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4)

[즉문즉설] 제588회 예민, 초조, 불안, 긴장하는 성격-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Buddhastudy 2014. 4. 1. 20:49

출처 YouTube

 

그러니까 여러분 증상을 보면 엄마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겠죠? 그런데 여러분들 사는 걸 진짜 함부로 살았어요. 천방지축으로 살은 거예요. 뭐가 어이되는지도 모르고, 그냥 살았는데. 그러나 이제 부모는 그런 자기 삶을 돌이켜, 그렇다고 후회하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돌이켜서 지금이라도 그때의 어리석음을 돌이켜서 참회를 하고, 지금이라도 마음에 있는 어떤 그런 갈등의 상처, 이 상처가 없어진 거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고, 옛날 얘기 다 잊어버렸어.” 이러지만, 그 얘기 자꾸 하면 살아납니까? 안 살아납니까? 계속 하면 속에서 올라옵니다. 하나도 안 없어져요. 다 고대로 다 남아있습니다. 덮여있을 뿐이지.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이제 깨달음장 다녀오셨으니까 큰 무지는 좀 벗어버리고, 그렇다고 해서 이게 막~ , 이제 세상이 다 어떤 일이 있어도 행복할 거 같고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아직 이 찌꺼기가, 무지는 다 깨어졌는데 이 업식은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이걸 알 수 있는 힘이 생겼어요. 무지가 깨어지니까. “~ 이게 다 내문제구나. 내 마음에 이게 상처가 있구나.” 이런 걸 알았기 때문에 남을 탓하는 거는 없어져요. 그러나 자기를 보는 힘이 생겼기 때문에 어떤 문제가 생겨도 자기에게 돌이켜서 , 이게 내 문제야.” 이렇게 알아차리는 힘이 생겨서 이것만 해도 굉장한 진척이죠.

 

그러면 나눔의 장을 하면서 드러내보던지 명상하면서 혼자 가만~~~히 이렇게 있으면, 이게 살살~~~위로 올라옵니다. 가만히 있으라는데, 우는 사람도 생기고, 화내는 사람도 생기고, 앉아 있으면 다리가 저리고 쑤시는데, 그럼 다리를 펴면 되는데, 펴지 마라고 가만~~ 히 있으라 그러거든요. 그러면 열이 등골로 올라오고, 몸이 못 견뎌서 죽을 거 같고 그러면 뭐가 생길까? 몸만 아프고 끝나는 게 아니라, 화가 올라옵니다. 아시겠어요?^^ 이제 옛날에 화가 막~ 솟아 올라오고, 원망이 생기는 거요. “이거 사람 잡자는 거지 이게 무슨 수행이냐? 부처님이 고행하지 마라는데 왜 고행을 시키냐?”

 

밥 먹으러 갔을 때도, “이걸 밥이라고 주느냐?” 이제 성질이 다 나오는 거요. 이게. 이렇게. 발동이 걸리면. 그런데 이게 좋은 현상이에요. 이게 덮여진 게 어때요? 드러나는 거 아니오? 그러니까 평소 같으면 남편이 건드렸기 때문에 네가 문제다. 이러는데 이건 누구한테 원망할 일이 없단 말이오. 자기한테서 가만있는데 일어나는 현상이니까. 그러니까 애꿎은 밥 퍼주는 사람, 거기 가서 시비를 낸다. 그래도 그거는 자기가 시비를 하지만 금방 돌이켜지거든요. “, 이건 내 문제다.” 이렇게 알 수 있단 말이오. 이렇게 해서 스스로 자기의 문제를 이렇게 찾아가는 것도 있고, 이게 잘 안내놔지니까, 나눔의 장 하면서 대화하면서 이렇게 내도록, 이 얘기라는 건 묘해요.

 

처음에는 말문이 막혀 이게 말이 안 나오거든요. , “어려운 거 내놔라.” 그래도 아무것도 없어요. 생각해 봐도 없는 거 같아. 그리고 체면 같은 이런 게 이게 남의 눈치 보는 이게 억압을 한단 말이오. 그런데 이게 한번 나오기 시작하면 나중에 주체가 안 됩니다. 남이 뭐, 뵈지도 않아요. 그냥 막~ 어쩌고어쩌저고, 어쩌고어쩌저고. 이게 나오는데, 처음에 주로 생각으로 분별, 억지로 할 때는 생각을 주로 얘기해요. 그러다 터지면 밑바닥에서 나오면, 자기가 막~~~~열을 내놓고 얘기해놓고 자기가 생각해도 내가 왜 이러지? 내가 왜 이런 게 있었나? 이러면서 이제 자기의 그 억압된 심리를 보게 된단 말이오.

