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윤홍식_즉문즉설

53. 법공 法空 - 신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다_윤홍식

Buddhastudy 2013. 7. 14. 20:42

출처 : 홍익학당

 

그래서 보살도를 연구 어떻게든 하세요. 윤회를 싫어하지 마시고, 윤회는 차차하고요, 지금 이 세계. 윤회는 다음 문제는 윤회가 싫은 건 지금 이 세계가 못마땅해서가 아니십니까? 내가 사는 여기가 못마땅해서. 그 마음부터 버려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보살은 윤회를 안 미워한다는 건요, 이 사바세계를 긍정한다는 뜻이에요. 이 속세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어야 되요. 가능하시겠어요? 에고로는 안 돼요. 에고는 속세가 맘에 안 들어요. 마음에 드는 얼굴도 아니고 지금. 내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을 수도 있어요. 이게 마음대로 바뀌어야 되는데 안 바뀌잖아요. 이 놈은 물질이라. 영계면은 바뀌어 볼 수라고 있겠죠. 마음이면 바꾸지 않을까요?

 

어떤 영계 통신을 해보면요, 뭔 얘기를 하냐면, 천상에선 옷 어떻게 입나요? ~ 거기선 다르게 입는데, 지구인들 놀랠까봐 티셔츠 입고 나가요.그러니까 그 현몽할 때는 계시로 나타날 때는 지구인이 알아볼 복장을 입고 나온 데요. 왜냐? 그냥 마음의 세계라 사실은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이거 물질의 세계는 고정되어 있어서요, 이거 안 바뀌어요. 이거 쉽게 뜯어 고쳐지지가 않아요. 그럼 에고가 지금 마음에 안 들죠. 자유롭게 살던 에고가 여기 들어와가지고 지금 하나도 뜻대로 안되는 게 많아요. 가만있으면 배가 고파요. 미치겠죠. 밥먹어줘야 되요. 그럼 또 배가 고파요. 또 먹어줘야 되고.

 

밥 먹는 거 하나만 봐도 지금 괴로울 일 아닙니까? 계속 이거랑 똑같아요. 먼지 다 닦아 놓으니까 계속 유지되면 좋은데 현상계는 안 돼요. 다 변해요. 제행무상 때문에 일체개고가 일어나요. 무상하기 때문에 다 바뀌기 때문에. 그리고 그게 에고의 욕망에 충족되는 방식으로 되지를 않아요.인과공식대로 돌아가지 에고가 원하는 데로 되지는 않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에고의 욕구를 들어주려고 자꾸 그런 수행법들이 나온 겁니다. 에고가 원하면 인과를 무시하고 그대로 이루어진다. 하는 식의 그런 얄팍한 논리들이 자꾸 나오는 겁니다. 에고는 그 얘기를 듣고 싶어 해요. 누구나. 태초 이래로 인류는 그 얘기를 듣고 싶어 해요. 사냥 안 나가도 네가 마음만 고쳐먹으면 받아들이면, 멧돼지가 너희 집 앞에 와서 죽을 것이다.

 

그럼 집에 앉아서 계속 멧돼지가 저 앞에 죽는 장면을 상상하는 이런 사람이 있지 않았을까요? 한명정도는? 씨크릿의 기원입니다. 굶었겠죠. 그 가족까지도. 그 집은. 이런 식으로. ~ 아니구나. 하나님은 나한테 다른 걸 원하는구나. 내가 노력을 하고 긍정적인 마음을 먹으면 결과로 얻을 수 있구나. 이 분이 훨씬 신의 뜻대로 사는 분이에요. 이런 식으로 이 에고가 원하는 것들을요, 어떤 식으로 지혜롭게 해결 할지를 많이 인류가 그 지혜를 얻어 와서 내린 결론이 제일 그 성스러운 가르침들이 기독교나 예수님이나 지금 대승불교나 유교나 다 같잖아요. 우리나라, 우리 민족의 홍익인간 사상이나 이 현상계를 긍정하고 여기서 사랑하고 여기가 천국, 지상천국을 다 부연하려고 애써요. 성인들은.

