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4)

[즉문즉설] 제589회 깨달음, 어떻게 알 수 있나요

Buddhastudy 2014. 4. 2. 21:02

출처 YouTube

 

5일 시간 낼 수 있어요? 으흠. 5일 시간 내어가지고 시간 길게 끌지 말고, 물론 불교 공부하고 뭐하고 이렇게 하고 법문 듣고 하면 알 수 있는데, 그렇게 아는 거는 머리로 아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몸과 마음에서 그냥 탁~ 느껴버려야 되요. “~ 이런 게 깨달음이구나.” 그러면 그렇게 뭔가 조금이라도 깨달으면 어떠냐하면 마음이 가벼워져버리고, 고민이 좀 없어져요. ~ 머리 싸매고 있던. 남편이 만약에 바람을 피웠다 하면 그 아무리 좋게 생각하고 용서해줘도 꼬라지만 보면 또 확~ 뒤비지고, 이런 게 사실이잖아. 그죠?

 

그럼 머리로는 아무리 해도 이게 몸과 마음에서 잘 안되거든요. 이런 거를 아주 집중적으로 관찰해 들어가면, 어떤 상태에서 텅 빈 걸 보게 되요. 그러니까 돌멩이를 돌멩이로 보이고, 사람이 사람이 보이고, 그냥 사슴은 사슴으로 보이고, 이러지 우리는 지금 돼지는 욕심으로 보이고, 뱀은 독한 것으로 보이고, 이렇게 보이거든요. 뱀은 뱀이고 돼지는 돼지일 뿐인데. 그러니까 어떤 여기에 망상, 어떤 환영 이미지가 붙어 있어요. 그게 딱 안개 걷히듯이 걷히게 되면 그냥 하나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된다.

 

그러니까 이게 텅 비게 보인다. 이 말은 아무것도 이런 뜻이 아니에요. 그런 상태가면 결과적으로 마음이 가벼워져요. 그건 생각으로는 안 돼요. 생각을 떠나야 되기 때문에. 생각을 떠나야 되기 때문에 생각으로는 상상은 할 수 있어도 마음이 가벼워지지는 않아요. 그러니까 경험은 안 되어진다. 이 말이오. 이해만 되어 지지. 설명을 자꾸 하면. 그리고 설명을 자꾸 들으면 자꾸 모순이 생겨요. 그럼 이거는 어떤데? 그건 왜 그러냐? 자꾸 이런 꼬리에 꼬리를 물어요. 그런데 이걸 경험해버리면, 의문이 싹~ 없어져버려요. 으흠.

 

그거는 깨달았다고는 말할 수는 없고, 이거는 깨달았다고 할 수 있어요. 그때는 근심걱정은 많이 했는데, 지금 상태가 좋아졌기 때문에 과거를 그냥 잊어버린 거지, 그건 깨달음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그런데 그때 그 상태가 아직도 개선이 안됐는데, 그 아이의 아픔이 그때 그런 얘기 들었는데, 그게 개선이 안 되고 지금도 그대로 있다. 이 말이오. 그런데 그때는 울고불고했는데 지금은 내가 이걸 어떻게 보느냐? “~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이렇게 내가 이 아이에 대해서 똑같은 환자인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생각이 바뀌니까 마~ 편안해지고,

 

오히려 아이 병이 나아야 된다.” 이런 생각보다는 이런 아이를 내가 보살펴 줄 수 있는 은혜를, 내가 오히려 은혜롭게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이 탁~ 바뀌면서 똑같은 일인데 괴롭다가 괴로운 일이 아니라, 이게 장애다가 이게 큰 뭐랄까? 하나의 불행으로 느꼈던 것이 행복의 선물로 딱~ 느껴진다. 이러면 이런 거를 깨달음이라 그래. 예를 들면 똑같은 경제적 어려움에 있었는데, 어느 한 순간에 그것이 오히려 가난이 나에게 큰 복임을 안다. 아까 여기 얘기하듯이 애기를 못 낳아가지고 고생고생 하다가 애기를 낳고 나니까 못 낳았던 그때를 생각해 보니 뭐~ 별거 아닌 걸 그랬구나.

