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 역사 991

삼국지 36 - 동탁 토벌 음모 & 조조와 여백사

189년, 9살의 황제인 헌제가 등극한 지 한달 뒤 동탁은 신하의 신분으로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벼슬인 상국(相國)이 되었습니다. 동탁은 황제 대행이라는 권력의 정점에 올라서게 되자 포악한 성품을 그대로 드러내며 자신에게 반박하는 자는 그 자리에서 목을 쳐내거나 궁녀들과 공주 등 눈에 보이는 여자들을 닥치는 대로 겁탈하고 다니며 폭정을 일삼았습니다. 조정을 손아귀에 넣고 권력을 남용하는 동탁을 보고 있자니 기존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고위 관료들이나 지방의 자사들은 영제와 환관의 시대에 이어 또다시 한숨과 걱정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명문 출신의 고위 관료들이 볼 때 그나마 환관 시절만 하더라도, 한나라의 정통성에 있어 황제로부터 합법적으로 절차를 받은 자들이 나라를 다스렸는데 반해 동탁의 상국 벼슬은 ..

삼국지 35 - 동탁의 폭정

십상시의 난 이후, 어린 황제가 도주하는 등 궁정의 대혼란을 겪은 와중에 동탁은 황제의 신변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면서 무혈입성으로 낙양을 차지하고 동시에 여포를 손에 넣었습니다. 대부분의 조정 내 신하들과 장수들은 대군을 이끌며 낙양에 입성한 동탁을 보고서 어쩔 수 없이 상황을 그저 두고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탁은 조정 내 가장 경계하고 있었던 원소를 불러 이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황제 폐립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들었고 이에, 원소는 동탁의 야욕에 놀라며 그 자리에서 나와 낙양을 떠나, 기주로 향했는데 이때, 낙양성문에다가 ‘언젠가 동탁의 목을 칠 것이라’는 부절을 걸었습니다. 동탁은 원소가 자신에게 따르지 않는 것에 분노하여 지명수배를 내려 원소를 잡아들이려 했지만 원소와 가깝게 지내던 사이였던 오..

삼국지 34 - 동탁 & 여포

십상시의 계략으로 대장군 하진이 처형되자 분노한 원소가 군사를 이끌고 궁궐로 쳐들어가서 약 2,000여 명의 환관이 살해당하는 ‘십상시의 난’이 벌어졌습니다. 원소는 기민하고 주저 없는 판단력으로 무자비하게 환관들을 모두 처치하고서는 권력투쟁의 승리자가 되는 듯하였지만 살아남은 환관들과 어린 황제가 도망가는 대혼란을 틈타 동탁이 황제의 신변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였고 동탁은 3,000명의 군사를 대동하여 궁성 주변을 장악하며, 낙양에 입성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동탁의 입성에 대해서 중앙 정부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던 원소, 원술이나 하진이 지휘하던 부대들은 동탁에게 그리 위압감을 느끼지 않았는데 동탁의 병력들이 수천 명 정도라는 예상과는 달리 거의 일주일 동안 계속해서 새로운 군사들이 도착하는 모습..

삼국지 33 - 십상시의 난 & 동탁

189년, 한나라는 영제 사후 대장군 하진이 주요 권력을 잡고서 원소의 독촉으로 십상시를 압박하던 도중 궁지에 몰린 장양을 비롯한 십상시는 되려 하진을 함정에 빠뜨려 처치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른 조서를 위조하여 그간 환관들과 가깝게 지내온 번릉과 허상을 각각 사례교위와 하남윤으로 임명했습니다. 하지만, 하진의 충직한 부하였던 오광과 황실 근위대의 지휘 책임자였던 원술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이에 놀란 장양과 무리들은 태후와 어린 황제를 협박하여 유협인 진류왕을 함께 데리고 도망쳤습니다. 환관들은 북궁으로 통하는 통로를 따라 도망가다가 멀리서 환관들을 찾아 나서던 노식과 마주쳤는데 무기를 들고 있던 노식이 환관 단규를 향해 소리치자, 놀란 단규가 하태후의 손을 놓쳤고 이 틈을 타 하태후는 혼자서 도망을 쳤습니..