 

지상이 그대로 극락이다지. 여기 말고 다른 극락을 찾으시면 안 돼요. 가르침이 조금씩 왜곡되는 겁니다. 에고가 여기는 못마땅하니까 다음에라도 좋은데 가자. 이런 식으론 안 돼요. 여기서 천국을 못 맡기는 분이 어떻게 천국을 갑니까? 지금 여기서 신을 그대로 느끼면 신은 신이 계신 곳이 천국이기 때문에 여기 만약에 제가 제 안에서 신을 느끼면 어떨까요? 여기가 천국이에요. 논리가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지금 참나를 신이라고 느끼시면 어떨까요? 여러분 몸뚱이가요, 그냥 몸뚱이가 아니라 신의 신전이 되요. 이 세계는요. 신이 머무는 세계에요. 이게 불교로 치면 법공사상입니다.

 

법공이랑 이거랑, 기독교로 얘기하면 더 쉬워요. 하느님 계시나요? 하느님 느껴지세요? 참나가 하느님입니다. 구약에 나오잖아요. 나는 내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지금 스스로 있는 자가 느껴지세요? 나로 존재하시는 아버지자리입니다. 지금 아버지를 느끼고 계시면 여기 천국에요. 안 기쁘세요? 기쁘셔야 되요. 안 기쁜 거는 뭣 때문에 안 기쁠까요? 에고가 자꾸 딴 생각을 하고 있어서. 지금 이대로 목소리를 낮추고 신한테 집중해 보세요. 참나자리에. 걱정이 없어지시고 편안해지시고 불교에서 말하는 상락아정이 일어나요. 생사가 걱정을 안 하시게 되고. 첫째로.

 

에고는 죽을 거 걱정을 해요. 죽게 되어 있으니까요. 죽는 걸 아는데 어떻게 걱정을 안 해요? 그런데 참나는 죽을 걱정을 안 해요. 뭘까요? 안 죽으니까요. 그러니까 에고상태에서는 아무리 걱정하셔도 답이 안 나와요. 안 죽을 도리가 없기 때문에. 참나로 존재해 보세요. 걱정이 안 일어나요. 죽는 순간에도 참나로 존재해보세요. 참나는 걱정을 아예 안하고 있거든요. 이렇게 해서 참나와 우리가 신과 함께 있으면 생사가 걱정도 안 해요. 거기 영생의 자리라 걱정을 안 해요. 그다음에 늘 지고 걱정이 없으니까 무상한 이 현상계를 내 대에서 두려워하지도 않고 걱정을 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신의 상태. 참나의 상태에서 이 세상을 느끼면, 걱정거리가 아니에요.

 

신의 피조물일 뿐이지. 신의 작용이지. 신이 세상을 두려워할 이가 없잖아요. 에고가 두려워하지. 신이 자기가 만든 세상에 대해 거부하고 두려워할까요? 신이 우주를 만들고 이러셨는데요. 구약에 보면. 보기에 좋더라고 하시는 세상이요. 이게 대승 사상이랑 똑같은 겁니다. 대승은요, 현상계를 고회로만 보는 입장. 에고의 입장에서는 고해로 보일만 해요. 그런데 참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세상이 청정하더라는 얘기를 한 겁니다.일체개공_일체가 공하더라. 하는 일체가 참나, 니르바나더라. 하는 얘기에요. 이걸 기독교식으로 하면 훨씬 쉽죠. 신과 하나가 되면, 신은요, 평화고 사랑이고, 지복인데. 이거 왜 신이 만든 세상을 거부하겠으며 왜 이거를 두려워하겠어요? 여러분이 신을 느끼는 순간 여러분의 마음은 신을 담는 그릇이 되요.

 

마음과 몸과 이 세상이 신의 소중한 창조물들이 되요. 하나하나가. 먼지 하나도. 여러분의 희로애락이 감정 하나도 다 신의 작용입니다. 신이 없이 어떻게 이게 나오겠어요? 우주의 사탄이 있다고 해서 사탄도 신의 나툼이에요. 신이 허락하지 않는데 존재할 수가 있다고요? 말도 아니죠.인간의 에고를 자극하는 존재일 뿐이지. 있다고 하더라도. 신이 그 안에 다 들어있습니다. 이 우주에서 신이 허락하지 않는 준재는 존재할 수가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이 신과 함께 깨워서 이 우주를 느껴보세요. 이거를 불교식으로 법공이라고 합니다. 일체가 니르바나더라. 예전에 인도에 바바지한테 어떤 사람이 찾아가서, 바바지라는 성자한테. 대단한 성자인데, 그 분은 보살사상을 알아요. 그러니까 경지가 높은 거죠.