 

그런데 이런 얘기를 들어보면 다 이게 엄마가 어릴 때 어이했다. 아빠가 어이했다. 누가 어이했다. 스님이 어이했다. 이런 얘기를 하죠. 그러나 그건 다 누구 상처다? 다 자기 상처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다 엄마는 엄마대로 지 살기 바빴고, 아빠는 아빠대로 지 살기 바빴고, 선생은 선생대로 지 살기 바빴지 나 괴롭히려고 누가 한 사람 아무도 없는데, 나는 어떻게 생각했냐? 엄마가 날 못살게 했다. 아빠가 날 못살게 했다. 선생님이 날 괴롭혔다. 이래서 이게 쌓여서 상처가 되어 있는 거란 말이오. 그래서 이걸 보면서 그래서 지도가 필요한 거요. 이게 이치를 모르면 결국 원망하는 걸로 끝나버려요.

 

그러나 이런 것이 드러나는데, 원망을 하다가 이제 이게 결국은 그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누구 문제다? 내 문제고, 이게 내 상처다. 나의 무지로부터 이 전도, 내가 일으켜놓고 상대가 일으켰다고 뒤집어씌운 거란 말이오. 이게 전도 몽상이란 말이오. 이게 하나씩 드러나서 청소를 해나가든지, 이게 청소가 되고, 상대에게 덮어 씌었던 거를 내가 일으켜 놓은 거라고 알아차리든지. 그러면 이게 확~ 올라와도 발병을 덜하거든요. ~ 올라올 때, “, 내 상처가 일어나구나.” 이렇게 자각을 하게 되니까.

 

이거를 자기 쪽으로 보는 눈이 있으면 이게 사라졌냐? 있느냐가 수행의 점검이 아니고, 이게 어떤 현상이 일어나도 이것을 자기 쪽으로, 이게 내가 일으킨 거라고 보는 힘이 있으면 부디스트. 불자라고 하고, 수행자라고 말하고. 이거를 털 끗만큼이라도 네가이렇게 가면 이거는 불교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 불자가 아닌 사람이다. 이 말이오. 이건 수행자가 아닌 관점이다. 관점이 이렇게 되는 거요. 절에 가서 절하냐? 안하냐? 이게 불자냐? 아니냐의 관점의 기준이 아니다. 그러면 스님들 중에, 우리 정토회 와서 정토행자 중에, 또는 한다하더라도 그가 자기의 어떤 성질이 다 없어지고, 다 그저 웃고 좋아져야 된다. 그러면 수행자고, 성질내면 그건 수행자가 아니다. 이게 아니라.

 

이런 것의 원인을 자기 쪽으로 보는 관점을 가지면 이거는 견도, 도를 본 자다. 이걸 해소는 못했지만 닦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이치는 알은 자라하고, 이거를 누구 때문에라고 상대에게 전가하는 거를 아직도 움켜쥐고 있으면 그거는 스님이라 하더라도 불교하고 아무~~관계없는 사람. 이렇게 평가 되는 거요. 종이 한 장 차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확~ 일어날 때는 다~ 그 순간은 누구 문제 같다? 남 문제 같습니다. 아시겠어요? 그러나 도를 보는 자는 법을 보는 자는 그때 알아차린다. 전도가 딱! 일어났을 때, , 전도된 줄을 알아차리면 원리전도가 된다.

 

전도로부터 멀어진다. 깨어나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수행자가 뭐 화를 내?” 이렇게 말하는데, 화를 안내는 게 수행이 아니고, 화가 일어났을 때, 그 화가 일어나는 당처를 자기로 부면 수행자고, 그걸 남 탓하면 뭐다? 수행자가 아니다. 이 얘기에요. 그래서 이 깨다름장을 하면 적어도 자기문제다. 하는 거는 확실하게 자각이 된다. 그래서 거친 고뇌는, 보통의 고뇌는 없어져 버린다. 그러나 이 마음에 쌓여있는 이 업식으로 부터 일어나는 이건 안 고쳐져요. 이거는 금방 안 사라진다. 이거야. 습관적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큰 무지는 없어지는데, 찰나 무지. 순간에 딱 부딪쳤을 때 자기도 모르게 일어나는 이 무지는 그냥 남아있다. 그러기 때문에 그 무지를 알아차려야 된다. 보통 사람은 이게 이미 한 꺼풀이 안 버낀 사람은 이걸 알아차리기가 어렵습니다. “네 문제다가 이게 꽉~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 이게 내 문제다하는 걸 먼저 알아야 돼. 내 문제라는 걸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경계에 부딪치면 항상 이게 일어납니다. 그럴 때, 남 탓으로 갔다가 일어날 때, 이미 일어날 때는 이미 남 탓으로 가거든요. 그럴 때 이걸 자기 쪽으로 돌이키면 이게 멈추거나 가라앉거나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 이게 계속 반복돼요. 연습이.

