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윤홍식_즉문즉설

42. 윤홍식의 즉문즉설 - 아집의 속성

Buddhastudy 2013. 6. 16. 18:04

출처 : 홍익학당

 

아집이요. 여러분 아집 모르시지 않죠? 나사랑. 자기애에요. 나를 너무 사랑하는 겁니다. 매사에 중심에 나를 놓고 보는 걸 아집이라고 합니다. , 아라는 거에 집착하는 거예요. 사실 여러분 참나도 난데, 참나는 아집이 없어요. 나라고 집착을 안 해요. 우주를 나로 여기니까요. 그런데 작은 나를 세워놓고 상을 아상을 세워놓고 남하고 다른 나라는 상을 세워놓고 나를 위하는 그러다보면 남한테 해를 끼칠 수도 있겠죠. 그래서 아집이 위험한 겁니다. 그런데 아집이 없을 수는 없어요. 그렇죠?

 

나라는 놈이 없는, 아무리 보살도 나라는 게 있죠. 다만 아상도 본래 청정하다는 걸 알고 살아가는분들은 아집을 부릴 때 부리고 배고프면 내배고프죠. 다 아집 아닙니까? 넓게 보면? 내 배고프지 남 배고파서 밥 먹는 거 아니거든요. 나를 위해서 살아갑니다. 보살도. 다만 남한테 해를 끼치는 일은 안 해요. 다른 아를 아주 존중해 줍니다. 그래서 아라는 걸 인정 안하시면 에고를 인정 안하시면 여러분 보살도 못합니다. “배고파요.” “배고픈 것도 상이야. 참아. 그거 다 에고야.” 이러실 겁니까? “에고야 참아.”

 

에고를 존중하는 겁니다. 보살도라는 거는. 에고를 내 에고도 존중받고 싶으면 남의 에고도 존중하면서 서로 에고를 존중하면서 합리적으로 이런 에고들 간의 관계를 정립하는 게 육바라밀이지 에고를 부정하고 육바라밀이 있지 않아요. 그거 이해하시죠. 그래서 아집은 자꾸자꾸 약화시켜서 아집은 줄여나가는 게 맞지만, ~ 이기적인 부분이 없다. 성자는 조금도 나를 생각 안한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대게 잘못이해하시는 겁니다. 그런 존재는 우주에 있을 수가 없어요. 착한 일에도 내가 기뻐서 합니다. 사실은.

 

왜 그럴까요? 착한 일은 선이죠. 나와 남 모두에게 좋은 게 선이지 나한테 해로운데 남한테만 좋은 거는요, 그건 덜 선이에요. 자연계에서 그런 거는 발견되지 않아요. 나는 해롭기만 한데 남한테 이롭기만 하는 행위를 하는 걸 우리가 선이라고 생각하시면 오해입니다. 선은요, 나도 좋고. 내가 남까지 확장된 걸 선이라고 하는 거지. 자기 사랑이 없는 분이 남을 사랑한다는 건 말이 안 되기 때문에, 내가 나를 사랑하듯이 남도 나처럼 여길 때 자비가 나오거든요. 그래서 내가 나를 희생할지라도 그거는 크게 봐서는 내 양심이 좋기 때문에 그걸 하는 겁니다.

 

나한테 전혀 공감도 안 되고 좋지 않은데 내가 남을 위해서 그냥 한다. 이거는요, ~ 이거는 어려서부터 쇠뇌당해서 움직이는 겁니다. 그렇게 살아야 선이라고 고정관념을 가지고. 이거는 무지입니다. 무지와 아집을 잘 이해해보세요. 아집은 나를 사랑하는 마음인데,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근원적으로 중생성이 있는 동안이 있어요. 보살은 중생 성을 안 버리는 존재죠. 아집도 써요. 보살은 아집도 써요. 중생성은 무지죠. 무지도 써요. 왜냐?

 

그 안에서 계속 닦아가야 되니까. 하나라도 더 알아가면서 닦아가는 게 보살이니까. 보살이라고 무지아집이 없는 게 아니고, 무지아집이 진리를 가릴 정도로 중생과 나 사이에 훼방 놓을 정도로 허용하지 않는 단계로 계속 닦아가는 거. 끝없이 닦아 가셔야 돼요. 닦아간다는 건 무지랑 아집이 있다는 얘긴데, 그게 문제가 안 되게 될 정도로, 7지 보살이상은 아집이 떨어졌다고 하는 게, 그분이 아집이 없는 게 아니에요. 즉 그분은요, 아집을 아무리 그분이 아집을 부려도 남한테 육바라밀을 못할 정도로 그 아집이 나오지를 않아요. 이해되세요?