삼국지 32 : 십상시 장양의 노여움

영제 사후, 소제의 시대로 접어들어 군권 장악은 대장군 하진에게 모두 집중되면서 하진은 오랜 세월 동안 환관들과 대립각을 세워온 사대부들의 환관 숙청 바램을 모른 채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계획이 틀어질 경우 십상시가 정치적인 압력을 가하여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생각에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원소가 전국에 있는 명장들과 군벌들을 낙양 근처로 불러들여, 대규모 병력으로 하여금 환관들을 말소시킬 수 있는 명분을 만들자고 제안했고 하진은 원소의 제안에 적극 찬성하였습니다. 주목받는 이들로는 이미 서량의 난을 제압한 후 조정으로부터 군대를 반납하라는 명을 어기고 장안에서 추이를 관망하고 있던 동탁과 무예와 용맹이 뛰어난 병사들을 이끄는 무맹도위 정원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무맹은 ..

삼국지 31 : 환관 숙청 계획

189년, 영제가 세상을 떠난 뒤, 소제가 후한의 13대 황제로 즉위하면서 새로운 황제의 시대로 접어들자 궁궐 내 권력 중심의 기류는 기존 십상시 무리들에서 하태후의 오빠인 하진 중심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건석은 환관의 세상이 완전히 끝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소제를 폐하고 동시에 하진도 함께 처리하여 다시 왕을 내세우자고 십상시를 설득했지만 십상시는 쿠데타 계획이 무모하다 판단하였고 되려, 건석의 역모를 하진에게 일러바치면서 건석은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이제, 조정은 하진의 천하가 된 듯 하였으나 환관들은 우선은 자신들이 살기 위해 건석을 버리면서도 한편으로는 하진을 견제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습니다. 소제의 어머니 하태후와 맞서기 위해서는 환관들은 기존 영제의 모친인 동태후와 그의 조카 동중을 중심으..

삼국지 30 : 하진 vs 건석

189년, 후한 제12대 황제인 영제가 갑자기 영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궁궐 내 분위기는 하태후, 유변을 지지하는 하진 중심 세력들과 동태후, 유협을 지지하는 동중 세력들로 나뉘어졌습니다. 건석은 영제가 죽기 직전, 유협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공식적으로는 후계자를 정해놓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장남인 유변이 후한 13대 소제로 즉위하였습니다. 새로 즉위한 소제는 10대 초중반의 나이로 어머니 하태후가 정사를 대리하였고 외숙부 하진과 원소의 숙부 원외가 정사를 보좌했습니다. 소제의 시대로 접어들며, 권력 중심에 한층 더 가까워진 하진은 우선순위로 평소 자신을 노리고 있던 건석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하진은 대장군 자리까지 승진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으로는 스스로 천민 출신이라..

삼국지 29 : 영제의 사망 그 후..

후한 말기. 영제의 외척인 하진은 키가 큰 미인, 누이동생 ‘하태후’라는 배경 덕에 대장군까지 승진하며, 권세를 누렸습니다. 하진은 황건적의 난 때 대장군이라는 직책으로서 당고의 난 이후, 환관들에게 억류되었던 청류파 인사들을 구하는데 앞장섰고 점차, 청류계 사이에서 명망을 넓히며 십상시들마저 압박하는 위치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황건적의 난을 진압한다거나 청류파 인사들을 환관들로부터 보호해 주는 모습과는 별개로 하진의 개인적인 권력 욕심은 끝이 없었습니다. 영제와 하진의 누이동생 하 황후 사이에는 황자 유변이 있었는데 영제는 유변보다 왕씨 사이에서 낳은 유협을 더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왕씨의 본명은 왕영, 통칭 왕미인으로 불리는 후궁으로 지체가 높은 집안의 출신이며 총명하고 영리하여 궁중에 선발되었..

삼국지 28 : 명문가의 천출, 원소

황건적의 난이 진압되었을 무렵 기도위로 활약했던 조조는 제남상으로서 빼어난 행정 능력을 보였으나 조정에서는 조조의 재능을 탐탁지 않게 여겨 제남상 자리를 박탈시켰습니다. 조조는 중앙 정부에서 잠시 벗어나 고향에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조조와 친한 친구 사이였던 원소는 대장군 하진의 신임을 얻어 ‘호분중랑장’으로 승진했습니다. 중랑장이라는 직책은 부서에 따라 황제의 호위와 궁중의 경비를 맡거나 혹은 밖으로 정벌을 나가는 역할 등을 맡은 직책이었습니다. 한 예로,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황보숭은 좌중랑장, 주준은 우중랑장, 노식은 북중랑장, 동탁은 동중랑장을 임명받았습니다. 황건적의 진압 후에는 인사이동이 일어났는데 중랑장 중에서 원소는 주로 황제의 근위대장 역할을 하는 ‘호분중랑장’으로 젊은 나이..

