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5)

[법륜스님 즉문즉설 1075회] 출가의 길에 들어섰지만 살아온 습관이 잘 안 바뀝니다.

Buddhastudy 2015. 4. 16. 22:44

 

 

 

아까 얘기했잖아. 일반적으로는 까르마는 변경이 잘 안 돼. 그런데 그 까르마가 그 습관이, 까르마라는 게 습관인데, 결국은, 그럼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습관이 움직이는 거요. 습관대로. 그러니까 생각대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까르마대로 우리의 삶이 움직이는데, 그래서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나오는 거요. 그런데 그것이 어릴 때 형성된 것일수록 변경이 불가능해. 어려워. 쉽게 얘기하면. 그래서 세 살 버릇 어디 간다? 여든까지 간다. 세 살 이전에 형성된 거는 거의 못 바꿔. 그래서 뭐다? 천성은 못 고친다. 이런 말도 있잖아. 그죠? 그건 뭐다? 천성이 변하면 죽을 때가 다 되었다. 이런 말도 있잖아. 그지?

 

그럼 이걸 변화시키려면 그 말의 용어가 뭐요? 목숨을 걸어야 된다. 생존 본능은 어떤 습관보다 더 우선하기 때문에, 생명현상이기 때문에 생명까지도 두려움을 놔버리면 어떤 업도 고쳐져. 그러니까 예수님도 황야에서 40, 금식기도를 했단 말이야. 노천에서 40일간 금식한다는 건 거의 죽음에 가까운 상태에 이르거든. 그럴 때 그 고비를 넘기니까, 그대 세 가지 유혹이 있었잖아. 그래서 3가지 유혹이라는 게 업의 마지막, 그 사람의 까르마의 바탕에서부터 오는 저항이란 말이오. 그걸 넘었잖아. 넘으니까 뭐다? 성령이 비둘기 날듯이 날면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라.

 

,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걸 자각했다는 거요. 이걸 불교적으로 말하면 어떻게 될까? 내가 부처라는 걸 자각했다. 이렇게 말 할 수 있어. 이거는 문화가 다르니까, 용어가 달라서 그래. 부처님도 그 왕자로 살다가 발심해서 출가했지만, 공부가 제대로 안되었잖아. 그래서 6년 고행할 때, 완전히 죽음에까지 갔잖아. 6년 고행상 봐. 그래서 죽음의 위협의 상태에 갔을 때도 역시 3가지 유혹이 나오잖아. 그런데 그거를 넘어서서 뭐다? 해탈을 했다는 거요. 그러니까 우리들의 지금 수행은 그렇게까지 안하거든.

 

그러니까 고행을 하라는 게 아니라, 밥 안 먹으면 수행된다. 이건 전혀 아니야. 다시 말하면 그런 것이 음식의 문제든 어떤 고통의 문제든 생존의 두려움에 다다르게 되는 거요. 그 생존의 두려움을 넘어서야 이 나머지 까르마라는 게 소진되지 안 그러면, 그게 진드기처럼 붙어서 잘 안 떨어져. 그런데 시간이 나중에 형성 된 습관은 고치기가 쉬워. 그러니까 담배 하나도 한 30년 습관 든 사람은 끊으려면 쉽나? 안 쉽나? 안 쉽잖아. 그래서 자기가 못 고친다. 이런 말도 있고, 그래서 뭐다? 숙명론이 나오잖아. 못 고치니까 뭐다? 운명이다. 숙명이다. 이런 말 하잖아.

 

그럼 왜 숙명이냐 하면 저쪽 중동에서는 하나님이 컨트롤 한다. 인도에서는 전생이 정해져 있다. 중국에서는 너 태어나는 생년월시가 그걸 정한다. 이게 운명론이란 말이오. 숙명론은 표현방법이 다르지 셋다 뭐다? 운명이 정해져 있다. 그러나 부처님은 정해져 있지 않다. 형성되어진 거다. 그러니까 뭐할 수 있다? 변화가능한데, 그 변화가 어떻게 형성되어있느냐에 따라서 그 변화가 우리가 쉬 노력해서 될 게 있고, 쉬 노력해서 안 되는 게 있고, 거의 불가능하다고 느껴질 정도가 있으니까, 그런 운명론이 나온 거란 말이오.