 

힌두교가 보통 소승에 빠지는데 안 빠지는 양반이라. 딱 찾아가서 물어보니까 신이 도대체 왜 이 세계를 만들었을까요? 하니까 누가 신과 세계를 나누느냐? 그러고 끝이야. 나누지 마세요. 그게 법공이고, 신이고 세계고 세계가 신이다. 이 세계 하나하나가 지금 신이 작용하고 있는데 여기서 지금 이걸 거부하신다는 게 말이 되요? 이 세상은 진흙이라 더러워요. 진흙이 지금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 아세요? 진흙 하나가 존재하려면. 신이 거기 관여 안하고 진흙이 돌아간다고? 이 순간 신은 진흙 안에서 거기서 작용하고 있는데, 진흙이 싫다고요? 그렇죠. 희로애락 기쁨 분노 다 하나하나 신이 돌아가서 만들어지는 감정들입니다.

 

그 자체를 거부하시면 안 되고요. 법공은 뭘 하라고 하냐하면요, 여러분 마음 안에 있는 분노나 이 세상을 거부하지 마시고, 어떤 조건 때문에 신의 공식 때문에 이게 만들어지는지 알아서 마음에 안 드시면 다른 그 신의 공식을 활용해서 신의 작용을 바꾸세요. 원인을 달리 보시면 다른 결과가 나와요. 진흙이 싫으시면 어떻게 하면 되요? 진흙하고 싸울게 아니고, 불로 말리세요. 고실고실하게 마를 거 아닙니까? 그런데 진흙하고 싸우고 있으면 안 돼요. 이 사바세계 내가 이래서 사바세계가 난 싫다. 다 마음에 안 든다. 배고프면 먹어줘야 되고, 또 먹으면 싸야 되고, 너무 귀찮다. 깨어서 하세요. 그냥.

 

하나하나가 신성한 거구나 하고 받아들여보세요. 이게 법공이에요. 불교식으로 말하면. 하나하나.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게 신성하다는 느낌으로 접근하시면 되요. 그런데 깨어계시면 자연히 그 마음이 들걸요? 이걸 제가 억지로 하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 깨어계시면요, 참나 상태에서 우주를 봐보세요. 우주가 더러우세요? 내가 신성해 지면요, 저쪽도 신성해요. 내 마음이 심란하니까 저쪽도 심란하게 보이는 거지. 깨어서 이 세상을 긍정적으로 느끼시는 연습을 수시로 하세요. 방법 아주 쉬워요. 지금 참나 상태에서 우주를 보고 듣고 느껴보세요. [괜찮다. 몰라]로 느껴보세요. [몰라]는 나와 이 세계를 안 가릅니다. 괜찮다는 긍정적으로 모든 이 우주에 존재를 받아들여요.

 

내 생각, 감정 그리고 보고 들리는 모든 걸 다 받아들여보세요. 이러고 있는 게 최고의 명상이에요. 받아들이시고. 신의 마음으로 우주를 아껴보세요. 울컥하시면 안 됩니다. ~ 이것도 신의 작용이구나. 적이 없겠죠. 그러면. 울컥해도 괜찮아요. 울컥두요, 신의 작용입니다. 울컥도 신의 작용이니까 잘 쓰고 끝내면 그만입니다. 그러니까 존재하는 모든 건 이유가 있고, 진흙도 이유가 있고, 마른땅도 이유가 있고, 슬픔도 이유가 있고, 분노도 이유가 있어요. 이유가 있으니까 존재하겠죠. 잘 쓰시고 치우세요. 보살도는 이 모든 거를 잘 쓰고 깨끗하게 쓰고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거랑 싸우지 않고. 그래서 소승불교는 탐진치랑 싸워요. 대승불교는 탐진치를 활용해요.