삼국지 27 : 조조의 친인척 4인방 장수들

황건적의 난을 진압할 때 기도위로 출전해 공을 세운 조조는 제남상으로 임명된 후, 뛰어난 행정을 이끌어 전국의 관리들에게 모범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남에서 오랫동안 자리잡고 있던 환관들의 친인척인 귀척들은 자신들의 이익이 줄어들자, 조조를 탐탁지 않게 여겼고 결국, 조정에서는 귀척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조조를 제남상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습니다. 황제와 주변 무리들은 백성들의 삶이 피폐하여 전국 각지에서 끊임없이 난이 일어나는데도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는 데만 관심이 있으니 조조는 잠시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낙향을 결심하게 됩니다. 고향에 있는 동안 조조는 앞으로 나라의 혼란이 올 것에 대비하여 독서와 산책 등을 통해 자기계발에 힘쓰며 친인척 4인방 장수들을 비롯한 무리를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조조의..

삼국지 26 : 조조 & 유비 첫 만남

삼국지에서 가장 대립 관계에 놓여있는 두 인물 조조와 유비의 첫 만남은 언제였을까요?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가 의용병을 이끌고 황건적을 토벌하던 중, 전장에서 우연히 조조를 만나지만 역사 기반의 정사 삼국지 기록은 황건적 난 때, 유비의 존재는 매우 미미하였고 조조는 조정에서 주목받는 젊은이로써 기도위에 임명되어 당시, 둘의 만남은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기 어려웠습니다. 후한 말에는 184년부터 황건적의 난을 비롯하여 서량에서는 양주의 난, 하북에서는 장거 장순의 난 등 여러 차례 중앙 정부를 향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유비는 장거 장순의 난 때 참전하여 반란을 제압한 공으로 기주 안희현의 현위가 되기도 했지만 군의 감찰관인 독우를 폭행한 죄로 도망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 후로, 황건적의 난 때 진압된..

삼국지 25 : 공손찬 vs 유우

187년, 전 중산국상을 역임한 장순과 전 태산태수 장거는 삼군오환 및 선비족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켜 하북 지방의 백성들을 약탈하고 일대를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이때, 장순, 장거의 무리들을 제압하고 다니는 자는 ‘백마장사’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공손찬으로 그의 백마부대는 유주 지역에서 특수부대로 유명했습니다. 공손찬은 쉴 새 없이 반란군들을 쫓아다니며 각종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이어 나갔고 반란 무리들을 토벌하고 다닌 공으로 기도위로 승진했습니다. 하지만, 그 수가 워낙에 많았던 삼군오환 무리들은 공손찬의 활약에도 세력이 줄어들 기세가 보이질 않았고 되려, 삼군오환 무리들을 맹렬히 추격했던 공손찬 부대는 요서 관자성에서 구력거에 의해 포위되었습니다. 구력거는 요서군에서 장순, 장거의 반란을 후원한 인물로..

삼국지 24 : 유비의 출정 & 대장군 하진

187년, 장거와 장순은 오환족의 수령 구력거와 난을 일으켜 유주, 기주 일대를 약탈과 노략질을 하며 약 10만 여명의 백성들이 죽게 됩니다. 조정에서는 유주를 포함한 해당 인근 지역 4개 주에 조서를 내려 병력을 동원했는데 청주에서는 평원의 유자평이 무용에 능하다는 유비를 추천하였고 유비는 관우 장비와 함께, 장거 장순을 토벌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성장기 때 어머니를 도와 짚신 장사를 하던 유비는 성인이 되어서는 장사를 그만두고 백수로 지내면서 호걸, 건달들과 어울리며 마을에서 인지도를 넓혀 갔습니다. 하지만, 재력이나 가문의 힘을 갖지 못해 기반이 약했던 유비는 관직에 천거할 생각은 아예 할 수조차 없었고 황건적의 난 때도 눈에 띄는 기회를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유자평의 추천을 받고서는 자..