 

그런데 어떤 것도 변하지 않는 건 없어. 그러니까 제행이 무상이잖아. 제행이라 할 때 행이 그게 까르마란 말이오. 모든 까르마는 변하는 거다. 그러나 쉽게는 변하지 않으니까, 자기가 어디까지 변화시킬 거냐에 따라서 아까 저런 분, 그건 어릴 때 형성된 거니까, 목숨을 걸 정도로 각오 안하면, 그냥 일반 노력하면 변화가 잘 안 일어난다. 이런 얘기니까, 그런 독한 소리를 하잖아. 자기도 정말 이 길을 가야 되는데, 내가 그냥 이렇게 대강해서 착한 일 좀 하고, 적당히 해서, 교무님이 되고, 사람들한테 존경도 받고, 이렇게 살겠다하면 자기 까르마 하나도 안 변해.

 

세속에서 하나 머리 깎고 스님이 되나 아무차이가 없어. 그게 머리 깎는다고 변하면 스님들 행동이 저런 게 나오겠나? 안 나와. 만약에 내가 어릴 때 내 친구들 가만히 보는데, 어릴 때 자기가 뭘 해보겠다고 뭘 좀 지위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잖아. 이런 사람 불법 만나 스님이 되었는데, 지금 내가 그 사람들 하나하나 관찰해보면 그 사람들 다 종단 정치해요. 어릴 때 자기는 그냥 조용히 어디가 서 살고 싶다. 이런 젊은 애들도 고등학교 때 얘기해보면, 가지는 이러 거 싫고 조용히 살고 싶다 이런 사람 스님이 되면 꼭 토굴하나 얻어 조용히 살아.

 

다 지 까르마대로, 이게 껍데기 바꾸어놔도 다 지 까르마대로 가. 이 까르마를 극복해야 되는데, 그렇게 되기 어려워. 그러다보니까 다 우리가 그 사람의 특질, 특성을 그대로 가라. 그대로 하면 또 자기가 잘하고. 그렇게 얘기하지만, 수행이라는 건, 그걸 어느 정도 극복해 가는 거요. 자기가 이 길을 갈 때 아까도 얘기한대로, 수행자가 되겠다 해놓고는 기본계율인 살생이나 폭력도 첫 번째 계율도 못 이기고 그리고 성질난다고 두드려 패고 이러면 이건 안 되지. 두 번째 계율이 뭐다? 훔치거나 뺏거나 하지 마라 그랬잖아. 재물에 욕심내지 마라. 세 번째는 성추행하거나 성폭행하지마라는 거고, 네 번째 계율이 거짓말 하거나 욕설 하지 마라 그러고.

 

다섯 번째 계율이 술 먹고 취하지 마라 그러잖아. 이것도 못 지키는 게 뭐 하겠다 그러고. 이거는 부디스트, 신자가 될 때도 이건 지켜줘야 된다. 이 말이오. 그런데 그 지도자가 되겠다는 사람이 이것도 어겨서, 그럼 정직당해야지 어떻게 해. 그러나 그걸 보면서 계율이라는 거는, 내가 이 길로 가는 데는 이건 정말 필요하다. 이건 남도 해치고, 나를 손해 끼치는 거다. 이렇게 딱 자각이 되면 계율을 지키기 어렵다. 이 생각 자체는 뭔가 열심히 해야지. 이 말이 무슨 말이야. 하기 싫다 이 말이야. 지켜야지 이거는 까르마의 저항하는 거거든. 까르마는 그걸 하고 싶다는 거야. 그러니까 자꾸 고기도 못 먹고, 뭐도 하고, 뭐도 하고 이렇게 얘기하는데.

