주를 조금이라도 더 모두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 나는 다시 한 번 더하겠다는 마음이 있으면 보살이에요. 초인하고 좀 다릅니다.

 

초인만 해도 대단합니다. 그런 고통 모두 다 나름 긍정적으로 보고 한 번 더 라고 할 수 있는 그 마음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 우주를 더 이롭게 하기 위해서 나를 더 성숙시키기 위해서 이 길을 가겠다하는 그런 큰 뜻을 품으신 게 보살이다. 이렇게 보시고. 선악은 분명히 하셔야 되요. 그러니까 제가 제일 안타까운 게요, 대게 이런 지도하실 자리에 있는 분들이 설법할 때 이래버립니다. 선악이 본래 없다. 이렇게 끝내버리면 큰일 나요. 그러면요, 그 자리에서 우리가 막대 먹은 짓을 해도 그럼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걸? 선악은 칼 같아요. 대승기신론 어디를 보세요. 선악은 칼같다고 되어있어요. 화엄경에도 일지보살이 해야 될게.

 

해서 될 짓이 해서 안 될 짓을 분명히 구분하는 지혜가 생긴다고 되어있어요. 선악 가르는 게 반야바라밀에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옳은지 그른지 아는 거. 지금 법공이 옳은지 그른지 아는 것도 여러분 지혜고요. 이 행위가 선인지 악인지 남들한테 이로울지 해로울지도 모르면서 움직이는 분이 어떻게. 나는 멍 때리면서 살아가시면 제일 도인이겠네요. 그렇죠? 그러니까 선악은 엄정하게 하지만, 참나자리엔 선악이 없다는 걸 반드시 아시고요. 이원성을 초월한 세계이기 때문에. 그래서 참나의 마음으로 살아가시면 그게 선이라는 것도 아셔야 되요. 현상계에선 그걸 선이라고 한다.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