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인간관계에서 남의 눈치를 많이 보고 남과 나를 비교하며
내가 더 낫나 저 사람이 더 낫나 하는 생각을 먼저 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남을 평가하거나 남과 나를 비교하지 않고
내 삶의 주인이 될 수 있을까요?//
네. 우리가 어떤 손해가 날 때,
손해가 나는 줄을 모르면
그 손해나는 짓을 계속하게 됩니다.
그런데 손해가 나네‘ 이렇게 확인이 되면 손해날 일을 멈추죠.
일상적으로 그러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질문하신 분은
남하고 나하고 자꾸 비교하니까 내가 자꾸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그리고 인간관계도 좀 좋은 관계가 못 된다. 또 관계가 끊어진다.
그러면 내 개인은 스트레스를 받고 인간과계가 원만하지 못하면 손실이 생기고
또 관계를 끊어버리면 인적자신을 잃게 되지 않습니까.
그럼 손실이 많거든요.
손실이 많으면 그런 장사를 안해야죠 뭐,
즉 비교를 안해야죠.
비교가 되더라도, 그 동안에 그 장사를 많이 했기 때문에 습관이 되어서 비교가 되더라도
아, 이렇게 비교하면 스트레스만 받고 손실이 생긴다.
아, 이 비교하는 것은 멈추자.
이렇게 자기에게 손해가 나는 장사를 그만두는 그런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어떻게 하면 그만둡니까?
그건 뾰족한 방법이 없어요.
뭐든지 제일 그만 둘 수 있는 거는 ’손실이 난다‘는 것이 그만둘 수 있는 방법이거든요.
여기 컵이 있는데 제가 이걸 들고
“뜨겁습니다. 뜨겁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뭐라고 그럴까요?
“놔라” 이럴 거 아니오.
“그럼 어떻게 놓습니까”
놓는데 무슨 방법이 있습니까? 그냥 놓지.
우리가 어떤 물건을 들어서 뜨거우면
“앗 뜨거” 하고 놓지 않습니까?
뜨거운데도 계속 쥐고 있으면서
“어떻게 놓느냐” 이렇게 묻는 것은
놓는 방법을 몰라서 묻는게 아니고
놓기 싫다는 얘기에요.
“어떻게 놓느냐?” 이 말은
놓는 방법을 모릅니다가 아니라
“놓기 싫습니다”이 말이거든요.
놓기 싫다고 하니까 뭐예요?
저로서는
“그럼 들고 있어라” 이러죠.
“손이 데잖아요”
“그래, 손이 데야지”
그러니까 “뜨겁습니다, 어떻게 하면 놓습니까?” 이 말은
아직도 견딜만 하다 이 얘기에요.
정말 뜨거우면 탁 놔버립니다.
그런데 갖고 싶은 마음이 뜨거운 것보다 더 강하기 때문에
우리는 쥐고 있거든요.
정말 뜨겁다면 놓게 된다.
자기가 지금 스트레스를 받는데, 그 스트레스가 견딜만 하다, 이 얘기에요.
자기가 지금 손실이 아직 견딜만 하다.
그러니까 그런 소리를 하지, 그것 때문에 병이 났다.
즉, 담배 피우는 사람이 건강에 안 좋다.
그래도 견딜만 하다 이 얘기에요.
병원에 갔더니
“이렇게 하면 며칠내에 죽습니다.” 이러면 담배 대번 끊어버립니다.
제 아는 분이 있었는데 술을 너무 좋아했어요.
그런데 간이 나빠져서 결국은 사망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간경화가 되었어요.
간 이식수술을 했어요.
딸의 간을 잘라서 이식수술을 했습니다.
거의 뭐 죽었다 살아났다 이렇게 말할 수 있죠.
그래서 제가 만나서 물어봤습니다.
술을 너무 좋아하니까.
“요즘도 술 먹습니까?” 그러니까 웃으면서
“스님, 딸 간까지 내가 잘라서 이식했는데 술을 먹겠습니까?” 이래요.
그러니까 보통은
“아, 못 끊는다, 알코올 중독이다” 이러지만
목숨이 위태로우면 그것을 끊게 된다.
즉, 손실이 크면 멈추게 된다.
대부분 다 견딜만 하다, 이 얘기거든요.
그러니까 조금 더 견뎌보세요.
건강이 더 나빠지든지 손실이 많이 생기면
“더 이상 이렇게는 못살겠다” 이렇게 되겠죠.
제가 조금 악담을 해서 죄송합니다마는
그런데 실제로 그렇다는 거예요.
이것은 방법의 문제가 아니다. 이런 얘기에요.
그러면 사람을 비교한다, 사람하고 원숭이하고 비교해서 어떤게 더 잘났느냐?
이렇게 비교하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사람이 보면 사람이 더 잘났다 그러고
원숭이가 보면 원숭이가 더 잘났다 그러겠죠.
그런데 종과 다른 거를 같이 비교해서 어떤 게 더 잘났나?