삼국지 23 : 유비 관우 장비

후한말 187년, 후한의 장수였던 장순은 장거를 설득하여 오환족과의 연합 구력거와 함께 모반을 일으켰습니다. 이들은 요서, 요동속국, 우북평 오환 등, 삼군 오환의 우두머리가 되어 유주, 기주 등을 노략질하였고 이로 인해 10만여 명의 일반 백성들도 살해되었습니다. 이에 맞서, 공손찬은 자신의 병사들을 이끌고 장순의 무리들을 추격하며 토벌에 앞장섰으나 반란의 규모가 너무나 컸던 지라, 단숨에 세를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조정에서는 유주, 기주, 청주, 서주 4개 주에 조서를 내려 병력을 동원하였는데 청주에서는 평원 사람 유자평이 유비를 추천했습니다. 당시, 유비는 탁현 현령으로 부임했던 공손찬과 각별히 친한 사이로 이름이 알려지고 있었고 무엇보다 유비의 강점으로는 사람을 이끄는 매력이 있었습니다. 소설 ..

삼국지 22 : 동부의 맹장, 공손찬

유비와 함께 노식의 문하에서 수학했던 공손찬은 평소 전장에서 주로 뛰어난 궁수 수십 기를 데리고 다녔는데 모두 백마를 이끌고 다녀 백마장사라는 별명이 있었습니다. 공손찬의 집안은 대대로 태수급 고관의 가문이었지만 어머니의 신분이 낮아, 적자가 아닌 서자로 성장했습니다. 이러한 출신 때문에, 성인이 되면서도 고위 관직으로서 진급하는 기회가 없었고 공손찬은 문하서좌라는 말단 관리 자리를 맡았습니다. 문하서좌는 공문서를 정리하는 관리로 비서역의 말단 자리였지만 그는 자신이 맡은 말단 자리에 대한 불만보다 최선을 다해, 다른 이들보다 탁월한 정리 능력을 보였습니다. 각 부처마다 견해가 종합적으로 여러 차례 쏟아지는 만큼 넓고 포괄적인 사무들이 복잡하게 얽혀있었는데 공손찬의 손을 거치면, 짧게 정리되면서도 논리정..

삼국지 21 : 동탁 황보숭 & 손견 동료들

서량이라 불리는 양주 지역에 대한 후한 정부의 통제력이 크게 약화되자 184년부터, 북궁백옥과 이문후를 중심으로 양주의 난이 일어납니다. 반란군의 기세는 좀처럼 꺾이지 않았는데 이들의 세가 확장되어 가는 동안 양주 반란군 내부에서도 세력 다툼으로 인해 북궁백옥과 이문후를 비롯한 수뇌부 대부분은 한수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한수는 여러 지역 반란군들을 한 세력으로 통합한 뒤 왕국을 반란의 우두머리로 추천하였고 한수와 마등은 의기투합하여 한나라 중앙 정부를 위협했습니다. 조정에서는 서량의 난을 진압하는 데 실패한 장온을 면직시키고 명성이 자자한 황보숭과 동탁을 불러, 새로운 정부군을 구성했는데 총지휘권은 과거 황건적의 난을 진압했던 황보숭에게 맡겼습니다. 하지만, 동탁은 이러한 조정의 처사에 불만이 쌓였습니..

삼국지 20 : 동탁을 따르는 자들

184년부터 시작된 서량(양주)의 난은 황건적의 난 때와는 달리, 전문적이고 조직화 된 반란이었습니다. 변장ㆍ한수의 난이라고도 불리는 이 반란은 백성들의 삶을 힘겹게 하는 십상시의 무리들을 파멸시키겠다는 명분을 걸고 중앙 권력을 위협하였습니다. 서량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새롭게 구성된 군대는 장온을 중심으로 휘하 6개의 부대로 구성되었는데 이 중, 주신 부대를 포함한 5개 부대가 전투에서 궤멸당했습니다. 살아남은 부대는 동탁이 이끄는 3만 명의 병력으로 동탁의 부대는 난의 진원지를 치기 위해 적진 깊숙이 침투해 있었습니다. 동탁은 적의 근원을 도려내고자 했으나 따라오는 후방의 부대들이 모두 붕괴되면서 되려, 강족과 호족들에게 포위당하며 고립되고 말았습니다. 장온이 주도한 작전에 따라 선봉에 나선 동탁..

