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림의 필요성에 대해서 말씀을 드릴게요.
여러분이 오늘 특강을 듣고
또는 이것을 동영상으로 보시고
어떤 깨달음이 오시는 분도 분명히 계실 것이고
아니면 아직도 알쏭달쏭해서 한 번 더 봐야 되겠다.
그럼 두 번 세 번 보세요.
왜냐하면 여러분이 보시면서
쉼 없이 머리를 작동해서
제가 하는 말의 진의를 그대로 전달받지 못하시고
자기 생각으로
“아, 저건 이 말이구나” 하고 이해했다고 치고
또 대충 적당하게 넘어간 그게 분명히 있을 거예요.
그걸 없애기 위해서 다시 보시라는 거예요.
--자기 오온에 자꾸 속지 말라!
이렇게 우리는 자꾸 평등지 자체가 되지 못하고
차별지 속에서 평등지를 헤아리고
차별지 속에서 평등지를 이해하고
차별지 속에서 공을 알았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살아온 이러한 과거에 이런 업습 때문에
식스존을 자기라고 붙드는 이 업습 때문에
자꾸 자기 생각에 속아 넘어가는 거예요.
자기 오온에 자기가 속아요.
그러니까 이거는 다시 말하면
주인이 머슴한테 속는 격이야.
--참생명으로 거듭나려면?
한번 상상을 해봐요.
뭐 정 안 되면 상상이라도 해봅시다.
이 세상이 정말 무한하고, 전지전능하고
그리고 커다란 참 생명으로 꽉 차 있고
그 생명이 정말 전지전능한 능력을 발휘해서
모든 걸 이렇게 만들고, 나타내고
그것 속에 깃들어서 그것한테 의식을 넣어줘서
그것들이 이렇게 자기라는 분별망상까지 하게 만들어 줬다면
그것을 한번 우리가 생각해 보고
원래 그런 걸 다 만들고
이 분별망상을 일으키게 하는 것까지도 허용하고
우리한테 그런 자유까지도 주는 이 자리야말로
얼마나 경이롭고
얼마나 자유스럽고
얼마나 사랑이 충만하며
얼마나 관대하고
얼마나 평화스럽고
얼마나 온유합니까?
기가 막히지 않아요?
그걸 한번 느껴봐요.
이게 참생명으로 거듭나는 길이에요.
그게 진짜 나라고.
모든 종교는
궁극의 이거를 만나고
이것과 합체해서
하나 되는 거를 지향할 뿐이에요.
근데 다 제각각 자기 분별을 떨고 있죠.
온갖 이름을 다 갖다 붙이고.
그래서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생동감이 넘칠 수밖에 없어.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 우거지상이다?
“아, 무아다, 공이다” 이러고 앉아 있으면
그거는 아상법상에 떨어진 거예요.
여러분 애들을 봐요.
애들이 아무런 것도 안 배워
애들은 무학이야, 무학 무학대사의 무학이라고.
무학이 진리야.
무학인 애들이 어떡하고 있나 봐요.
애들이 “어음” 하고 이렇게 하고 있어요
아니면 지 멋대로 자유스럽게 뛰어놀고 난리 법석을 치고 있어요?
난리법석이죠.
걔들이 무슨 분별이 있어?
그래서 지랄정신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 정말 자유스럽고, 천진난만하고, 경이롭고, 행복하고
아무 걱정 근심 없는 그 자리가
열반의 자리고, 본성의 자리고, 본래면목의 자리고, 하나님 부처님의 자리고
그게 참나고
그게 나예요.
그게 나의 본모습이라고.
그러니까 거기에 불순물이 끼지 않게 하기 위해서
오온개공을 하라는 거지.
무슨 오온개공해서 무슨 부귀영화 누릴까 봐.
--응무소주 이생기심이 바로 깨달음, 참생명이다
이것이 바로 응무소주 이생기심이에요.
이 자리가 아무런 삼차원적 시공간이 없거든.
그러니까 응무소주지, 그렇죠?
