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감각적 욕망과 성냄이라고 하는 이런 번뇌를 통해서, 특히 감각적 욕망을 통해서 일어나는 이 행복은 이 감각적 욕망을 벗어나므로서, 감각적 욕망을 버리면서도 행복이 오고, 또 이 감각적 욕망을 버리므로서 오는 행복은 우리를 향상으로 이끌어 줍니다. 타락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열반에 이르게 하고, 완전한 행복을 성취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해 주는게. 처음 여기서 법회 할 때 뭐라 그랬어요? 이게 중도의 길입니다. 우리가 수행을 하는 것이 만약에 괴로운 길이라면 아무도 안할지도 모릅니다. 내가 이 수행하는 것이 괴로움이고 하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고 괴롭다면 웬만한 사람 다 포기할거에요. 그런데 이 감각적 욕망을 버리므로서 오는 그런 행복이 있기 때문에. 처음에 이 행복을 맛보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이 행복을 맛보기 시작한 사람은 이거 그만두고 가서 감각적 욕망을 누리라고 밀어도 안갑니다.
두 개가 비교가 되잖아요. 그죠? 감각적 욕망으로서 오는 행복과 감각적 욕망을 벗어나므로서 오는 행복은 질이 달라요. 질이 다르고. 이 감각적 욕망 벗어남으로부터 오는 이 행복이라는 것은 우리 삶을 굉장히 안정시켜주고 편안하게 해주고, 평화롭게 해주고. 또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 삶이 점점점점 향상 되 간다는 거. 이런 이익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이런 방법으로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게 뭐냐? 첫째 알아차림입니다. 여러분들이 알아차림을 유지하는 그 시간은 전부 행복이 함께합니다. 이 알아차림이 있는 동안에는 괴로움이 없어요. 괴로운 느낌은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 행복 아니면 평온한 느낌이 일어납니다. 이때는.
알아차림과 지혜가 있는 마음은 우리 마음을 행복하게 해 주는데. 이 행복은 단순한 어떤 집착에 의한 행복이 아니라, 지혜가 있잖아요. 그죠? 지혜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행복이라는 것도 행복한 느낌에 대해서 집착하는게 아니라, 그냥 이 행복한 느낌을 그대로 이해하는 거기 때문에, 이로서오는 것이 행복이 되고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여러분들이 나중에 제가 한번 설명을 드릴 텐데, 우리가 이 알아차림을 하면 우리마음에서 감각적 욕망이나 성냄이 일어날 때 즉시 알아차리고 그걸 놓으라, 그랬잖아요. 그죠? 그런 것이 더 이상, 자라지 않도록. 빨리 그런 번뇌가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고 이걸 놓는 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지혜롭게 이런 것이 나한테 이익이 없다는 것을 이해를 하고, 이것이 실체가 없는 것들이라는 것을 이해를 하면서 이런 것들을 자꾸 놔야 됩니다. 그러다보면 우리 마음에서 그런 탐욕이나 성냄, 이런 것들이 개입되지 않으면서 마음이 고요히 진행이 되는데. 이런 상태가 되면 지금 말한 이거는 감각적 욕망으로부터 벗어난 마음이잖아요. 그죠? 이런 마음에서는 아까 말한 아주 고차원적인 행복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것이 한걸음 더 나아가서, 예를 들면 호흡이라든가, 이런 어떤 수행방편을 하나 정해서, 처음에는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해서, 탐욕이나 성냄이, 다시 말하면 장애요소. 이런 오장애요소라는 오염원이 개입되지 않도록 하는 그런 수행을 통해서 일어나면 빨리빨리 내려놓고. 항상 현재 알아차림이 진행이 되도록 하는 그런 노력을 하다가 그 현재 알아차림을 호흡으로 돌리게 되면요.
이 호흡이라고 하는 이 하나의 대상에만 알아차림이 지속되고, 다른 현상들은 놔지면서 이렇게 호흡하나에 대해서 알아차림이 지속되고, 다른 어떤 번뇌도 다 놓아지는 상태가 되면요, 우리 마음에 이루 말할 수 없는 희열과 행복이 일어납니다. 그때 행복은 여러분들이 세속에서 경험했던 행복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형태의 행복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 행복으로 인해서, 여러분들이 예를 들어서 보세요. 저도 학교 다닐 때 그런 경험이 있는데, 애인하고 같이 있으면 아침에 딱 만났는데 벌써 저녁이에요. 시간가는 줄 몰라. 왜 그러겠어요? 시간의 흐름이 왜 그렇게 시간이 가는 줄 모르겠어요. 그 시간이 행복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사람과 같이 있는 시간이 너무 행복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그 같이 있는 시간이 너무 행복하기 때문에 딴 데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거죠. 그죠?