삼국지 19 : 서량의 난 ( 양주의 난 )

서기 184년. 한나라 영제와 십상시의 폭정은 백성들을 가난과 궁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이 때문에 전국 도처에는 지배층에 대항하기 위하여 황건적의 난, 연이어 도적떼들의 출몰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황보숭을 중심으로 한 관군들은 황건적의 난을 진압했지만 이때 살아남은 농민들은 그 후에도 해마다 각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중에서 세력이 큰 난으로는 100만 명에 이르는 세력인 장연의 흑산적과 서량 지역 양주에서 일어난 변장ㆍ한수의 난이 있었습니다. 원래 한나라 때는 장수라는 한 개인이 사병을 두지 못했는데 병사들을 거느릴 수 있었던 관직으로는 중앙 무관직의 대장군을 포함한 8명의 장군과 5명의 교위가 상설직으로 군대를 운영했습니다. 하지만, 한나라 외부 민족과의 전쟁이라든가 국내에서의 반란이 끊이질..

삼국지 18 : 역모를 꾀하는 자들, 가후 & 유언

후한 말 악정과 생활고에 시달리던 농민들은 어지러운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자를 찾아 나섰고 이러한 백성들의 분노는 황건적의 난, 오두미교의 등장, 흑산적의 활동, 변장ㆍ한수의 난 등의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184년에 일어난 황건적의 난은 황보숭을 비롯한 중랑장들과 관군들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백성들의 기대는 조정에 있지 않았고 심지어는 청류파 출신의 사족들 중에서도 점점 한나라 왕조에 대한 충성심이 옅어져 갔습니다. 얼마 전, 한나라 전체가 무너질 수 있었던 황건적의 물결에 이를 진압했던 일등공신으로는 황보숭이 있었습니다. 황보숭은 각지의 우두머리를 생포하거나 격파하고 거록군 광종에서는 야습으로 장량 부대를 대파해 장각 삼형제를 모두 토벌한 공적으로 기주 목 및 좌거기장군이 되었습니다. 그는 장군으로서의 ..

삼국지 17 : 오두미교 & 흑산적 장연

영제와 십상시의 폭정에 항거하기 위해 전국 단위로 일어났던 황건적의 난은 황보숭과 주준, 노식과 동탁으로 구성된 중랑장들의 지휘 아래 진압되었습니다. 하지만, 일반 백성들과 이를 진압하던 관군들의 처절한 싸움 후에도 십상시들은 문제의 근원을 해결하려 하지 않고 혼란이 진정된 후에는, 더욱 자신들의 안위에 힘을 썼습니다. 수많은 관료들은 황제에게 사리사욕을 밝히는 환관들을 참수해달라는 상소문을 끊임없이 올렸으나 그럴 때마다, 되려 십상시는 상소문을 올린 자들을 모함하는 내용으로 영제를 설득하여 그들을 옥에 가두거나 자리에서 파면시켰습니다. 조정 안에서는 권력의 질서조차 환관들의 손에 어지럽혀지고 있으니 그들의 관심 밖인 백성들의 삶은 나날이 궁핍해지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황건적의 난 이외에도 전국 각..

삼국지 16 : 십상시의 모함

서기 184년, 악정과 생활고에 시달린 농민들은 한제국을 뒤집고자 황건적의 난을 일으켰으나 교주 장각은 병사하고 동생들인 장량, 장보가 전사하여 중심 지도자가 없어진 황건적들은 관군들에게 진압되었습니다. 황건적을 진압하는 데 주력 장수였던 황보숭은 황제에게, 예전에 있었던 당고의 금 사건에서 억울한 누명을 덮어쓴 사인들을 풀어달라 요청했는데 영제는 평소 행실이 바른 환관인 여강에게 황보숭의 요청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의논했습니다. 여강은 스스로가 환관임에도 불구하고 환관의 대척점에 놓여있던 청류파 사인들을 풀어주는 데 찬성하였고 이어,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 주요 원인은 황제 가까이에 있는 환관들 중에 있다며 사리사욕이 심한 자들을 골라 숙청해야 한다고 간언했습니다. 여강의 말을 들은 황제는 지금의 조정 ..