아무것도 없는데
생명으로 충만한데
근데 여기서 마음을 일으켜서
이 몸 가지고 정말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보고
자유스럽게 살아 봐.
기쁨과 환희 속에서
모든 인간 몸으로서의 체험을 다 해봐.
그게 깨달은 자의 삶이에요.
제가 왜 지금 이 십몇 년 동안을 이런 짓을 하고 있느냐?
돈도 안 생기는데.
이유는 딱 하나뿐입니다.
일체가 다 난데
내가 밝고 환하면 좋지
내가 어둡고 찌그러지고 우울하면 안 좋잖아요.
근데 나인 이 법계의 그 어떤 일부분들이
계속 이렇게 괴로워하고,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어둠 속에 있는 거야.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해?
내가 할 길이 이것밖에 없잖아.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당신은 그렇지만 나는 아니요.”
이러지 마시고
좀 한 한마음이 돼서
적극적으로 동참해 주시면 얼마나 좋겠어.
--깨달음의 체험이란?
그래서 이 깨달음의 체험이라는 거는
여러분 잘 봐요.
인류 역사를 보면
생명이라는 건 한 번도 끊어지거나 중단된 적이 없어요.
여러분의 몸뚱아리는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죽고 하지만
생명은 한 번도 그냥 여여한 거예요.
제 자리에서
안 그래요. 그렇죠?
벚꽃나무 이야기 한번 기억해봐요.
벚꽃나무는 항상 여여해.
벚꽃은 매년 피구져.
벚꽃이 자기를 벚꽃이라는 형상물체로 볼 때는
자기는 생사가 있지만
“자기가 벚꽃나무 생명이구나.”
이걸 깨달으면
이 꽃이 피고 지는 건 아무 상관이 없는 거야.
왜?
본래인 생명이
잠시 그런 꽃의 모양으로 나타났을 뿐이지
본질은 생명이거든.
그래서 오온, 분별, 선악까지도
전부 다 이 생명력의 변화된 모습이에요.
이게 전지전능하기 때문에
이렇게 다양하게 변하는 거예요.
그래서 일체가
번뇌조차도 진리가 드러나는 소식이에요.
그래서 번뇌가 보리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번뇌도 보리니까 번뇌 실컷 하면 되겠네요.”
이런 망상을 떨면 안 되고.
--진정한 보림
보림이라는 게 뭐냐 하면
깨닫고 난 다음에 비로소 그때부터 수행이 필요한 거야.
그전에는 수행도 필요 없어.
깨닫고 난 다음에 수행이 뭐냐면
번뇌도 보리인 마당에
그러면 이 삶을 어떻게 보리로 충만하게 할 것인가?
이게 수행이에요.
그래서 육바라밀, 팔정도는
깨닫고 난 다음에 하는 거지.
깨닫기 전에 하는 게 아니야.
깨닫기 전에는 무슨 아무
별짓을 다 해도 전부 다 육바라밀도 아니고
전부 다 팔정도도 아니야
다 잘못된 거거든요.
여러분이 진짜 이 생명의 이 자리,
진리의 이 자리에 계시다면
뭐가 부족해요?
뭐 부족한 게 있나?
여러분이 무슨 생각을 일으킬 때만 부족해요.
안 그래?
여러분이 무슨 느낌에 집착할 때만 부족해.
여러분이 무슨 감정을 붙들고
그걸 ‘나’라고 여길 때만 부족해.
그 모든 것이 일어나기 이전
*!
이거를 듣고
이렇게 보고
이렇게 만지고
저절로 이렇게 하는 이 생명의 자리는
아무것도 부족한 적이 없어요.
우주조차 만들어지기 태초 이전부터
스스로 여여했어요.
시공간을 초월해서 이미 영생불멸이에요.
이게 여러분의 진면목이에요.
우리들의 분별 망상 속에만, 불행이 존재하고
우리들의 분별 망상 속에만, 부자유와 구속과 매임이 존재합니다.
다들 자기를 오온개공, 정견을 투철하게 하셔서
빨리 이 번잡한 생각, 감정, 느낌들로부터
대자유를 얻고
해탈하시길 바랍니다.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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