거기 있는 것이 충분히 행복하니까. 그래서 이 불교수행도 그 수행을 하다보면, 수행으로부터 오는 행복이 점점점점 커져가기 시작을 하면, 나중에는 딴 데로 가라고 해도 안가는 거에요. 왜? 이게 훨씬 재미있는데. 훨씬 행복한데 왜 딴 데로 가겠어요? 그죠? 이건 억지가 들어가는게 아닙니다. 억지로 만약에 수행을 한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오래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수행을 하면서 감각적 욕망이나 성냄. 이런 오염원으로부터 벗어나므로서 오는 이 행복은. 그러니까 벗어나므로서 오는 그 행복은 훨씬 질이 높고, 큰 행복을 주기 때문에, 이런 행복은 두려워 할 필요도 없어요. 그런 행복은 추구하면 됩니다. 그리고 그 행복이 점점점점 커져나가면 나증에는 다시 중생의 삶으로 돌아가라고 해도 안합니다.
왜냐하면 이 삶이 훨씬 더 행복하기 때문에. 그래서 이런 방식대로 수행의 길로 가게 만든 것이 부처님의 중도, 팔정도의 법문을 통해서 이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이런 수행을 가르쳐 주신 거에요. 만약에 외도들 같은 경우는 고행을 했잖아요. 고행을 하면 지금은 괴롭고, 나중에 행복하다고 하는데, 나중에 행복한지 안한지 몰라요. 사실은 이게 실제 진리의 입장에 보면, 지금 나를 괴롭히는 것은 그건 어떻게 보면 불만족, 화가 많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로인해서 오히려 악처에 떨어질 수 있는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수행은 팔정도에 따라서 수행을 하는 것은 어느 정도 감각적 욕망으로부터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을 하면, 그로부터 오는 행복이,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이 오기 때문에, 그 자체가 굉장히 행복하게 수행을 할 수 있다 이거죠. 어떤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이것은 부처님께서 이런 식의 공부를 우리에게 전달해 줄려고 한 거지. 여러분들 고생시키려고 부처님께서 가르쳐준 것은 절대 아니거든요. 여러분 올바른 수행을 하지 않고, 또 그 수행의 들어가는 방법을, 수행을 하는 방법이라든가 자세, 이런 바른 방법과 바른 법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하지 않고 수행을 하게 되면, 잘못하면 오히려 더 고통이 커질 수가 있는데, 바른 방법으로 수행을 한다면 특히 이 팔정도에 따라서 수행을 한다면, 우리가 수행하는 그 과정 과정이 굉장히 행복해 진다는 거죠. 이루 말할 수 없는 그런 행복들이 일어나게 되고, 그것이 부처님께서 전달해 주고자 하는 거다. 이거죠.
여러분들은 어떤 길을 원하세요? 감각적 욕망으로 인하는 행복을 원하세요? 아니면 그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원하세요? 그건 여러분들이 결정을 하십시오. 여러분들의 문제니까. 그래서 이 느낌이라는 것이 그만큼 우리 수행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걸 차지합니다. 그래서 이 느낌이라는 것은 12연기에 보면 느낌으로 인해서 뭐가 일어 난다 그랬어요? 촉수애취유 라고 촉수애가 있잖아요. 그죠? 또 느낌이라는 것은 갈애의 원인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갈애로부터 벗어나는 것으로 일어나는 행복은 절대 그런 문제가 생기지를 않아요. 갈애로 인해서, 집착으로 인해서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만, 이 갈애로부터 벗어나서 일어나는 행복은 추구해야 될 것이고, 그것이 우리 삶을 더욱더 향상되게 만드는 길이다. 이렇게 이해를 하시면 되고요.
