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윤홍식_즉문즉설

49. 윤홍식의 견성요결 - 아라한

Buddhastudy 2013. 6. 30. 21:31

출처 : 홍익학당

 

참나 상태에 대해서 판타지들이 많으세요. 참선 오래 하신 어르신들도 전화오세요. 제 강의 듣고 참나를 알았데요. 계속 하시던 거에요. 제가 하던 거 였다고. 큰 스님한테 배우시는 분들이 몰래 외유하고 계시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제거를 보고 해보신다고 그래서. 제걸 보고는 큰 스님은 늘 일념을 지키라고 했는데, 뭔지 모르고 계속 참선을 하셨는데요, 화두선을 자기가 계속 일념에 들었었다는 것을 알았다는 거죠. 제 강의 듣고. 그러니까 이게 다 하시는 거고, 하다못해 지금 뭐죠? 일반 그냥 요가원이든 뭐든 좋아요. 명상 관련된 모든 걸 하신 분들은 사실은 명상하는 동안 참나를 만나요. 그런데 문제는 지도하시는 분이 그걸 정확히 설명을 못해준다는 게 문제입니다.

 

계속 만나고 계시는데도 나는 언제 참나를 만나나?” 늘 이런 상태로 명상을 하시니까. 해도 해도 끝이 없죠. 왜냐하면 환상을 가지신 게 저한테 전화했던 분도 큰스님이 일념을 찾으라고 했다고 일념을 찾으셨는데, 사실 자기가 일념에 들으신 것도 모르고 찾으신 거니까. 사실은 일념에 대해서 환상을 가지신 거죠. 뭔가 엄청난 게 있을 것이다. 하고 명상을 하셨는데 제 설명 듣고 보니까 아~ 내가 한 게 일념이었네. 라는 걸 아신 거잖아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래서 지금 편안하신가요? . 살짝살짝. 그러니까 그 여기에도 집착하지 마시라는 겁니다. 편안함을 즐기시되, 그래야만 참나라고도 하지 마세요. 참나를 찾아보세요. 제가 편안할 때 참나라고 말씀드렸잖아요. 마음이 고요하고 편안할 때.

 

그럼 그 편안한 게 참나라면, 만약에 그럼 저랑 대화하는 중에는 또 깨질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 있겠죠. 만약에 이제 돌아가시다가 버스에서 누구랑 시비가 붙었다. 가다가. 그러면 잊어버리시잖아요. “~ 그럼 참나를 놓쳤구나.” 또 이러십니다. 처음에는 그게 맞습니다. 그런 걸 자꾸 그렇게 느끼시지만, 참나란 놈을 한번 좀 더 생각해보시면요, 좀 미리 팁을 드리는 건데, 참나라는 놈은 왔다갔다할 놈이 아닌데 사실은. 내가 만들어낸 놈도 아니고, 늘 내 안에 있는 자리인데, 우리가 또 제가 명상의 공이 있다는 걸 아는 자린데, 저랑 지금 대화하는 중에는 그 자리가 어떤 식으로 있을까요? 참나는 내가 만드는 게 아니잖아요. 원래 있는 건데, 늘 관심만 기울여 주시면.

 

태양이란 비슷해요. 아침에 일어나서 날이 환하면 우리가 태양을 안 찾습니다. 사실 하루에 태양을 안 봐요. ~ 해 떴네 알고 그냥 사는 거죠. 우리가 뭔가를 알아차리고 움직이고 있다는 건 사실 참나가 다 하는 건데, 나라는 존재가 사실은 참나라는 거는 나죠. 그냥. 나라는 순수한 나입니다. 그래서 내가 있으니까 거기다가 색칠을 해보는 거죠. 이런 생각 저런 생각도 색칠해보고, 이런 감정 저런 감정도 가져보고 다 해보는 건데요. 그런데 나라는 게 있어도 움직이는데, 그게 의심 안 해봐요. 해가 당연한 것처럼, 그냥 움직이며 사는 거예요. 그러다가 견성이라는 게 별게 아니라 태양한 번 돌아보는 게 우리가 흔히 견성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 해가 있었지? 해가 있어서 이렇게 된 거지.” 그걸 우리 마음 안에서 ~ 내가 있으니까 그래도 슬픈 일도 생기고 기쁜 일도 생기는 거지.” 이걸 나를 돌아보면서, 원래 있었는데 태양은. “~ 내가 내 안에 태양이 있지.” 하는 걸 견성 그럽니다. 그러니까 늘 원래 성은 드러나 있는데, ~ 태양이라는 걸 너무 공기가 돼서 잊고 살던 거를 소중한 줄 알고 있는 줄 아는 걸 다시 재확인 하는 거에 불과합니다. 견성이라는 거는 이제 그걸 다시는 기억에서도 잃어버리지 않을 정도로 늘 그거를 느끼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꼭 태양을 안 봐요 되요. , 해 떴으면 으음 해가 비추고 있구나 지금.” 늘 태양의 존재를 의식하면서 살아가실 수 있게 되죠. .