 

이거는 깨달음이 아니고, 애기를 못 낳은 상태에서 울고불고 했는데, 애기를 현재도 못 낳은 상태인데 이게 오히려 나한테 하느님이 주신 복이다. 그러니까 애기를 안 준 게, 이게 하느님이 나만 미워하나? 이게 아니고, 그게 바로 그때 애기가 있었으면 그것이 사실은 나한테 큰 불행을 자초할 일인데, 알고 봤더니 이게 오히려 큰 복이었구나. 그럼 이렇다면 이건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어. 지금 얘기하는 건 깨달음이 아니야. . 그러니까 똑같은 상황인데, 이게 사물을 보는 관점이 바뀜으로 해서 아까 무지가 걷힘으로 해서 불행인줄 알았더니 알고 봤더니 뭐더라? 행복이더라.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그러니까 똑같이 일본에 가는데, 자기 일 때문에 가는 사람은 걱정하면서 가고, 남을 돕기 위해서 가는 사람은 걱정 안하고 가잖아. 그죠? 그러니까 이게 오히려 우리가 이기적일 때 오히려 더 괴로움이 생기는 거요. 우리는 이기적인 것이 행복이고, 남을 위하는 건 희생이라고 생각하잖아.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요. 마음의 이 작용이라는 게. 그러니까 지금 여러분들이 사랑을 못 받아서 괴롭다 하잖아. 그것도 사실이 아니야. 사랑을 안 하기 때문에 괴로운 거야. 사랑하는 마음을 내면 그냥 기뻐져버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사랑하는 마음을 안 내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기지, 사랑을 못 받아서 괴로운 거는 아니에요. 이런 것도 다 착각에 속해요. 이런 착각에서 깨어나는 거를 뭐라냐? 깨달음이다. 이래 말해요. 으흠. 그래서 예수님께서 깨달으셔서 하신 법문이 있어요. 예수님이. 예수님의 많은 말씀도 법문에 속합니다. 그게 뭐냐? 오리를 가자면 십리를 가줘라. 오리를 가자. 이 말은 내가 종속된 존재잖아. 누가 가자니까 억지로 가야 되잖아. 끌려가는 존재인데, 내가 십리를 가주겠다 하는 마음을 내어 버리면 어때요? 내가 주인이 된다는 거요.

 

이게 종에서 주인으로 일대 전환이에요. 이런 게 엄격하게 말하면 부활이라고 할 수 있는 거요. 으흠. 그러니까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을 내주라든지. 이런 것이 다 일종의 깨달음의 내용이다. 이렇게 말 할 수가 있어요. 하느님한테 뭐~ 빌면, 복 준다. 이런 거는 깨달음이 아니에요. 그건 욕심이지. 그러니까 좋은 일을 하면, 그러니까 가난한 자에게 하면 뭐다? 너희들이 내가 목말랐을 때 먹을 것도 안줬고 입을 것도 안줬고, 감옥에 갇혔을 때 영접도 안했고, 어쩌고 저쩌고 해가지고 너희는 지옥에 갈 거다. 이러잖아. 그죠?

 

너희들은 이래이래 했기 때문에 천국에 갈 거다. 그러니까 주여, 주가 언제 그런 적이 있고, 우리가 언제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하지 않는 것이다. 이게 심판의 기준이란 말이오. 교회에 얼마나 나왔냐? 천주교 갔냐? 개신교 갔냐? 어느 종파 다녔냐? 절에 다녔냐? 이게 기준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네가 어떤 마음으로 어떤 행동을 했느냐가 심판의 기준이라는 거거든. 그럼 이것은 보편적이라는 거죠. 이거는 기독인이나 불교인이 들어도 합리적이다. 이런 얘기요. 그러니까 그것이 진리라는 거요.

 

그러니까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하고 있는 것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상당히 무관한 예수하고 아무 관계없는 불자들이 부처님하고 아무 관계없는 불교를 하고 있듯이. 그런 경우가 많다는 거죠. 그러기 때문에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 말은 교회 다니면 자유가 주어진다. 이런 얘기가 아니라 깨달으면 뭐한다? 자유로워진다. 행복해 진다. 이런 얘기요. 으흠. 그러니까 절에 다니냐? 교회 다니냐?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가 눈을 떠야 된다. 진리의 눈을 떠야 된다. 이게 깨달음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죠.