 

탐욕을 활용해요. 분노를 활용해요. 어리석음을 활용해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써요. 애초에 그것들도 다 신성하다는 걸 알아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건 신성하니까. 탐욕이 일어나면 탐욕이 마음에 안 들면 탐욕을 안 일어나게 하면 그만이죠. 그런데 탐욕만 없앨 수가 있나요? 우주가? 불가능하죠. 희로애락. 기쁨은 좋은데 탐욕은 싫다면 불가능하다는 거예요. 어리석음은 싫은데 지혜는 좋다. 이게 가능할까요? 불가능해요.어리석음이 없으면 지혜도 없어요. 내가 어리석으니까 더 공부를 해서 알았다. 몰랐다가 있는데 알았다가 어떻게 있습니까? 보살도는 이 모든 현상을 다 즐기고 활용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렇게 되면 남는 길이 뭐냐 하면 그런 보살로 살아간다는 거는 무엇을 지향하는 거냐?

 

나중에 부처되고 싶다는 거냐?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 이 순간 왜 나중을 얘기해요? 내가 지금 살아있는 건 지금 이 순간인데. 지금 이 순간 신이 여기서 살아 있잖아요. 우리 내면에. 가슴과 머리에 신이 지금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데 이걸 다 표현하기만 하면 된다는 겁니다. 보살도는. 지금 신이 여러분 안에서 뭐라고 하나요? 우주를 지금 이 순간에 천국이라고 얘기하고 있죠. 그럼 지금 이 순간 신처럼 살아야겠죠. 품위 있게. 육바라밀을 쓰셔야 되요. 사랑과 정의와 예절과 지혜를 지금 보여주셔야죠. 순간순간 신처럼 사는 겁니다. 신의 어떤 분신으로서 살아가는 거. 이게 다에요.

 

좋은 결과가 오는 건 당연한 거고. 신이 정한 공식이 신의 뜻대로 살면 順天者興순천자흥 그러죠. 하늘에 승복한 사람 흥하고. 이건 동양의 아주 고래부터 내려오던 얘깁니다. 逆天者亡역천자망_하늘에 역한 사람은 망한다. 이거를 지금 잊어버리고 사는 정도가 됐으면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어진걸까요? 스마트 폰은 만들고 별 신통한 거는 거의 신통력 수준으로 물질문명을 쓰지만, 대게 간단한 이치도 잃어버렸어요. 순천자흥 역천자망 지금 이 얘기하면 다 비웃을 텐데요. 비웃는 사람 한번 봐보세요. 이 공식대로 칼같이 진행됩니다. 세상이 악인이 계속 집권하는 거 같죠?악인들 하나하나 보세요. 다 험한 일 당해요. 악인들이 하도 많아가지고 지금. 악이 계속 득세하는 거로 보이지. 하나하나 봐보세요. 다 험한 꼴 당해요.

 

아니 그게 이런 사람도 있을 거예요. 저한테. 뭐 누구는 그 마음대로 사람 다 등쳐먹고 하는데 다 윗자리 하더만. 딴 사람들이 그 사람을 사람이라고 볼까요? 사람 이하취급을 받고 살아갑니다. 이렇게 살고 싶으세요? 안 사시는 거잖아요. 그렇게 사람이 그렇게 사는 건 아니지. 더 여러분이 상식적이라 그렇게 안 사시는 거예요. 몰상식하니까 그렇게 살고 대게 잘 산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남들은 다 사람으로 안 봐요. 이해되세요? 이런 거랑 똑같아요. “너 지금 사람으로 이렇게 배고프며 살래?” 돼지 시켜 줄게 먹을 거 많이 줄게. 돼지로 살래. 돼지. 사람들이 다 돼지로 봐요. 먹을 거만. 아이고 잘 먹네.

 

산해진미를 쌓아놓고 먹고 있네. 한편으론 부럽죠. 아이고 나도 저 돼지처럼 산해진미 먹었으면 좋겠다. 그래도 그건 아니지. 하는 게 있잖아요.그래서 안하는 거예요. 여러분은 누가 큰 집 사고요, 멋진 차타고 와가지고 아~ 이거나 이거 나 카드로 샀어. 부러우세요? 부럽죠. 그 타고 있는 즐기는 건 부럽지만, 안하실거잖아요. 상식적으로. 똑같아요. 악행을 엄청 저질러가지고 인간이하의 취급을 받으면서 지금 권력을 누린다고 내가 갑이라고 떵떵거리고 있으면요, 한편으로 부러운 것도 있지만, 분명히 그건 아니지 하는 게 있으니까 안하시는 거예요. 그걸 자책하시면 안 돼요. ~ 내가 저렇게 못한다. 내가. 마음이 모질지 못해서. 이렇게 생각하실 게 아니고 인간다움을 그래도 유지하시려고 이거 얻으시느라고 저거를 포기하시는 거예요.