 

첫째는 육식보다는 채식이 더 좋다. 생각이 딱 바뀌어야 된단 말이야. 만약에 안 먹어야 된다면, 원리 불교의 계율에 고기 먹지마라는 계율은 없어요. 몰랐지? 계율에 그런 거 없어요. 이건 습관, 대승불교에서, 힌두교에서 온 문화적 습관이지 계율에는 없어요. 그래서 계율을 잘 지킨다는 남방 불교의 스님들도 다 고기를 먹는데, 그게 왜 고기 먹지 마라는 계율이 없냐하면 걸식, 얻어먹기 때문에, 얻어먹는 자가 이거 달라 저거 달라 하는 권리가 있나? 없나? 주는 대로 먹기 때문에 거기 고기가 섞여있으면 섞여있는 대로 먹고, 안 섞여 있으면 안 섞여있는 대로 먹는데.

 

옛날에 가난한 시절에 얻어먹는 주제에 고기라도 먹을 가능성이 있어요? 없어요? 없어. 그러니까 실질적으로는 거의 채식이지만, 채식주의자는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 말은 먹지마라는 계율이 없으니까 어디 가서 갈비 뜯어라. 이런 얘기가 아니에요. 그러나 금기사항은 아니다. 그러니까 그럼 어떤 계율이 있느냐하면 음식에 탐닉하지마라 이런 계율이 있어. “, 고기 먹고 싶다. 고기 먹어야지.” 이건 탐닉에 속하는 거야. 탐닉하게 되면 살심을 불러 일으켜. 닭고기 좋아하면 닭만 보면, 오 저거 통닭 해먹으면 맛있겠다.

 

물고기가 보면 매운탕 해먹으면 맛있겠다. 이렇게 살심을 일으키기 때문에 탐닉이 중요한 거요. 탐닉은 까르마거든요. 업식의 노예가 안되는 게 수행이라는 말이오. 그러니까 그거를 긍정적으로 내가 오, 이렇게 하는 게 내 해탈에 도움이 되니까, 계율을 금기로 보고 힘들어하지 말고, 정당하게 받아들이고, 그러나 계율을 어기는 건 나도 모르게 어기게 된단 말이오. 까르마라는 건 나도 모르게 일어나니까. 그럴 때는 반드시 뒤에라도 자각하고, 반성을 해야 되고, 그러니까네, 위에서 스승이 그걸 지적을 하면 지는 안하나? 나만 하나? 이렇게 하는 거는 수행자를 포기하는 거야.

 

그 사람이 하고 안하고는 그 사람 인생이고, 내가 어겼으면 아,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렇게 탁 돌이켜서 받아들여서 다시 노력해보고 또 어기게 되면 또 돌이켜서 받아들이고, 넘어지면 일어나고 넘어지면 일어나듯이 이렇게 수행자가 되려면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이 수행자가 행복으로 가지, 이 수행자가 계율이나 이런 거를 억지로 받아들이면 어떠냐? 남을 속여야 돼. 남 앞에서는 고기 안 먹는 척 하고, 집에 와서 지 혼자 따로 먹어야 되고, 친구들끼리 따로 먹어야 되고. 예를 들어서 돈은 청정한척 하면서도 예를 들면 교무되면 월급 많이 주나? 조금 밖에 안주잖아.

 

조금 밖에 안주니까 늘 그것 때문에 전전긍긍해. 아예 걸식하는, 아예 하나도 안 받는, 돈을 안 지니고 사는 마음을 냈을 때는 30만원 줘도 참, 넉넉한 이런 마음을 갖는데, 이걸 세속사람하고 비교해가지고 자꾸 생각하면 이 생활 못해. 그러려면 안하는 게 낫다 이 말이오. 늦고 빠르고는 없어. 교무되어서 승진해서 내 친구는 벌써 어린 나이에 같이 그때 된 사람 벌써 교무되었는데 나는 1학년 되고 언제 돼. 이렇게 생각하면 안 돼. 그건 지극히 세속적인 사고방식이야. 지위를 따지면 안 돼.

