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윤홍식_즉문즉설

43. 윤홍식의 즉문즉설 - 참나에는 개체성이 있나요

Buddhastudy 2013. 6. 16. 18:06

출처 : 홍익학당

  

지금 그림 활용하니까 좋으네요. 참나는 어떤가요? 개체성이 있나요? 없나요? 참나엔 없습니다. 여기에는요? 있어요. 참나를 느끼는, 느끼는 거같이 같이 있을 때는 개체성이 있습니다. ~ 그런데 애매하시죠. 여러분이 사선정 멸진정 진짜 상승멸정이라고 하죠. 멸진정은. 생각과 느낌이 다 사라집니다. 여러분이 에고를 넘어서서 여기 들어가 계시면 여기는요, 에고이면서도 에고가 아니에요. 참나랑 너무 가까이 있잖아요. 그렇죠? ~ 그러니까 여기에는 뭐가 없을까요? 들어가시면 생각, 느낌이 사라져요. 상수멸정을 우리가 멸진정이라고 합니다. 생각과 감정이 지금 없어져요.

 

~ 그런데 이놈은 없어졌나요? 아뢰야식은 안 없어져요. 거기 있다가 다시 한 생각이 일어나면 다시 에고로 나오겠죠. ~ 참나만 있다면 여러분 다시 못 살아나옵니다. 참나랑 완전히 하나가 됐다는 건 이 우주에 없어요. 참나로만 존재한다는 것, 그러니까 하나가 되어 다시는 에고가 안 일어난다는 게 없어요. 이걸 열반이라고 상정하고 모든 힌두문화에서는 이걸 추구합니다. 힌두문화에서는 이걸 없애려는 게 목적이에요. 요놈 때문에 자꾸 살아 나와요. 그렇죠? 업보를 저장하고 있는 저 자리 때문에 아뢰야식 때문에 계속 다시 우린 살아나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멸진정에 들어가셔도 다시 개체성이 살아나요. 멸진정의 업보가 있다 보니까. 그래서 이 업보를 저장한 이 아뢰야식에 해당되는 자리를 날려버리는 게 힌두교 모든 수행의 목적이고 불교에서도 초기불교, 소승불교에서는 이게 목적입니다. 그래서 열반에 든다. 꼭 이걸 아뢰야식이라고 부르진 않았지만, 이 자리를 없애는 게 목적이에요.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에 이 자리가 살아있죠.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에 초기불교에서는 열반이라고 하고 힌두교에서는 참나라고 아트만이라고 하지만 여기에 아무리 합일이 되도 살아서는 뭐라고 하나요? 힌두교에서는 생존해탈자라고 하지 아직 궁극의 해탈자라고는 안 해요.

 

초기 불교에서는요? 유여열반, 아직 남은 게 있다. 아직 에고가 돌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여기까지 날려버릴 때 무여열반, 힌두교에서도 완벽한 니르바나, 사후해탈. 그래서 완벽한 해탈에 들어가려면 여러분은 이거까지 날리셔야 되요. Yogasūtra요가수트라 같은 거 제가 나중에 강의 해 드릴 텐데. Yogasūtra요가수트라보면 마지막에 이거 없애는 게 주 임무입니다. 요놈이 살아나면 참나가 이미 개체성은 있거든요. 개체성을 갖게 되면 여기를 나라고 생각하면서 나라고 분별을 하드라는 겁니다. 내 업보니까요. 내가 지은 거 내 업보잖아요.

 

이런 식으로 자꾸 살아나오니까 요걸 없애 버리겠다 하는 게, 완벽한 내 개체성을 없애버리겠다는 게 인도식 수행인데 여러분 개체성을 없애려고 수행하세요? 개체성이 왜 생겼을까요? 없어질 거면 안 나왔겠죠. 참나에는 무한한 공덕이 들어있기 때문에 무진장 공덕이 들어있다고 하죠. 이걸 펼치려면 이 현상계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자꾸 나오는 겁니다. 아까 법신에서 보신에서 화신이 펼쳐지는 겁니다. 하나도 차별을 하지마세요. 오온이 공하다는 게 공에서 오온이 나오고. 보십시오. 이 과정을 뭐라고 설명했습니까? 반야심경에서? 공이 색이요, 색이 공이다. 색즉시공. 색은 본래 공이고 여기까지만 아시면 안 돼요. 공은 색이다.

