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함.
생각이 잠잠하고
그저 들리고, 그저 보이고
공간 속 모든 것이 하나로 느껴지는
그 순간을
어쩌면 우리는 이미 경험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고요함 속에서
어떤 지혜의 영감을 얻었을지도 모릅니다.
책을 읽는 것만으로
늘 그러한 어떤 상태를 의식할 순 없지만
저자가 가리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힌트를 얻고
언젠가 ‘아, 그때 그 말이 이거였구나’
눈치 챌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그 고요함을 가리키는 내용입니다.
고요함의 지혜
지은이 에크하르트 톨레
옮긴이 진우기, 출판사는 김영사
--제2장
생각하는 마음을 넘어서
인간의 병: 생각 속에 길을 잃다.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의 생각이라는 감옥에 갇혀서 일생을 살아간다.
그래서 과거에 얽매이고 생각이 지어낸 좁은 자아상을 넘어서지 못한다.
내 안에는 생각을 넘어선 깊은 의식의 차원이 존재한다.
나의 실체인 그것을 걸림 없는 순수의식이라고도 하고
맑은 마음이라고도 한다.
고대의 가르침에서는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라고도 했고
‘불성’이라고도 했다.
생각이 만들어낸 ‘작은 나’가 삶을 지배할 때
나와 세상을 동시에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하지만 나의 실체를 발견하고 나면
세상과 나는 동시에 고통에서 놓여난다.
오직 내 안에 존재하는
걸림 없는 순수의식을 통해서만
사랑과 기쁨, 지속적인 마음의 평화가
삶 속으로 들어오고
나는 ‘큰 나’가 될 수 있다.
아주 가끔이라도 마음속에 지나가는 생각을
그저 생각이라고 인식할 수 있다면
나의 감정이 주어진 상황에
대립하는 양상을 그저 지켜볼 수 있다면
순수의식이 이미 맑은 마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각과 감정은 바로 그 안에서 생겨난다.
시간을 초월한 그곳 내면의 허공에서
나의 삶을 채우는 모든 내용물이 생겨난다.
생각은 계곡의 물살처럼 거세게 흘러가고
나는 자신도 모르는 새
생각 속에 휩쓸려간다.
모든 생각들은 하나 하나가
다 ‘내가 제일 중요해’라고 말하며
나의 마음을 송두리째 앗아가려 한다.
그럴 때는 다음을 기억하라.
‘생각을 지나치게 중요하게 여기지 말라.’
생각이 만든 감옥에 갇혀버리기는 얼마나 쉬운가!
인간의 마음은 대상을 알고 이해하고
그리고 그를 통하여 지배하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이나 견해를 사실로 착각하기가 쉽다.
마음은 늘 말한다.
‘현 상황이 이러하다는 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내가 나의 삶이나 다른 이의 삶을 어떻게 해석하든
눈앞에 닥친 상황을 어떻게 판단하든
그것은 다만 하나의 견해이며,
수많은 옳은 관점들 중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그것은 생각의 뭉치에 불과하다.
그것을 깨달으려면
나의 생각을 넘어서
그보다 훨씬 더 큰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주의 실상은 ‘하나로 연결된 전체’이다.
만물은 다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홀로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생각하는 마음은
삶의 실상을 해체해서
개념의 파편, 생각의 단편으로 조각내어 버린다.
물론 생각은 매우 유용하고 효과적인 도구이다.
하지만 생각이 삶을 완전히 장악해 버리고 나면
생각이란 것이 단지 내 실체의
아주 작은 일부임을 깨닫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생각은 더 이상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삶을 축소시키고 방해한다.
지혜는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존재의 심연에는 이미 지혜가 있다.
그것을 끌어다 쓰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그저 앞에 있는 사람이나 사물에
전념하면 된다.
전념은 원초적 지혜이며 순수의식 그 자체이다.
전념은 개념적 사고가 만들어 낸
장벽을 녹여 없애고
그로 인해 이 세상 아무것도
홀로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음을 알게 해준다.