 

그리고 어디든지 가면 밥그릇 갖고 따지는 세상이가? 아니가? 세상이야. 군대 가도 나이가 29살에 가도 21살짜리 밑에 기어야 되야? 안 기어야 되냐? 기어야 되듯이 스님도 교무도 다 신부도, 또 이건 이사회에 들어오면 이 순서대로 들어온 순서대로 밥그릇 따지나 안 따지나? 따져요. 검사도 마찬가지야. 판사도 아 나이 안 따지고 고 그룹은 그 들어오는 순서대로 따져. 이거는 부처님의 원래 가르침하고는 안 맞는 거지만, 이게 현실사회니까 받아들여야 되나? 안 받아들여야 되나? 받아들여야 돼. 그거 뭐, 위에 올라가면 뭐해? 그러니까 이렇게 내가 그저 밥만 먹고 살면 된다.

 

그리고 또 잘은 모르지만, 우리 스님들은 혼자 살아야 되지만, 또 남자교무들은 결혼해도 되나? 안되나? 되잖아. 그런데 뭐가 어렵다는 거야? 결혼까지 하면서. 그러니까 그런 생각 버리고, 그걸 기꺼이 받아들이면 수행자가 되는 게 좋고, 기꺼이 안 받아들이고 억지로 받아들이면 수행자가 제일 힘들어. 경전을 읽으면 늘 욕심 버려야 되는데, 지는 욕심을 차려야 되고. 자기는 대중 앞에서 늘 버리라고 가르치고, 지는 또 챙겨야 되고. 그게 어찌 보면 나쁜 놈이라고 평가 될 수도 있지만, 어찌 보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야.

 

늘 자기가 모순적으로 살아야 되잖아. 그지? 세상 사람들은 돈 벌어서 잘 사는 게 목표이기 때문에 돈을 버는 건 괜찮은데, 늘 사람들한테 반대 얘기를 하고 지는 챙기고.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비난받을 뿐만 아니라, 자기 개인도 굉장히.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면서 보면 늘 허위세계에서 살아야 되는데, 수행자가 되려는 건 좀 솔직하게 살고 싶은 거 아니야? 그런데 수행자들이 제일 세상 사람보다 더 덜 솔직하게 산다고. 더 모순적으로 산다. 이 말이오. 그렇게 살면 자기를 불행하게 사는 거야.

 

그렇게 살 바에야 신자가 되어서 착실하게 사는 게 낫고, 적어도 교무가 되려면 이 삶이 나한테 기꺼이 좋은 쪽으로 받아들여지도록 해야 되고, 물론 까르마, 살아온 습관이 있으니까 그게 어려워. 생각은 되는데, 실제는 아까처럼 옆에서 어렵듯이, 그러니까 세속에 살든 어디에 살든 자기 업을 어느 정도는 컨트롤 해 줘야 되는데, 이걸 참아서 컨트롤 하는 건 안 돼. 이걸 기꺼이 받아들이고, 안 되는 거는 항상 알아차리고, 뉘우치면서 개선해 나가려는, 이런 마음으로 딱 하면, 이게 출가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어?

 

그거야 말로, 밥 주지, 사람들이 인사해주지, 그러니까 이런 강의도 마찬 가지오. 강의 준비하는 사람이 힘들지, 강의하는 내가 힘들게 뭐 있어? 차려놓은 밥상에 밥 먹는 거 하고 똑같은데. 그러니까 이 삶의 기쁨을 이런 삶의, 그러니까 세속적 가치관을 바꾸어버리면 이 삶이 굉장히 좋아. , 늦게 들어가다 나 같으면 누가 해외 갔다 오든, 늦게 들어오든, 잔소리하는 마나님이 있나, 짹짹 거리는 애가 있나, 얼마나 좋아. 그런데 이 생각을 따로 또 하는 사람은 힘들어. 새벽에 일찍 일어나니 졸린다. 참선을 하니 허리 아프다. 염불하려니 목 아프다.