이런 건 비교 대상이 안 되는 거죠.
그러듯이 이 세상 천하만물은
비교해서 어떤 것이 더 잘났다, 어떤 것이 더 못났다라고 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다 그것으로써 존귀하다.
여러분들이 콩을 한움큼 쥐고 볼 때, 어떻게 표현합니까?
같은 콩이라 하지만 그 콩끼리 비교해보면 어때요?
그 중에도 큰 게 있고 작은 게 있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런데 콩하고 팥하고 비교할 때는 뭐라고 그래요?
크고 작고 색깔이 다르고 따지지 않고 뭐라고 그래요?
같은 콩이라 그래요. 같은 콩.
그런데 콩끼리 비교할 때는 어때요?
이것은 파란 콩이다, 이것은 매주 콩이다, 이것은 검은 콩이다.
다른 콩이라고 그래요.
그러면 콩하고 팥은 채소하고 비교할 때는 뭐예요?
같은 곡류라고 그래요.
콩하고 채소는 하나는 채소이고 하나는 콩이죠.
다르다 이거죠.
그런데 또 옷하고 비교하면 뭐예요?
이건 같은 식품이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같다, 다르다‘ 하는 것은
존재에는 같은 것도 없고 다른 것도 없고
어떻게 비교하느냐에 따라서 용어를 같다고 쓸때도 있고 다르다고 쓸 때도 있다.
그래서 진실은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이렇게 말해요.
이걸 不一不異라 그래요.
여기서 一이라는 것은 하나다 둘이다 이런 一 二가 아니고
이때 一은 같다는 뜻이에요.
같은 것도 아니고
불이할 때 異는 다를 異, 다른 것도 아니다.
진실은 같은 것도 다른 것도 아니다.
다만 그것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비교해서 인식할 때
어떤 때는 같다고 인식하고 어떤 때는 다르다고 인식하는
이 인식상의 문제이지
존재에는 같은 것도 없고 다른 것도 없다.
우월한 것도 없고 열등한 것도 없다.
그러니까 여기 마이크가 있고 컵, 볼펜이 있다할 때
컵하고 볼펜하고 비교해서 어느게 크냐 그러면
컵이 더 크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컵하고 마이크하고 비교해서 어느게 더 크냐하면
마이크가 더 크다.
즉, 컵을 기준으로 해서 볼펜보다는 크고 마이크보다는 작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러면 컵 자체를 두고 크냐 작으냐고 물으면
크다고 할 수도 없고, 작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러면 이 크다고 할 수도 없고 작다 할 수도 없다,
이것은 존재의 성격이다,
이게 진실이다.
다만 그것일 뿐이다.
그런데 우리가 인식할 때는 항상 비교해서 인식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컵을 두고 크다고 말하는 사람은
뭔가 이것보다 작은 것을 상상하면서 비교해서 말하는 거에요.
이 컵을 작다고 말하는 사람은
이것보다 큰 거를 비교해서 인식하면서 말하는 거예요.
크다작다는 것은 존재 그 자체에서 오는 게 아니고
인식을 할 때, 비교해서 인식을 할 때 생기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가 크다작다하지만
그것은 존재로부터 오는 게 아니고 인식상의 문제다.
이것을 뭐라고 그래요?
일체는 다 마음이 짓는다바다.
이걸 한문으로 일체유심조, 이렇게 말해요.
일체유심조는
돌을 금이라하면 금이 되고
금을 돌이라하면 돌이 되고
이렇게 생각하는 게 일체유심조가 아니고
우리가 크다느니 작다느니 잘했다느니 못했다느니 옳다느니 그르다느니
예쁘다느니 안 예쁘다느니 하는 것은
존재로부터 오는 게 아니라 인식상의 문제다.
그런 얘기에요.
이걸 뭐라고 한다? 일체유심조다.
그런데 우리는 인식상의 문제를 존재의 문제로 착각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진실을 알지 못한다, 이렇게 말하거든요.
그 사람하고 나하고 비교해서 누가 더 잘났나?
이런 것 자체가 비교할 수는 있지만 무의미하다.
비교하면 어떤 부작용이 생기느냐?
“내가 잘났다” 하면 내가 우월 의식이 생겨서 남을 무시하는
교만함이 일어나고
“내가 못났다” 하면 내가 그 사람한테 비굴해집니다.
비굴해지면 내가 그 사람에게 잘보이려는 것은 비굴하다는 얘기거든요.
안 그러면 그 사람을 배척하는
그러니까 안보겠다는 것은 배척하는 거거든요.
나보다 잘난 것은 꼴보기 싫다, 없애버리겠다. 이런 적대감이 발생하게 된다.
그래서 내가 잘났다 하면 교만해지고
내가 못났다 하면 비굴해진다.
내가 만약에 돈에 집착을 하면
나보다 돈 많은 사람 앞에서는 내가 비굴해지고
나보다 돈 적은 사람에게는 무시하는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그런데 내가 돈에 집착을 안 하면
뭐 돈이 많든 돈이 적든 그거하고는 내가 그 사람을 대할 때 아무 차별이 없다.