 

그러니까 본인이 깨달음장에 가서 한번 경험을 딱~ 해보면, 그래서 신부님이 설해준 성경, 신학자가 얘기해준 성경을 보지 말고, 내가 그냥 내 눈으로 성경을 읽으면 예수님의 가르침이 가슴에 탁 다가오죠. 내가 눈이 열리면. 그래야 세상에 휩쓸리지 않게 돼. 세상을 거스른다. 이런 뜻이 아니에요. 으흠. 그러려면 이제 정진을 해야 되요. 지금은 이게 다 자기 까르마. 세상에 휩쓸린다는 건 자기 까르마의 흐름에 따라 간다는 거요. 우리가 크게 봤을 때, 이 세상에 예를 든다면 이 수많은 메뚜기부터 개미부터 소부터 말부터, 산에 있는 온갖 짐승부터, 암컷 수컷이 새끼 낳을 때 교미해서 낳아요? 사랑해서 애기가 생겨요? 교미해서 생기지?

 

그런데 우리 인류가 그 중에 인간들이 여러 가지로 살아보고 옛날에 일부다처도 해보고, 일처다부도 해보고 여러 가지 해보니, 그래도 어떤 게 조금 살기가 낫더라? 일부일처로 사니까 좀 살기가 낫더라. 이런 것은 상대적 진리란 말이오. 이런데서 예를 든다면 우리들이 인간에 대한 어떤 그런 욕망에 대해서 일정한 절제가 필요하잖아요. 그러나 삶이라는 것은 거기서 벗어날 수도 있는 거요. 그러면 그 벗어난 거에 대한 일정한 수준에, 우리가 절제가 필요한데, 그 우리는 이런 문제를 남자들은 그것을 방임으로 해석문제로 하면 여자들은 그런 문제하나를 갖고 자기 생을 바칠 만큼 그걸 중요시 한다. 이런 얘기요. 목숨 걸잖아. 사실 목숨 걸 가치가 없어요.

 

여러분들의 인생은 자신이 자기를 행복하게 가꾸어야 돼. 남편이 일찍 들어온다. 늦게 들어온다. 뭐라고 말했다. 이리 거 다 시비를 하면 그 여러분들은 굉장히 현명한 거 같은데, 자기 인생을 한 남자, 한 인간에게 매달려가지고 자기를 괴롭히고 산다는 거요. 그렇게 살만큼 자기 인생이 가치가 없습니까? 왜 자기 인생을 안 사느냐는 거요. 한두 번 해보고 안 되면 그만 살든지, 안 그러면 늦게 들어오는 시간을 좀 조정하면 되잖아. 8시에서 10시로 바꿔주든지. 10시에서 2시로 바꾸어주든지, 바꿔주면 되는 거고, 뭐 정해진 게 있냐? 술 양이? 한 되 정해주다가 두 되로 정해주면 되는 거고.

 

그런 거를 넓히면 누가 좋아진다? 내가 좋아지는 거요. 그러니까 제가 여러분께 이런저런 얘기하는 거는 여러분들이 어떤 의식의 울타리를 이렇게 움켜쥐고 있음으로서 여러분 자신을 여러분이 괴롭힌다. 이 말이오. 삶의 다양한 길이 있는데, 왜 그렇게 자기를 목 죄고 괴롭게 살 필요가 뭐가 있느냐는 거요. 그래서 결국은 진리의 눈뜨게 되면 인간이 어떻게 된다? 고뇌가 사라지고 행복해 진다. 그리고 자유로워진다. 그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런 말을 한 거란 말이오.

 

그러니까 본인이 첫째 짧은 시간 내에 경험해보려면 깨달음장에 한번 가보세요. 알았어요? 그걸 망설이면 안 돼요. 오늘 얘기 듣고 내일 당장 전화해서 신청해가지고 초발심이 중요한 거요. 마음 낼 때 확~ 갔다와버리는 거요. 그러면 뭘 들을 수 있다? 하느님의 진정한 음성을 들을 수가 있다. 나라는 생각을 내려놔야 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