 

고기도 못 먹지, 혼자 사니 외롭다. 이런 식으로 문제를 삼으면 이 세상에서 제일 힘든 게 출가생활이라고 볼 수 있고, 이렇게 입장을 바꾸어놓고 보면 천하제일 편한 게 뭐다? 이 출가생활이오. 아무것도 걸릴 게 없잖아. 그러니까 그래도 부모는 내가 낳아줬기 때문에 인연이 남아있어서 그 인연 끊기도 힘드는데, 뭘 또 새로 인연을 맺어서, 아내인연 맺고, 자식인연 맺어가지고 얽히고 살려고 그러냐? 이렇게 생각을 놔서, 부모는 맺어진 인연, 그것도 사실은 끊기 힘드는 걸 경험해 보면 알잖아. 그래도 그것도 끊는데, 나쁘다고 끊으면서 새 인연 맺을 게 뭐있냐? 이렇게 생각을 확 바꾸어버리면 문제가 안 돼.

 

내가 언젠가 단식을 했어요. 북한 돕기. 정부에서 하라고 단식을 했는데, 그런데 이 단식을 할 때 누가 물었어. “스님 배 안 고파요?” 그래. 그걸 질문이라고 하나? 그런데 배고프지.” 그러니까. “배고픈데 왜 해요?” 그런데 사람은 먹어야 하고, 안 먹으면 배고프고, 배고프면 먹어야 하는 게 일상생활이야. 그러나 우리가 어떤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어때요? 그 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먹는 걸 놓을 수도 있고, 자는 걸 놓을 수도 있고, 여러분들도 그래요? 안 그래요? 그렇잖아. 그러니까 정말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죽는 것보다도, 사는 게 제일 사람에게 중요한데, 그것도 놓을 수 있을 각오를 우리가 하잖아.

 

그러니까 사람이라는 건 성적욕망이 있을까? 없을까? 있겠지. 또 좋은 침대에 자는 거 하고, 바깥에 침낭 갖고 자는 거 하고, 좋은 침대에 자는 거 나는 몰라서 안자는 줄 아나? 그러나 정말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우리가 어떤 가치를 줄때는 그게 그런 것도 있지만, 그게 부차적이 된다는 거요. 더 중요한 것을 위해서는 나머지는 우리가 무시하고 갈 수 밖에 없다. 그런 관점을 딱 가지고 우리가 나아가야 된다. 즉 모든 욕망이 없어서가 아니야. 욕망도 있지만, 욕망보다 더 한 자기의 원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향해서 갈 수 밖에 없고, 그러다보면 욕망이 그루터기에 걸려 넘어질 때도 있고, 자빠질 때도 있지만, 거기에 주저앉지 말고 일어나서 다시 나가는.

 

그러나 그것을 자기가 스스로 결정해야. 아까처럼 오리를 가자면 십리를 가주는 식으로, 스스로 결정해야 이 수행 생활이 기쁨으로 가지, 그렇지 않으면 어려워. 그러면 얼굴이 수행자들이 얼굴이 밝아야 되는데 얼굴이 어두운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오직 사명감으로 각오와 결심으로만 하는 사람들이 많아. 그러면 안 돼. 다 수행이든 종교든 행복하려고 해요? 괴로우려고 해요? 행복하려고 하는데, 뭣 때문에 선택해 괴롭게 살아? 그러니까 4학년 졸업할 때까지 생활해보고, 내가 까르마가 컨트롤이 잘 안된다하면 그냥 세속으로 착실한 신자로 생활하는 게 나아. 여러 가지 까르마도 못이기는 것도 있지만, 그러나 그것을 이겨내는데, 그걸 힘들어 안하고, 기쁨으로 여기고, 열 번 넘어지면 11번 일어나고, 100번 넘어지면 101번 일어나겠다. 이런 마음이 스스로 일어나면 출가의 길을 가도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