평등하게 대하게 된다.
그럼 자기가 주로 상대편에게 비교할 때는 뭐로 비교합니까?
나이로 비교합니까? 얼굴 생김으로 잘났나 못났나를 비교합니까?
어떤 능력으로 비교합니 ?
언어 구사능력으로 비교하거나 실무능력으로 비교하거나 어떤 거로 주로 비교하는 거 같아?
...
그러니까 자기는 자기에 대한 그런 어떤 자존감이랄까 이게 좀 부족한 거예요.
사람을 평가할 때
돈이 많나를 평가하거나 인물이 잘났나를 평가하거나 지위가 높으냐를 평가하거나
자꾸 이런 것으로 평가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지위를 갖고 평가하면 나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은 마음이 위축되고
만나러 갈 때 잘보이고 싶은 이런 일이 생기고
나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은 내가 좀 거만하고 무시하는 이런 자세가 나오고.
또 돈을 따지면 아까처럼 돈 많은 사람에게 그런 일이 생기고
인물로 따지면 인물 못난 사람에게는 무시하고
잘난 사람에게는 위축되고
그래서 성형수술을 해야 한다든지 이런 필요성을 자꾸 느끼게 되고 이러거든요.
그것은 자기 존재가 나라는 존재가
그런 돈이나 재물이나 인물로 만약에 나를 설정한다 그러면
지위가 만약에 떨어지면 자기가 떨어진 것처럼 생각하고
나이가 들면 늙으면 거기에 대해서 엄청난 괴로움이 발생하거든요.
보통 사람이 늙으면 늙음에 대해서 더 괴로울까?
미인, 소위 영화배우같이 미인들이 더 괴로울까?
미인들이 더 괴롭겠죠.
나보다 잘난 사람을 잘났다고 뽐내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면 되요.
“그래, 늙거든 한번 보자” 이렇게 얘기하면 되요.
젊을 때는 더 예쁘다 덜 예쁘다 하지만
늙음에는 예쁘고 덜 예쁘고가 없습니다.
애기때도 덜 예쁘고 더 예쁘고 별로 없고.
그만큼 자기가 어떤 가치라 그럴까, 그런 중심이 너무 외향적이다.
그러기 때문에 자꾸 거런 것에 연연하게 되면 좀 살아가는 게 힘들죠.
그런 것은 다 변하거든요.
지위는 언제든지 변하고, 돈도 있다가 없어지고, 또 인물도 변하고, 능력도 변하고 그러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은 참으로 내가 아니고 내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냥 하나의 신기루 같은 환상이다.
이런 관점을 가지면 좋겠다.
내가 자꾸 비교하게 되면
내가 교만하거나 비굴해진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자는 교만하지 마라, 겸손해라.
수행자는 비굴하지 마라, 당당해라.
이랬거든요.
그러니까 겸손하다 하는 거는 나를 낮춘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한다.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무시하지 않고 평등하게 대하면 뭐라고 그런다?
다른 사람들이
“아, 그 사람 참 겸손하다, 이렇게 말하고
나보다 더 높은 사람에게 내가 비굴하지 않고 평등하게 대하면 뭐라고 그런다?
다른 사람들이
”아, 저 사람 참 당당하다“ 이렇게 표현하는 거예요.
당당하다는 건 자기를 뭘 세운다든지,
겸손하다는 것은 자기를 낮추는 게 아니라
평등하게, 모든 사람을 나이가 많든, 나이가 적든, 재물이 많든 적든, 평등하게 대하면
다른 사람이 뭐라고 그러냐?
또는 겸손하다, 또는 당당하다, 이렇게 표현하는 거예요.
자기가 조금 겸손하고 당당해지려면
즉, 교만하거나 비굴해지지 않으려면
그런 나 아닌 거, 재물이나 지위나 외모나 능력이나 이런 걸 갖고 자꾸 비교하는 습관을
오늘부터는 좀 내려놓는 게 좋겠다, 싶습니다.
...
젊을 때는 다 그럴 수 있고,
그것이 인생을 굉장히 피곤하게 만들고 인간관계에 큰 장애가 된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법륜스님 > 즉문즉설(202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손병희 선생이 우리에게 남긴 것 - 의암 손병희 선생 순국 100주년 기념토론희 '개회사’ (0) | 2022.06.06 |
---|---|
법륜스님의 즉문즉설_ 1813. 경제력에 대한 열등감과 결혼 (0) | 2022.06.01 |
법륜스님의 즉문즉설_ 1812. 나의 까다로운 성격과 아이 친구의 엄마 (0) | 2022.05.30 |
법륜스님의 즉문즉설_ 1811. 남편이 춤바람이 났습니다 (0) | 2022.05.26 |
[법륜스님의 세상보기] 한반도의 영세중립국화, 과연 필요한가? (0) | 2022.05.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