삼국지 15 : 황건적 진압 & 여강

영제와 십상시의 악정에 시달린 농민들은 생활고를 못 이긴 나머지 장각을 중심으로 황건적의 난을 일으켰습니다. 황건적의 난은 초기에는 성공하는 듯 보였으나 황보숭과 휘하 조조, 그리고 주준과 휘하 손견의 진압으로 세력확장을 꾀하던 황건적의 세력은 한풀 꺾였습니다. 이어, 북중랑장 노식이 기주 방면의 진압군을 통솔하여 연전연승 끝에 장각을 광종으로 몰아넣었지만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조정으로부터 파직당하게 됩니다. 파직된 노식의 후임은 삼국지를 넘어, 중국사에서도 손꼽히는 악인으로 여겨지는 동탁이었습니다. 동탁은 선임이었던 노식이나 조심성이 많은 황보숭과는 달리 거친 성정을 가졌으며 결과를 내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과를 낸 후에는 수고를 한 부하들..

삼국지 14 : 노식의 단호함

184년, 태평도 교주 장각을 중심으로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좌우중랑장에 황보숭과 주준, 북동중랑장에 노식과 동탁을 임명했습니다. 지난 삼국지 13편까지 형주에서의 황보숭과 주준의 황건적 진압에 이어 이번 영상에서는 기주, 유주 등 북방에서 황건적 토벌을 책임져야 하는 북중랑장 노식에 대한 이야기로 풀어보겠습니다. 노식은 유비와 공손찬의 스승으로 알려진 인물로 키가 현대 사회 기준 195cm에 해당하는 8척 2촌이었으며 젊었을 때부터 청렴하고 강직한 학자로서의 명성을 떨쳤습니다. 그는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기 10년 전인 175년에 구강군과 여강군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무력의 힘이 아닌 학자의 힘으로 반란을 진압했습니다. 노식이 구강군에서 일어난 반란에 대한 대처법으로는 ..

삼국지 13 : 주준 vs 황건적

후한 12대 황제인 영제와 십상시의 타락한 통치 아래 184년 태평도 교주 장각을 중심으로 황건적의 난이 일어납니다. 이들은 전국 각지에서 난을 일으켜 주, 군의 관리들을 죽이고 마을을 불태우며 백성들을 상대로 마음대로 죽이거나 약탈하였고 조정에서는 황건적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좌우 중랑장으로 황보숭과 주준을 임명 북동중랑장, 노식과 동탁을 임명했습니다. 지난 영상인 채널 내 재생 목록 삼국지 12편에서는 경험 많은 황보숭과 그를 도와주었던 젊은 장수 조조가 영천군 장사에서 1만여 명의 황건적을 물리친 내용을 다루었습니다. 한편, 우중랑장으로 임명된 주준은 양주 회계군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비단 장사를 하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주준은 고향에서 효성이 지극하기로 이름이 났으며 ..

삼국지 12 : 황건적의 난 & 도원결의

(蒼天已死 黃天當立 歲在甲子 天下大吉) 창천이사 황천당립 세재갑자 천하대길 푸른 하늘은 이미 죽었으니 마땅히 누른 하늘이 서리라. 때는 바로 갑자년 천하가 크게 길하리라. 중국의 한나라 말기 영제가 통치하던 184년. 부패한 정권과 잇따른 정쟁 속에 백성들의 삶은 점점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에, 태평도의 교주 장각은 황색 두건을 머리에 두른 농민반란군, 황건적을 이끌고 난을 일으켰습니다. 장각의 초기 계획은 184년. 3월 5일 낙양 안팎으로 동시에 거사를 일으켜 단숨에 정권을 뒤집으려고 했으나 제자인 당주가 장각을 배신하여 수도로 가서 황건적 난에 대한 사실을 모두 고발하여 낙양 일대에서 1천여 명의 태평교도들이 피살되었습니다. 장각은 당주의 배신으로 인해, 당초 수도를 한 번에 점령하..

삼국지 11 : 황건적 장각

후한 말기, 후한의 12대 황제, 영제는 십상시와 더불어 돈을 주고 벼슬을 살 수 있는 매관매직을 공식화 함으로써 한나라의 정치는 날이 갈수록 어지러워졌습니다. 조정에서는 백성들의 삶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아 자연재해와 기근을 대비하는데도 소홀히 하여 각지에서는 농민들이 모여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중에서도 태평도(太平道)의 교주 장각이 이끄는 황건적은 종교 무리인데도 불구하고, 무장을 한 농민들이 군대와 같이 훈련에 매진하며 세를 확장해 나갔습니다. 교주 장각은 젊은 시절, 글공부에 뜻이 있었지만 귀족 집안의 자제도 아니었고, 아울러 관직을 얻기 위한 주변에 자신을 추천해 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출사의 꿈을 접은 장각은 어린 동생들을 돌보며 이른 나이부터 짐을 나르거나, 장사를 도우며 생업에 종사했습니다..