 

한번 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수백 수천 수만번 반복이 되면서 이제 일어나는 것도 적어지고, 약해지고, 일어나더라도 알아차림이 금방 이루어지고. 그러면 남이 봐도 조금 인격이 도야되는 것처럼, 전에 보다 저 사람 화가 좀 적어졌구나. 이렇게 느끼게 되는 거요. 그럼 그렇게 표현으로 드러날 동안에 자기는 그 수도 없는 이런 연습들이 이루어지면서,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이제 어느 정도 바깥으로도 드러나게 된다. 이렇게 볼 수 있어요. 보통 깨달음장에 다녀오면 큰 무지가 탁~ 깨어지니까, 이제 마치 다 이루어진 거 같아. 무슨 얘기해도 화 안 날거 같고, 뭘 해도 안 괴로울 거 같고, 그게 맞아요.

 

그거를 계속 유지하면 그렇게 되는데, 그런데 업식이 이게 남아 있어서 미세한 것들이 올라오고, 이게 계속 주위를 안 하고 수행을 갔다 오고부터 그날로부터 이걸 계속 닦아 나가면, 다시 그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데, 하다가 그냥 놔 버리고, 이렇게 하다보면, 이 미세한 것이 무지가 일어나서 다시 또 안개가 피어올라와 구름이 되고, 구름이 먹구름이 되어서 딱 가려버리면 나중에 갔다 오면 뭐하노? 수행하면 뭐하노? 이런 소리를 듣게 된다. 그래도 옛날에 듣고 배운 타파한 사람하고, 아예 그걸 경험 못한 사람하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차이가 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본인 몸에 이상이 없데요? 검사해 보니까? 남편도? 그러면 그렇게 정진을 하면, 저절로 애기가 생기게 될 거요. 안 생겨도 뭐한 일이고? 좋은 일이고, 생겨도? 좋은 일이 된다. 안 생겨도 행복하게 살 수 있고, 생기면 좋은 아이를, 키울 수가 있게 된다. 그러니까 그걸 낳겠다. 안 낳겠다. 이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이제 준비가 됐으니까. 인연을 따라오면 인연을 받고, 인연을 따라 안 오면 애기에게 쏟을 정성을 애기가 없으면 다른 사람을 위해서 봉사하면 되고, 또 애기가 생기면 또 애기에게 봉사, 그것도 봉사거든요.

 

내 자식이다.” 이게 아니라, 그것도 하나의 인류를 위한 봉사가 되고, 훌륭한 아이를 하나 잘 키운다는 것은 세상을 위해서 좋은 일이오? 나쁜 일이에요? 엄청나게 좋은 일이오. 아이를 하나 잘못 키우면 세상에 엄청난 해악을 주는 일이란 말이오. 그러니까 이걸 떠나서 딴 데 가서 좋은 일 할 생각을 안 해도 된다. 그런데서 부모에게 먼저 감사기도를 하세요. 앞에서 아까 얘기 들었죠? 그런 것처럼, 부모에게 갈등을 일으키고 뭐한 거 이런 거, 그때 생각하면 굉장히 가슴 아픈 일인데, 지금 생각해보니, “아이고, 우리 어머니,” 어머니라고 그러면 어릴 때 신 같았지만, 지금 어른이 되어서 보니, , 32~33 먹은 여자가 뭘 알겠어요? 그죠?

 

성질나고 살기 힘들고 애 둘 셋. 이러니까 짜증내고 이럴 수밖에 없었구나. 그래도 우리 어머니는 나보다 더 열심히 살았다. 이렇게 생각을 하시고, 그 와중에도 나를 낳아서 키우고, 이렇게 크도록 해준 것만 해도 고맙다. 내가 원하는 100%는 안됐지만 그러나 그만한 건만 해도 참 고맙다. 그리고 그 분들이 그런 갈등이 살아보면 이해가 됩니다. 그래도 살아보니 어머니가 특별히 수행자도 아니고, 아버지가 보통 사람으로서 그 정도만 해도 잘 살았다. 이렇게 이해하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 이런 거를 자꾸 기도를 하면, 내 속에 있던 이런 상처들이 지워져요. 으흠. 이게 지금 나이 들어 보면, 어릴 때 그런 거 별거 아닌 거 같아요. 다 지나간 얘긴데, 그런데 들어가 보면 안 그래. 그것이 이제 말끔히 청소가 되면, 내가 훨씬 부드러운 사람이 되죠. 그렇게 기도를 한번 해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