 

빛이 있으면 태양이 꼭 있듯이, 알아차림이 있으면 꼭 참나도 같이, 내가 하는 모든 짓에는 나라는 게 있어서 일어나고 있다는 거를 늘 느끼시면서, 지금 저랑 대화하고 제 얘기 들으시면 서도 본인이 있으시니까 지금 듣고 계시는 거잖아요. 그래서 듣는데 너무 빠지지 마시고 내가 있어서 지금 듣고 있다하는 느낌, 해가 있어서 날이 환한 거다. 하는. 이런 식으로 늘 살아가시면 꼭 하늘을 안 봐도 사실은 해를 이미 느끼고 있기 때문에, . 그러면 이게 견성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꼭 앉아가지고 나는 태양만 보고 있겠다고 하실 필요가 없다는 거죠.

 

장자불와 이런 선정에만 집착하시는 분들은 태양에서 시선을 놓치지 않겠다는 거를 이제 주로 하시는 분들입니다. 내가 절대 태양을 놓치지 않겠다. 그럼 딴 걸 못하지 않느냐? 태양은 훤히 떠가지고 우리를 비추고 따뜻하게 해주고 있는데, 그러니까 움직인다고 해서 태양보고 있는 거랑 어쩜 맛이 다르겠지만, 늘 우리는 태양 속에서 살고, 햇빛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늘 오나가나 그 내면의 고요한 자리가 있다는 거까지 의식 하실 수 있으시면요, 그러면 이제 일단 그 이런 참나 각성 쪽에서는 가장 난이도 높은 얘깁니다. 얘기한번씩 드리는 게 찾아보시라고요. 그래서 늘 참나가 내 안에 있다. 그러면 저기 초기 불교에서 아라한이라고 하는 겁니다.

 

참나라고 안 해요? 참나라고 하면 나라는 이름이 붙잖아요. 초기 불교분들은 나라고 이름을 안 쓰려고 하기 때문에 그냥 그 자리를 니르바나 그럽니다. 번뇌가 없는 자리라는 뜻이죠. 번뇌 없음이라는 뜻이에요. 그 자리만 번뇌가 없거든요. 딴 덴 다 번뇌가 있는데. 그러니까 그냥 가만히 있으면 그 자리가 있고, 오나가나 늘 그 자리가 있으면 아라한이라 그럽니다. 그러니까 가끔 태양을 가끔 본다라고 느끼는 상태에선 아라한이 못되고요. “해가 질 리가 없잖아. 태양이 사라질 리가 없잖아요. 내안에서. 그 니르바나가 사라질 이가 없잖아요. 나는 본래 니르바나의 원래의 그 위에 살고 있었잖아.” 정도 아시면 아라한 그러는데, 이거 불교얘긴데요, 그냥 재미로 들으십시오.

 

아라한에는 두 종류 아라한이 있어요. 실제로. 부처님 당시 때도 혜해탈만 한 아라한이 있고, 심해탈까지 한 아라한이 있습니다. 그래서 (갖출 구)자해서 두 개 다 하신 분을 구해탈자라 그러고, 혜해탈만 되도 아라한이 되요. 혜해탈은 선정에 못 들어요. 그런데 아라한이 되요. 사선정에 못 드는 아라한하고, 사선정 잘 드는 아라한이 있는 겁니다. 공식, 학문, 학술용어로는 (지혜 혜), 혜해탈, 참나 열반을 알고는 있다는 혜해탈하고. 심해탈_선정까지 들어가는 아라한. 그런데 그러면 이 아라한은 어떻게 아라한이 되었을까요? 선정 드는 아라한은요, 그냥 태양하고만 독대하고 있을 정도의 그런 성정능력을 갖고 있는 거죠.