 

반드시 자~ 그때 색만 얘기한 게 아닙니다. 반야심경 보세요. 그다음에 수를 가지고 얘기하고, 그다음에 생각을 가지고 얘기하고, 그다음에 행위라는 의지를 가지고 얘기하고, 그 다음에 식별능력. 이렇다 저렇다 판단하는 것까지 다 뭐라고 했습니까?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역부여시. 이것도 똑같다. 설명 더 안하겠다. 그러면 자~ 설명을 더 해보면 어떻게 될까요? 수즉시공 공즉시수, 상즉시공 공즉시상, 행즉시공 공즉시행, 식즉시공 공즉시식. 이게 여기까지가 나와야 반야심경 원문에 맞죠. 거기는 생략해 버립니다. 역부여시. 또한. _다시, 뭐죠? 여시_앞에 거랑 같다. ~ 어떻게 됩니까?

 

색수상행식. 여러분이 없애실 수 있겠어요? 이게 대승의 깨달음입니다. 법공. 반야심경이 대승선언이에요. 소승식 힌두교식으로는 가지 않겠다. 될 수도 없다. 그 사람들의 희망사항이었지 공으로 들어가고 끝난다는 건 우주에 없다. 이게 놀랍도록 우리나라 천부경의 사상이랑 같다는 겁니다. 무에서 1이 나왔지만 1은 무로 돌아가지 않아요. 1로 돌아가지. 계속 해서 만학만래. 천부경에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만 번 오고 만 번 가면서. 뭐죠? 用變不動本용변부동본_작용은 계속 변하지만 본체는 변하지 않는다. 즉 내 안에 변화하지 않는 중심이 있다는 걸 알고 끝없이 중생들이랑 울고 웃으면서 살아가자는 게 대승사상이고 우리 천부경사상이에요.

 

천부경 사상을 대승에서 뭐라고 합니까? 그런 내용은 無住涅槃무주열반사상. 이걸 지금 무주열반이라고 합니다. ~ 이게 소승열반이랑 어떻게 다른지 보세요. 소승불교는 들어가서 여기까지 없애버리면 아뢰야식까지 날려버리면 열반에 들어 간다가 됩니다. 우주에서 완벽히 자취를 감춘다. 그런데 대승에서는 그거는 자아의 소멸일 뿐이고, 설사 된다고 해도 사실상 되지도 않는다. 공에서 색수상행식은 나오게 되어있기 때문에. 원래 청정하기 때문에 번뇌가 곧 보리이기 때문에 보리가 있다면 번뇌도 있다라는 입장인 겁니다. 대승은. 그러니까 무주열반, 이미 넌 열반이라는 겁니다.

 

참나 없는 사람 없고, 열반 없는 사람 없으니까 내가 참나인 줄 알고 사시는 분, 사실 모르고 살아도 이미 열반이지만, 알고 사시는 분은 세속에서 구른들 어디 가서 덕을 베푼들 이미 열반 속에 있다라는 게 무주열반 사상이고 이게 보살도의 기본철학입니다. 보살은 윤회를 미워하지 않는다. 이유가 윤회도 청정하기 때문에. 요 관점을 이해 못하시면 절대 이해 못합니다. 이게 지금 약하니까 마지막가면 다시 꼭 성불하고 끝나야 된다. 열반에 들고 끝나야 된다는 사상이 자꾸 올라오는 이유가 그 힌두교 문화, 초기불교 문화를 자꾸 거기랑 합치려다가 나옵니다. 거기랑 자꾸 타협을 하다보니까 이게 대승의 핵심적인 사상입니다.

 

만약에 초기불교하신 분들이 이거는 부처님 얘기 아니다 그러면 맞아요. 아니에요. 이거는. 이거는 획기적인 사상입니다. 인류를 이게 또 다른 방식으로 이렇게 구제해주려는 아주 획기적인 방법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참나고 여러분이 사시는 곳에서 육바라밀만 펼치시면 양심 없는 분 없는데, 양심이 육바라밀인데, 양심껏 사시면 이미 여러분 보살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절에 가면 보살님이라고 하시죠. 이미 다 보살들이세요. 낮은 보살, 나는 1지 보살 아닌데. 1지 보살 아니면 어때요? 저 맨 밑바닥 보살이라도 맨 밑바닥 보살이면 보살이죠. 양심 없는 중생이 없기 때문에 여러분 다 보살이에요.