삼국지 10 : 조조 상소문을 올리다.

조조는 청년기 시절 낙양에서 소문난 재능을 가진 젊은이였지만 당시에는 사대부들에게 추천을 받아야만 벼슬에 오를 수 있었던 향거리 선제로 인해, 조조의 앞길은 막막했습니다. 환관의 손자라는 배경은 사족(士族)으로부터 배척당하였고 이에, 관직을 구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우여곡절 끝에 교현, 허소 등 명사들의 평가를 받으며 명문거족 사마방의 천거를 받아 벼슬을 얻게 됩니다. 20세 무렵의 조조는 또래의 명문 귀족 자제들보다는 상대적으로 보잘것없는 직급이었던 수도 북문의 경비대장, 낙양북부위를 맡게 됩니다. 삼국지 시대, 조조의 위나라 적국이었던 오나라 신원미상의 인물이 쓴 조조의 전기 이라는 책에서는 조조가 낙양북부위직을 맡았을 때의 일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적국 오나라에서 쓰여진 책, 조만(曹瞞)전은 ..

삼국지 9 : 손견

고대 중국, 후한 시대에서 삼국 시대로 접어들 무렵 남동부 지역에는 현재 중국의 저장성, 장시성 등이 포함된 양주 지역이 위치해 있었습니다. 양주의 첸탕강, 한국어로는 전당강이라 불리는 강의 부둣가에는 평소처럼 짐을 싣고 부리는 상인들의 움직임이 분주했습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어디선가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는데 이는 물가에서 노략질하는 수적들이 나타났다는 신호로 사람들은 짐을 버리고 도망가기 바빴습니다. 당시, 남부 지방에서 악명높았던 수적인 호옥은 사람들을 위협해 물품들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겁탈하며 짐꾼들은 손에 잡히는 데로 베어 죽이는 노략질을 일삼았습니다. 큰 칼과 무기들을 들고 나타난 수적들을 피해 강의 하류 쪽으로 도망간 배들은 얼른, 이들이 재물을 갖고 떠나기만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이때,..

삼국지 8 : 유비 공손찬 & 노식

서기 161년. 낙양으로부터 동북으로 1800리 떨어진 유주 탁군 탁현에서 유홍의 아들로 태어난 유비는 조조보다 6년 늦게 세상에 나타났습니다. 탁현은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누상촌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데 누상촌은 누각처럼 큰 뽕나무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유비의 집안은 기원전 2세기 전한 시대의 황제 경제(景帝)의 아들 중산정왕 유승(劉勝)의 먼 후손으로 황족이긴 했지만, 광무제 계열이 아니라 황족의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삼국지에서 가장 많은 매니아층을 보유하고 있는 유비는 황제 가문의 피를 이어받은 정통파 계열로 수많은 역경을 참아내고 딛고 올라서며 조조의 천하 통일을 막아낸 인물로 유명합니다. 어린 시절 홀어머니와 함께 돗자리를 팔고 신발을 팔며 생계를 이어간 유비가 조조나 원소 ..

삼국지 7 : 조조 & 허소

전한, 후한 시대에는 인재를 선발하기 위해 보편화되었던 관료 임용 제도로 향거리선제가 있었습니다. 향거리선제는 지방관이나 지방의 유력자가 우수한 인재를 찾아내어 추천하는 방식으로 당시, 중요시 여기던 유교적 도덕 규범에 따른 관리 선발 제도였습니다. 무조건적인 추천제 방식으로만 끝나는 것은 아니었으며 우선은 지방에서 인재를 추천한 다음 황제의 시험을 거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삼국지 배경이 되는 후한 말에는 영제와 십상시 주도 아래, 시험을 치르는 과정보다 매관매직이 공식화되면서 향거리선제 또한 무력화됩니다. 어느덧 조조는 소년배 우두머리 시절이 지나 청년기에 접어들었는데, 조조는 향거리선제의 천거 방식에 상당히 불리한 입장에 놓여 있었습니다. 조조의 조부, 조등은 5대째 황제를 모셔 온 환관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