 

그렇게 사실 수 있어요.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욕심과 양심을 할 때 양심은 지금 육바라밀이라고 보세요. 욕심은 우리 에고의 마음이죠. ~ 양심 없는 사회는 없어요. 욕심 없는 사회도 없고 둘 다 있어요. 모든 사회는. 왜 같이 필요로 하는지 한번 보세요. 욕심은 다 나만 생각하죠. . . 그럼 나랑 나 이익 간에 분명이 투쟁이 나겠죠. 양심이 해결합니다. 양심은 사실 욕심에 합리적 조정자라고 보시면 되요. 그래서 육바라밀 잘하신다는 분은 남의 에고를 무시하는 분이 아니라 욕심을 덜 부리게 해서 서로 간에 서로 오히려 욕심을 충족시켜 주는 겁니다.

 

서로 두루 욕망을 충족시켜주면서 어디든 가든 거기서 사람들이 원하는 각각 그 아집들이 부리는 욕심들을 금방 이해하고 그 욕심들이 서로 간에 제일 윈윈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분이 보살이죠. 그런데 에고를 부정하는 보살이 거기 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당신들 다 문제야. 다 에고의 추태야. 욕을 하면 그쪽이 아주 싫어라 하겠죠. 분쟁이 더 악화되지 해결이 안 됩니다. 에고를 섬세하게 존중할 줄 알아야 중생 근기에 맞게 답을 준다는 그게 가능해요. 이게 아라한들이 예전에 안 돼요. 석가모니가 되니까. 그거는 18불공법이라고 석가모니나 가능하고 아라한들은 못하는 것 중에 그게 있어요.

 

중생 근기를 파악해가지고 적절하게 대처하는. 요게 그렇게 어려운겁니다. 화엄경에서도 9지 보살가야 이게 극치에 이르러요. 파악하고 이해하는 게. 그전에는 아무래도 부족하다는. 아집 때문에요. 내 사랑이 너무 크다보니까 남의 마음이 잘 안 읽히다가 나의 사랑이 조금씩 조금씩 옅어져요. 왜냐하면 나를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나를 자꾸 확장해요. 우주적으로. 법공을 자꾸 법공이 깊어지니까 나와 남을 자꾸 확장시켜서 함께 이해하다보니까 나만을 이해한다는 게 조금씩 조금씩 옅어지다가 7지 보살이 넘어갈 때는 나라는 놈이 이제 하는데 훼방을 아나요.

 

이게 논어에 나오는 從心所欲종심소욕 不踰矩불유구입니다. 마음이 꼴리는 데로 하는데 전혀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 요 정도까지는 가야 사실은 좀 어디 가서 사람답게 살아요. 이상한 짓을 안 해요. 그 전에는 왔다 갔다 해요. 사람 마음이. 7지 보살 엄청난 경지인데 그 아래 보살들은 사실 왔다 갔다 한다는 거 아닙니까? 그게 어렵습니다. 그래서 6지 보살까지는 자기 문제가 해결이 덜 된 분. 7지부터는 남을 도와줄 수 있는 분. 이게 불경에 엄격하게 구별되어 있습니다. 6바라밀은 남 좋으라고 하는건데도요, 달라이라마나 이러 분들 강의 할 때 들어보세요.

 

제가 예전에 탄허스님 강의를 듣는데 6바라밀은 아직 자리_나 좋은 거고, 6바라밀을 넘어가야 이타가 나온다. 이런 말 하시는 이유가요, 이직 1지가 1바라밀, 2지가 2바라밀 이렇게 닦게 설명 되어 있거든요. 6바밀은 7지 아래죠. 6지 보살이 6바라밀 다 갖추어요. 그래도 사실은 내 문제 해결한거지 아직 남 도와주기에는 선명치 않다는 겁니다. 7지가면요? 6바라밀을 총 동원해서 자유자재로 쓰면서 사람들을 도와줍니다. 7지 보살까지 가셔야 됩니다. 우주여행을 우주에서 영혼을 성숙시킬 때 그 정도 되시면 더 재미있겠죠.

 

런데 지금 7지 보살 생각하면 공부 안 되세요. 이미 보살이다. 생각하시고 사셔야 됩니다. 그렇죠. 더 닦을게 없다는 마음도 아시고. 나 아직 있는 양심도 다 못쓰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내 마음에 이미 드러난 6바라밀 다 못쓰고 사시잖아요. 그걸 잘 쓰시면 그 다음이 보여요. 그걸 또 쓰시면 그다음에 또 나와요. 계속 계속 솟구치면서 여러분을 통해서. 이렇게 상상하셔야 되요. 화엄경은 이런 식으로 묘사합니다. 비로자나불이 여러분을 통해서 여러분의 에고를 통해서 6바라밀의 모습으로 지금 우주의 자신의 존재를 드러냅니다.

 

여러분이 비로자불의 채널이 되어야 되요. 대기인이. 불자라고 합니다. 부처의 자식. 부처의 분신이 되셔야 되요. 내가 불자다 그러면요, 비로자나불을 내가 여기 있는 곳에서 대행해야 되요. 자식한테 비로자불이 되어야 되고, 남편한테도 비로자나불이 되어야 되고. 그렇죠? 와이프한테도 비로자나불이 되어야 되요. 이렇게도 얘기할 수 있겠죠. 예예. 여기까지 멈출게요. 말로하면 끝이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