맑은 마음이 이루는 공동의 장에서
인식하는 자와 인식되는 것은 하나가 된다.
‘너’와 ‘나’로 나뉜 것들
모든 분리된 것들은 치유된다.
충동적으로 생각에 잠길 때마다
나는 현실을 회피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있는 ‘지금 여기’를 피하고 싶은 것이다.
종교, 정치, 과학에서 흔히 보이는 독단은
모두 다 생각이
우주의 실상과 진리를 담아낼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독단은 집단이 만들어낸 생각의 감옥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일은
사람들이 자신을 가두는 그 감옥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왜일까?
그 감옥이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과
‘나는 알고 있다’는
그릇된 자만심을 키워주기 때문이다.
독단은 인간에게 가장 큰 해악을 입혔다.
모든 독단은 조만간 그 거짓됨이 밝혀져 무너지게 되어 있다.
하지만 근원적 어리석음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한
무너진 독단의 자리에 다른 독단이 대체되어 들어설 뿐이다.
근원적 어리석음은 무엇인가?
‘나=생각’이라는 믿음이다.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은
바로 생각이라는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순수의식의 영역은
생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드넓다.
다가오는 생각들을 모두 다 믿지는 않게 되는 그날,
나는 생각이라는 감옥에서
한 걸음 걸어 나와
생각하는 사람이 나의 본모습이 아니란 걸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생각은 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속삭이며
더 많이 갖고자 욕심을 부린다.
생각이 내가 되어버릴 때
나는 자꾸만 권태로워진다.
권태롭다는 것은 허기진 마음이
더 많은 자극과 채울 것을 원한다는 것이며
또한 그 허기가 아직 가시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권태로울 때 잡지를 집어 들거나
전화를 하거나 TV채널을 돌리거나
인터넷을 검색하거나 쇼핑을 하면서
마음의 허기를 채운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의 허기를
몸으로 전이시켜
음식을 더 많이 먹어서
일시적으로 만족을 얻는다.
이들과는 달리 권태로운 기분을 바꾸겠다는 생각 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다.
맑은 마음이 권태로운 기분에 가 닿으면
한순간에 그 주변이 트이며 고요함이 들어선다.
처음에는 아주 작았던 틈새 공간이
점점 더 커진다.
그와 동시에 권태로운 느낌이 조금씩 약해지며
그리 대수로운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권태도 스승이 될 수 있다.
나의 본모습이 무엇이고
나의 본모습이 아닌 것은 무엇인지
가르쳐줄 수 있으니까 말이다.
나는 ‘권태로운 사람’이
나의 본모습이 아님을 알게 된다.
권태는 다만 나의 내부 에너지가 습관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분노한 사람은 내가 아니다.
-슬픈 사람은 내가 아니다.
-두려운 사람은 내가 아니다.
권태, 분노, 슬픔, 공포는 ‘나의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단지 마음 상태를 가리키는 지표이며,
늘 가고 오는 것이다.
가고 오는 것은 그 무엇도 내가 아니다.
‘나는 권태롭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누구인가?
‘나는 배고프다. 슬프다. 두렵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누구인가?
나는 앎 그 자체이다.
앎을 통해 지각되는 마음의 상태가 아니다.
편견을 가지고 있다면
‘나=생각’이라고 믿는다는 증거이다.
바로 눈앞에 있는 사람을
살아있는 인간으로 보지 않고
나의 사고가 만들어낸 개념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생생히 살아있는 사람을
죽어버린 개념으로 격하시키는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맑은 마음에 뿌리를 두지 못한 생각은
이기적이고 비효율적이다.
영리하나 지혜가 결여된 생각 역시
극히 위험하고 파괴적이다.
인류는 대체로 현재 그 상태에 있다.
오늘날 눈부신 과학기술 발전의 원동력이 된 이성적 사고의 팽배는
그 자체로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파괴적 기술이 도처에 범람하는 것은
과학적 사고의 뿌리가
맑은 마음에 자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인류는 생각을 넘어서는 진화의
새로운 단계를 맞이하였다.
