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윤홍식_즉문즉설

48. 윤홍식의 즉문즉설 - 신과 법

Buddhastudy 2013. 6. 30. 21:29

출처 : 홍익학당

 

또 궁금하신 거 있으십니까? 시간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하시다가 궁금하신 거.

. 법이랑, 하나님? 하나님이랑 법이랑요, 같이 쓸 수도 있고요, 하나님이 법이니까. 어떻게 할 땐 하나님의 뜻이 법이니까 좀 다르게 쓸 때도 있고요. 그죠? 하나님이 법을 세웠다. 하나님과 법이 좀 갈라지겠죠. 그런데 하나님 자체가 사실은 법이죠? 하나님이 우** 법이니까 그대로. 그래서 우주법계 그러면 법신, 진리 그러면 그대로 진리가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고, 의미하는 게 진리가 그대로 신을 의미할 때도 있고. 그래서 좀 분간해 봐야 되는데. 엄밀히 말하면 좀 다르죠.

 

법은 하나님이 갖고 있는 질서고, 뜻이고, 신 자체는 하나님이고요. 그러니까 조선시대 와서 유학에서도 이게 두 패가 갈려요. 性則理성즉리파랑 心卽理심즉리파가 갈리거든요. 그게 그거에요. 우리 마음에 새겨진 본성, 본성이 원리라는 뜻이에요. 원리. 그 본성만 원리라는 파랑, 성리학이랑. 왕양명은 심리학은. 주자 성리학은 우리 마음에 새겨진 인의예지라는 법. 그 진리가 그게 우리 본성이 그게 진리라는 우리의 본성이죠. 인의예지라는 프로그램이 진리라는 입장이구요. 왕양명은 달라요. 마음이 그대로 진리다. 우리의 양심이 그대로 진리다. 고로 비슷하죠. 그러니까 신하고 법을 신이 그대로 법이라고 주장하면 왕양명이고요, 신 안에 있는 그 법만 진리다. 신의 속성만 법이다. 이렇게 주장하면 성리학파에요.

 

그래서 둘이가 미묘하게 다른데 사실은 똑같은 얘기에요. 양심 놓고 보면 양심이 하자는 게 법이고, 양심 그대로가 이미 법이면, 양심 자체가 이미 법이죠. 그래서 이렇게 두 파가 다른 거 같은데 또 하나라서 율곡 만해도 외주내강이라고 불러요. 겉은 주자학자인데, 속은 양명학자다. 속으로는 자꾸 본심을 찾으니까 사실은 둘이 아니라서 일어나는 일이에요. 미묘한 개념차이로 어떻게 그어가지고 재단합니까? 우리 마음이라는 게 마음 느껴서, 내 양심 가는 데로 하면 그게 법이 되어버리고. 뭐 이런 느낌으로 접근하시면 될 거 같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다릅니다. 그죠? 하나님의 법과 하나님은 다르겠죠. 다시 찾아봐서, 기억에 그대로 읽어 드릴게요. 제일 많이 보는 거죠. .

 

[여호와 하나님이요,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있어 우리중 하나와 같이 되었으니,”] 사람이 지금 선악을 우리 하느님들같이 알게 됐다는 겁니다. 좋은 일이죠. 사실은.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의 나무 실과도 따먹고.] 선악의 나무를 따 먹어서 선악을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럼 그다음 공부단계가 이제 영생이거든요. [생명의 실과를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려 보내고 아담과 이브를 쫓아내고 토지를 갖게 하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서] 화염검이 도는 어떤 장치를 두어 가지고 [생명의 나무에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사람이 생명의 나무까지 먹을까봐 놀래가지고 불 바퀴 도는 이런 걸로 지키게 했다는 겁니다. 여기 구약에 써진 그대로입니다. 여기 수메르 신화에 그대로 있어요. 재미있는 건, 또 다양한 스토리로요. 편집본이라서 이렇게 있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지금 선악과가 단순히 분별심일까요? 하나님이 **인데요. 생명의 영생까지 얻으면 어떻게 하냐고. 그러니까 여기에 여러 이야기가 엮이다가 보니 이런 이야기가 나온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원형을 해석하기 상당히 어려운 글들이에요. 이걸 단순히 해석해서 스님들이 쉽게 해석해가지고 선악과 따먹고 분별심 생겼다. 선악과 분별심 내려놓으면 도다.

 

이렇게 쉽게 얘기하시는데, 결국 그 분별심도 한 단계 더 높은, 분별심을 갖게 됐다는 게 단순히 저주다. 이렇게 지도하면 안 됩니다. 오묘한 얘기에요. 이게 쉽게 풀 수 있는 길이 아니에요. 여러 스토리가 신화가 엮어서 나온 거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