 

그런데 그런 능력이 없어도 아라한이 되요. 즉 태양이라는 게 늘 비추고 있다는 걸 알아버리면 아라한이 됩니다. 그래서 사실은요, 선정에 안 들어 가셔도요, 그럼 어느 선정까진 들어가야 되냐 하면 참나를 인식할 정도 선정까지는 들어가야죠. 그러니까 우리가 일상생활 다 하면서도 참나를 느낄 정도의 선정이요. 그게 아주 낮은 선정이거든요. 그런데 그것만 들어도 아라한이 되는데, 왜냐하면, 그 느낌 아시겠죠? 에고랑 다른 거 아시죠? 에고랑 참나 확실히 다르시죠? 이걸 참나를 모른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 상태는. . 그러니까 생각감정을 안 끊어도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생각감정이 아무리 돌아다녀도 나는 그거랑 전혀 다른 차원의 알아차림이야 라는 걸 늘 아시면요, 늘 인식할 수밖에 없는 체험을 갖고 다니시면요, 그 생각감정오감이 다 사라져야만 아라한이 되는 게 아니라, 아시겠죠? 전혀 다르다는 걸 알기 때문에 정확히 알아버렸기 때문에 혜해탈이라고 하는 겁니다. 알아버렸어요. 이제 의심할 수가 없어요. 내가 참나라는 걸 알아버렸어요. 그 참나가 늘 있다는 걸 알아버렸어요. 그래서 혜해탈 그럽니다. 심해탈은 참나와 독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죠. 생각 감정 오감을 싹~ 사라지게 하고, 호흡도 사라지게 하고, 몸뚱이도 사라지게 해버리고 참나랑만 이렇게 가만히. 참나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 요 기술까지 얻은 아라한이 있고, 요거 못 얻어서도, 생각감정오감 속에 있으면서 딱~ 정확하게 구별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만 되도 아라한 쳐줍니다.

 

우리 홍익학당에서는 요 두 가지를 같이 하시는 게 좋잖아요. 3급에서 선정능력들 점검하고 우리가 1급 인정해 드립니다. 1급이 지금 초기불교 아라한 그 계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학당에서 1급 받으시려면 받으신 분들도 계시죠. 그래서 그런 분들은 본인이 참나라는 걸 이제 잊어버릴 수 없는 상태를 1급 그럽니다. 기억으로 단순히 못 잊어버리는 게 아니죠. 늘 느껴지기 때문에 못 잊어버리시는 거에요. 그러니까 꼭 깊은 삼매의 느낌이 아니라 내가 있다는, 알아차리는 자가 있다는 이 느낌이 이제 거기서 떠날 수 없는 상태. 그거를 아라한 그러고, 그게 얼마나 대단한 자리이면 부처님이 윤회를 넌 이제 초월했다고 그렇게 치하를 해 줄 정도의 경지가 된. 법신자리죠. 법신불.

 

법신불을 안 놓칠 정도가 돼야 됩니다. 첫 번째. 그래서 이게 공부의 다는 아닙니다만, 그래서 아라한이 그렇게 아라한을 쳐주니까 대승에서 아라한이면 뭐하느냐? 육바라밀이 안 나오는데. 선정바라밀밖에 안 닦지 않았느냐? 선정 바라밀하고 지혜바라밀이 뭐가 참나다. 아니다. 구분할 정도의 지혜와 선정, 그것도 선정이니까요. 낮은 선정이지만, 참나를 접속할 수 있다는 거 자체가 이미 선정이기 때문에 선정하고 지혜, 정혜쌍수 닦은 거 밖에 안 되지 않느냐? 보시 지계 인욕 이런 것들은 왜 안 닦느냐? 라고 해가지고 대승이 나왔기 때문에 이 참나 각성을 먼저 계속 누리시면서 틈나는 대로 인의예지나, 보시지계 인욕 이런 육바라밀 나머지 덕목들도 자꾸 실천하려고 깨어서요. 노력하시면, 그냥 그게 그대로 훌륭한 수행인겁니다.

 

24시간이 이어지면, 이 수행도 참나가 24시간이 있는데, 2시간 멋지게 참나랑 만나고 나머지 22시간 그냥 노실 겁니까? “아까 2시간 참나 만났으니까 나한테 뭐라고 하지마라하고 나는 오늘 할 만큼 했다.” 이렇게 말하실 겁니까?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이 사정을 이해해버리시면, 그 도를 아시는 겁니다. 종교불문하고. 이게 종교 벽이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갖고 있고, 우리 마음에 원래 있는 근원적인 힘인데, 이 힘을 기독교 쪽에서는 만나고 성령이라고 부른 거고요, 각 문화권마다 내가 아닌 힘, 신적인 힘에 대해서 그리스철학자들은 어떤 이성이라고도 부릅니다. 신의 이성.