이것은 시급하고도 중차대한 당면과제이다.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나=생각’이라는 일체감을 버리고
생각에 완전히 지배당하지 말라는 것이다.
‘내면의 나’가 가진 에너지를 느껴 보라.
그 즉시 마음의 소란함이 잦아들고 이윽고 그칠 것이다.
손과 발, 배와 가슴에서 내면의 에너지를 느껴보라.
나의 본모습인 생명,
나의 몸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생명을 느껴보라.
그때 나의 몸은 관문이 된다.
시시각각 변하는 감정과
사고의 밑바닥에 존재하는 깊은 생명의 느낌으로 들어가는 문
단지 머리가 아니라
온몸과 온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생명이
내 안에 있다.
세포 하나하나가 모두 살아있는
그 생명 속에서는
더 이상 생각이 필요 없다.
하지만 그 상태에서도 생각이 필요하다면
나는 생각할 수 있다.
생각은 여전히 작용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드넓은 지혜가 드러나기 때문에
생각은 아름답게 작용할 수 있게 된다.
비록 짧은 순간이지만
‘생각 없는 순수의식’이
이미 자연스럽게 드러났는데도
그것을 간과해 버릴 수도 있다.
아마도 손을 사용하여 무슨 일을 하거나
방안을 돌아다니거나
공항 카운터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을 때
나는 온전히 거기 존재했을 수 있다.
늘 시끄럽던 마음속은 고요해지고
맑은 마음이 자리했을 수 있다.
아마도 그저 하늘을 바라보거나
다른 이의 말을 듣고 있으면서
마음속에 아무런 판단도
일어나지 않은 것을 알아차리고
놀랐을 수도 있다.
나의 지각작용은 생각에 의해
조금도 흐려지지 않고 거울처럼 명료했던 것이다.
하지만 생각하는 마음에서
이런 것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늘 ‘더 중요한 것’을 생각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또한 한 생각이 오래가지도 않는다.
그래서 온전히 존재했던 순간이
이미 내 삶 속에 있었다는 것을 지나쳤을 수도 있다.
실은 그런 순간이 무엇보다 가장 중대하다.
생각에서 맑은 마음으로의 전환이
시작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모른다’는 것을 마음 편히 받아들여라.
그러면 생각하는 마음을 넘어서 저편으로 갈 수 있다.
마음은 항상 주어진 것을
나름대로 해석하고 결론을 내리려고 한다.
모른다는 사실을 마음 편히 수용할 때
이미 당신은 생각을 넘어선 것이다.
그때 개념적 사고를 벗어난
깊은 앎이 당신 앞에 나타난다.
창조적인 미술작업, 운동, 춤, 교육, 상담의 달인들은
생각을 더 이상 쓰지 않거나
쓴다 해도 주인역할은 하지 않는다.
나보다 훨씬 더 큰 힘과 지혜,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는
나와 하나인 지혜가 주인이 된다.
이제는 바른 결정을 내리기 위해
고심하지 않아도 된다.
바른 행동은 자연스럽게 저절로 나온다.
하지만 그것을 주관하는 것은
‘나’가 아니다.
삶의 달인은 지배하지 않는다.
그저 광대한 순수의식에 삶의 중심을 맞춰두고
그것이 말하고 행동하고 일하도록 맡길 뿐이다.
위험이 닥쳤을 때는
순간적으로 생각이 멈춘다.
그때 지금 여기에 존재하며
온전히 깨어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맛보아라.
진리는 생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서 모든 것을 다 포용한다.
이 세상 어떤 생각도
그 안에 진리를 다 담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진리를 가리킬 수는 있다.
예를 들면
‘만물은 본래 하나이다’라는 말은
진리를 가리키는 손가락이지
진리 그 자체가 아니다.
이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내면 깊은 곳에 그 말이 가리키는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느낀다는 뜻이다.
오늘 내용은 여기까지입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체인지그라운드(2024)'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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