 

물론 하루 종일 한 12초 정도 보살일수도 있어요. 나머지는 악귀나찰같이 살지도 모르시지만, 그래도 1초라도 보살이 아닌 분 없을 겁니다. 아무리 싸이코패스도 자기새끼 생각하면 뭔가 올라오는 게 있어요. 보살도가 육바라밀을 자기도 모르게 하는 게 있어요. 이거를 긍정하고 딴 세상 가는 게 아니라 여기서 이미 천국이고 지금 다 보십시오. 참나 입장에서 나랑 존재하시면서 이 우주를 지금 이 방까지 확장해 보세요. 여기 다 청정하다고 느껴보세요. 어디를 가세요. 여기가 지금 천국이지. 딴 데 가고 싶으세요. 지금? 내가 정토만 가면 진짜 잘 살 텐데. 이 생각나면 이게 이상한 생각입니다. 이것도 물론 청정하지만.

 

이게 지금 제 논리가 금강경 논리에요. 그것도 청정하다. 괴롭다도 청정하다. 번뇌도 청정하다. 다 청정하다. 그런데 그 안에서 더 재미있게 해 볼 수 있다. 그럼 이미 여기서 내가 절대 긍정을 하신분만이 이미 여기서 행복하신분만이 부족한 게 없는 분만이 남한테 행복을 주고 이제 대 긍정의 삶을 사시는 겁니다. 이게 진짜 대승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거는 저는 어~ 너 불교 아니다라고 하셔도 좋고 다 좋은데, 대승철학만은 제가 그 길을 가려고 하는 그 철학이기 때문에 대승철학만은 깊이 제가 말씀드립니다. 대승철학의 진수가 지금 대승경전 봐도 가려진 게 많아요. 소승경전이랑 타협하는 게 많아요.

 

왜냐하면 석가모니 부처님을 존중하다 보니까 적당한 타협을 한 게 많아요.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드셨다고 했는데 아니라고 하기 계속 이상하니까 자꾸 타협책으로 여러 가지. 대승 경전들을 보면 저는 무례한 얘기지만 난계발이 떠올라요. 대승 사상을 가르쳐주시려다가 기존 소승경전들을 조금씩. 이 경전을 쓰신 분마다 살짝살짝 자기 대승을 다 담으려다가 보니까 타협책이 여러 개 가능하죠. 열반은 주로 이건 취하고, 그렇죠? 완벽하게 한번 주장해보고, 열반을 거부해 보고, 다양한 방편이 선겁니다. 방편들이니까요. 어떻게든 대승되게 하고 끝나려고 하시다보니까 난개발이라고 그 하나하나가 잘못됐다는 게 아니라.

 

그 각자의 그 어떤 중생을 위해서 이렇게 썼는지가 다양하다보니까. 모든 중생들이 봐서 다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좀 계획된 도시처럼 선명하게 우리 눈에 보일 그런 것들이 저는 지금 불교가 복원해야 될 거는 다른 데서 시빗거리하지 마시고 참나 한테 바로 불어보시고, 육바라밀모르실분 없는데, 육바라밀을 궁극으로 실천하면 뭐가 될까? 그게 우리가 지향하는 비로자나불이라는. 이상적인 인격은요, 우리 육바라밀이 완벽하게 구현됐을 때 어떤 분이냐라고 상상하시면 되요. 내 마음에 늘 비로자나불을 품고 사시면서 닮으려고 계속 노력하시면 요거 이상이 없다는 겁니다. 다른 세계 가려고 하지 마시고.

 

부처가 돼야 내가 좀 뭘 해볼 텐데 하지 마시고. 이미 충분히 다 재료를 가지고 있고 하실 수 있다는 게 이 철학이에요. 제가 여기까지. 질문하신 분은 그냥 만족하십시오.^^ 이것도 청정하다 하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