 

내가 아니라 내 안에서 뭔가 신이 역사한다는 걸 느끼는 겁니다. 그 자리는 늘 옳은 것만 가르쳐주고, 바르게 살라고 하고, 내 안에서 늘 밝게 존재하니까 이거는 내 것이 아니다. 신의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도 성령이라고, 성스럽다 그건. 영은 영인데, 나의 그 어떤 추잡스러운 영이 아니라, 성스럽다. 요런 이름을 붙이는 거는 이름이 원래 그 자리에 이름이 없지 않습니까? 내 안에 아직 있는 밝은 자리죠. . 거긴 때가 묻을 수가 없죠. 알아차리면 때가 못 묻습니다. 거기 생각하나가 생각의 옷을 입을 입으면 이제 그게 시끄러워집니다. 뭐 이름이 생기고 뭐가 생깁니다. 사실은. 그런데 거기서 분명히 이게 같이 있지만 다르다는 걸 아실 겁니다.

 

제가 지금 이 물건을 알아차리고 있다고 치면요, 이 물건이 곧 이 물건을 알아차리는 나니까 에고죠. 이거 이해되십니까? 제가 이 물건을 알아차리고 있으면 이 물건이라는 대상이 있고, 이 물건을 보는 놈이니까 나는 난데, 이미 이 물건을 보는 나니까 제 앞에 있죠. 에고입니다. 옷을 입은 에고죠. 이 물건에 지금 제약된 에고입니다. 그런데 분명히 가까이 붙어있지만, 알아차림 자체가 있다는 것도 아실 겁니다. 이 물건과 이 물건을 보고 있는 나와 이 모든 걸 알아차리고 있는 내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알아차린 능력이 순수하게 있다는 걸 아실 겁니다.

 

순수한 알아차림 능력이 있기에 이 물건을 만났고, 이 물건과 만나면서 이 물건을 보는 나라는 제한된 옷을 입었지만, 알아차림 자체는 조금도 여기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걸 아실겁니다. 뭔 얘기냐 하면, 태양이 혼자 그냥 빛을 냈습니다. 태양은 참나라고 보시면요, 혼자 그냥 빛을 뿜어 낸 거지 지구를 비추어주려고 빛을 뿜어 낸 게 아닙니다. 그래서 순수한 알아차림과 똑같습니다. 태양이. 지구가 그 옆에 있다가 지구가 태양빛에 비추어지면요, 지구라는 대상을 비춘 태양이 되니까 태양이 제약되어 버립니다. 그러니까 알아차림의 옷을 자꾸 입게 되는데, 입어도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사실은 그 빛 자체는 순수하게 그냥 알아차리고만 있는 내 안에 존재가 있기 때문에 그 대상을 만난거기 때문에요, 이런 아무리 굴레를 씌우려고 해도 씌울 수 없는 근원적인 알아차림이 있다는 걸 늘 아실 테니까. 늘 혼돈스러운 중에도 다시 [몰라] [몰라] 하시다보면, [몰라]할 수 없는 그 자리가 나오면 거기에 또 참나자리죠. 참나에다가 [몰라]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말이 사라질 테니까. 예예. 그 알고 있는 자리가 아무튼 참나죠. 그러니까 그 헷갈리기가 좀 생각이 깊으신 분들은 헷갈려하세요. 호흡을 알아차리세요. 호흡 알아차리는 것도 에고 아닙니까? 호흡이라는 대상을 객체를 알아차리고 있는 주체가 되면, 이원성 세계에 빠지기 때문에 에고입니다. 하지만 애초에 알아차림 있으니까 호흡을 알아차리는 거잖습니까?