 

저 사람들은요, 그냥 모르겠다. 하고 이번 생에 내가 오늘 한번 즐기다 가자. 하고 그냥 카드 막 긁고 있는 분이에요. 청구서 다 날아오면 어떡할까요? 여러분 그 청구서가 날아오는지 아닌지 여러분 인생에서 실험해보세요. 사단을 어겨보시고 한 번 사단을 지켜보세요. 곧장 날아온다는 걸아시면요, 저쪽 사람들이 지금 모아서 날아오려고 지금 저러는구나. 하는 걸 아실 거예요. 당장 이미 날아오고 있는 게 사람들이 사람취급을 안 해요. “저게 사람이냐?”라는 말을 전 국민한테 들어요. 좋아요. 그게? “아이 뭐~ 욕먹는 놈이 오래 산다더라.” 이런 식으로 버티실 거예요? 말이 안 된다는 얘기를 아셔야 됩니다. 제가 지금 드리는 말씀을 온 국민이 아시면요, 엄한 사람들이 힘을 읽을 텐데. 이걸 모르고 부럽다. ~ 저 돼지 부럽다. 개 팔자가 상팔자다.” 이런 식으로 접근하시니까 개들이 목에 깁스를 하고 다니는 거예요.

 

사람 아닌 존재들이 대게 자기가 부러운 존재인 줄 알고 살아간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다 알아버리면요, 그래도 사람이 할 짓 아니지. 라고 알기만 해도 그런 사람들이 힘을 잃어버려요. 놀랍지 않습니까? 다들 알면 힘을 일을 정확하지 않으니까 본인도. 본인도 지금 자기도 분명히 그건 아닌 거 같아서 안하면서도 부러운 마음이 크니까 사리판단이 분명하지 않으니까 그런 사람들은 대게 자기 잘 사는 줄 착각을 한다는 겁니다. 다 같이 이걸 알아버리면요, 그 사람들이 잘 사는 게 아니라는 거를 생각을. 왜 이 힘을 갖는지 생각해 보세요. 그런 사람들은 남의 부러움을 먹고 사는데, 아무도 안 부러워해주면 어떻게 될까요? 미쳐요.

 

아무도 안 부러워해주면요. 아무도 부러워하지 않기. 이 운동을 해야 되요. 사단분석을 해서 자명하지 않은 일은 부러워하지 않기. 지금부터. 그러면 그 사람들이 힘을 잃어버려요. 관심을 못 받으니까 힘을 잃어버려요. “차 샀어.” “~” 해야 되는데, “뭐 얼마나 긁었냐? 대출 얼마냐?” 계속 이런 거만 물어보면 기분 나쁘겠죠. “~ 역시 그렇게 살지 마라.” 그러고 가버리면. 우울하겠죠. 차 샀는데. 아시겠어요? 세상이 자꾸 허용해 주니까 그렇게 되는 거예요. 뭐가 옳은지 그른지 경물치지가 잘 안되니까 사람들이 그걸 부러워하고 있는데, 딱 사리판단만 정확해지면 그런 사람들이 힘을 잃어버려요. 이 공식이 맞는지 안 맞는지 한번 적용해보세요. 진짜로. .

 

그래서 이런 보살도는 이런 사리 판단하는, 남들이 사리판단 못할 때 도와줄 수 있는 힘이 있어야 되요.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자명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한번 살아보십시오. 더 자명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안에 신이 있고, 열반이 있고, 참나가 있는데. 남 부러워할 시간이 없습니다. 당신 안에 있는 우주적인 신성을 구현하는데 한번 써보십시오. 그 구현 다 할 수가 없어요. 우리가 무한한 생을 살아도 그건 다 구현 못해요. 그건 당연한 거 아닌 가요? 우리 작은 에고로 우주적인 신성은 어떻게 다 구현합니까? 그래도 구현하는 순간 얼마나 보람되고 얼마나 기쁘고 그렇게 살았을 때 얼마나 후회 없는 삶이 될까요? 그 맛에 계속 구현해 보는 거지. 꼭 완성되리라는 것을 기대하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살아야 더 좋으니까 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