 

그 알아차림, 인식능력 자체는 조금도 호흡이 있건 없건 상관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요놈이 우리 안에 있는 늘 참나가 빛나고 있다. 그래서 참나 알아내는 법이요, 우린 늘 에고 속에 빠지니까. 요 물건하나를 제시하는 겁니다. 호흡이건 뭐건 한 놈만 보십시오. 라고 하면 요놈만 뚤어지 게 보고 있다 보면요, 대상이 있고 그걸 바라보는 내가 있는데, 뚜렷이 이 놈만 보라고 해서 정신을 몰입하다보면, 에고가 자꾸 한없이 약해집니다. 에고는 이 생각, 저 생각이어야 되는데 하나만 보라고 하니까 대게 에고가 순수해져 가는데, 요놈마저 탁 치워버리면, 대상이 없이 그냥 순수하게 알아차리고만 있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보통 견성을 합니다. 호흡을 보십시오. 호흡 보는 당신은 누굽니까? 깨어나 버립니다. 거기에는 이제 호흡도 없고 뭐도 없고 알아차리고 있는 거만 있거든요. 그래서 관음법문이라고 하는 것도 밖에 만약에 새가울면, 저 소리, 오토바이 소리 들어보십시오. 새소리 들어보십시오. 듣고 있는 나는 에고인데, 듣고 있는 나만 봐보십시오 하는 요넘을 놓고 이걸 치워버리면 나만 남습니다. 즉 태양이 지구를 비추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원성 세계에 있는데, 지구 치워버리면 태양혼자 빛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도 똑같습니다. 호흡을 보시건 [몰라]를 하시건 뭔가 하나를 쓰고 계실 겁니다. 쓰다가 그놈도 딱 [몰라]해버리시면, 나만 덩그러니 남습니다.

 

그런데 그 상태도 예리하게 분석해보면요, 물방울 소리를 듣고 있는 한은 물방울이 있고 내가 있죠. 그럼 이원성이 있는데, 왜 이게 별 문제가 안 되냐 하면요, 에고가 지금 약화되어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에고는 이 생각 저 생각을 해야 되는데, 한 놈만 듣게 했기 때문에 에고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지금 세력을 못부리는 아주 현저하게 약화된 상태이기 때문에 에고가 이렇게 낮아지면 뭐가 들어 나냐 하면, 참나가 드러납니다. , 알아차림이 더 강하기 때문에 그때는 거의 참나 상태 같으실 겁니다. 뭐 이렇게 전혀 에고의 반발이 없을 겁니다. 그런데 최소한 에고만 작용합니다. 지금 제 얘기 듣고 계실 때도 깨어서 들으신다면, 제 얘기 듣는 건 에고시죠. 사실은. 내가 있고 에고가 있으신 데도 그런데도 별 상관이 없으실 겁니다.

 

알아차림이 더 강하기만 하면 상관없습니다. 그러니까 알아차림이 약한 게 문제지, 에고가 없어지냐? 안 없어지냐는 문제가 안 돼요. 그러니까 에고를 다 가지고도 견성할 수 있는 겁니다. 사실은. 에고보다 더 참나가 힘을 쓸 수만 있으면. 그걸 예전에 어떤 티베트 고승이 뭐라고 비유했냐하면요, 푸른 창공의 흰 구름 하나가 지나간들 아무 의미가 없다. 그게 무슨 그 하늘을 가릴 수 있겠냐는 거죠. 알아차림이 그렇게 강하시면, 최소한의 에고가 움직이면서 오히려 삶이 더 풍요로워지죠. 삶의 경험들을 가져오게 되고 문제를 안 일으키죠. 이렇게 알아차림이 크기 때문에요, 우리 마음에서 번뇌 없는 평온한 마음이 이렇게 커져있기 때문에 소소한, 거기선 고민을 해도 크게 문제가 안 되고, 고민도 대게 지혜로 변해버립니다.

 

알아차림이 우리 마음에서 ** 제가 이거를 우리 에고는 쇠공인데 차가운, 알아차림을 뜨거운 열기에 비유 드리죠. 열기가 적으면 전체적으로 공이 찹니다. 그래서 에고의 소리가 시끄러운데 뜨겁게 달구어 버리면 조금 찬데 있어도 문제가 안 된다는 겁니다. 전체적으로 뜨겁기 때문에. 그래서 늘 지금 참나만 보시면 뜨거워지니까 지금 저랑 얘기 들으신 쪽에 마음을 더 쓰실 수도 있고요, 참나 쪽에 더 쓰실 수도 있죠. 알아차리는 자 쪽에다 관심을 더 쓸 수도 있으시죠. 이렇게 왔다갔다 하시면서 본인이 조절하면 됩니다. 100% 나는 에고를 다 없애고 참나만 존재해야 된다. 이런 생각 자체를 하실 필요가 없죠. 계속 조절해 가실 수 있습니다. 심심할 때, 아무 일이 없을 때는 참나로만 100% 참나만 하셔도 됩니다. 멸진정이라고 하는 참나만 존재하는 삼매로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꼭 그 상태만 있어야 되는 게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