그 다음에가 뭐냐 하면 상온이라고 하는게 있습니다. 보통 인식이라고 번역을 하는 건데요. 공부를 해보면요, 요즘 고등동물일수록 뭐를 정확히 기억할 거 같죠? 그죠? 하등동물이 기억을 못하고 고등동물일수록 기억을 대게 잘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고등동물일수록 기억을 애매하게 합니다. 하등동물일수록 기억을 명확하게 해요. 만약에 기억을 명확하게 한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1초 뒤에 저를 보면 저를 다른 사람으로 인식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있는 모습하고 1초 뒤의 모습이 조금은 달라져도 달라질 거 아니에요 그죠? 그러면 이거는 다른 사람으로 인식할 수 있어요. 그런데 고등동물일수록 뇌가 발달한 동물일수록, 그대로 인식하는게 아니라, 그 사물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 특징. 이런 것들로 인식을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옷을 바꿔 입고 오거나, 머리 헤어스타일을 바꿔도 똑같은 사람으로 인식할 수 있는 거에요. 만약에 너무 명확히 기억을 한다면 오히려 그걸 인식하기 어렵습니다. 우리 뇌가 보통 보면 어떤 사람을 인식할 때 두리뭉실하게, 그 사물의 특성을 이해를 합니다. 불교적으로 보면은 이런 작업을 하는 것이 바로 뭐냐 하면 표상작용입니다. 어떤 대상을 볼 때 예를 들면 이런 컵이 있잖아요? 이런 컵을 볼 때 이 컵의 모양은 이런 모양도 있고, 다양한 모양이 있는데, 우린 다 이걸 컵으로 인식을 하잖아요. 그죠? 그거는 이 컵이 가지고 있는 어떤 특성, 공통점, 이런 것들을 가지고 인식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런요런 모양을 가지고 물을 담고 어떤 액체를 담는 것을 컵이라고 한다. 이렇게 표상을 취했기 때문에 이 비슷한거 보면 다 컵으로 인식을 하는 거죠.
그래서 이 상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과거의 봤던 대상을 통해서 그거에 대한 공통점을 추출해서 그 나름대로 이런 것들은 전체적으로 뭐라고 한다. 이렇게 표상화, 표상작용을 하는 것이 바로 불교에서는 상온, 빨리어로는 산야라 그럽니다. 그래서 이것이 여러 가지 불교에서 굉장히 중요한 측면이 있는데요. 이 표상을 만드는 작용이 아까 말했듯이 두리뭉실하게 일어났기 때문에, 예를 들면 앞에서 얘기한 그런 왜곡이 개입이 하기 시작하기가 쉽습니다. 여러분들 길게 이렇게 된 거, 길고 기어 다니는 걸 뱀이라고 했는데, 지나가다 밤중에 새끼가 있으면 어떻게 인식을 합니까? 뱀이라고 인식하죠. 이런 것도 인식의 왜곡입니다. 인식자체가 어떤 현상을 볼 때, 있는 그대로 진실을 보는게 아니라, 왜곡되게 볼 소지가 많다는 거에요. 어리석음이 개입을 하게 되면.
그래서 예를 들면 어릴 때부터 요런 모양을 갖추고, 이러이러한 생각을 하는 사람을, 거울을 쳐다보면서 나, 나, 나, 나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이 계속 반복되는 걸 통해서 여기에 또 집착도 개입을 합니다. 그러면 이것이 반복이 되면서 나중에는 실제로 나라고 하는 것은 그런 오온의 작용인데, 그것을 계속 나, 나, 이렇게 하다보면, 이것이 나라고 하는 실체로 형성이 됩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우리가 뭐라 그러냐 하면 아상이라고 하죠. 나라고 하는 상. 이때 상이라는게 바로 수상행식할 때 그 상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이런 상이 형성이 되고 나면, 그때는 이 상이 어떤 실체와 되고, 고정화 되고, 고정관념이 되가지고, 나중에는 깨기가 굉장히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요즘 뭐 종교간에도 보면 제가 지하철가도 지나가는 분들이 와서 하나님 믿으라고 전단지 주고 이러거든요. 그런게 어떤 이름이라고 하는 산야, 요런 표상작용이 형성이 되고 나면, 그때는 이것이 실체화 되버려요. 그래서 서로 간에, 나는 기독교인, 너는 불교인 이렇게 벽이 생기면서 이것이 소통되기가 굉장히 어려워지는 그런 상황이 발생합니다. 이런 걸 상이 강해진다. 또 자기 스스로가 나는 잘났고, 내가 나다. 이런 상이 강해지면 에고 의식이 점점점점 강해져서 나중엔 그걸 깨기가 힘든 상황이 됩니다.
그래서 이런 옳지 않은, 영원하지도 않은 것을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이런 상, 그리고 또 자아도 없는 것을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는 상, 그리고 본질적으로는 아까 말했듯이 이 세상은 괴로움인데도 불구하고 이걸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이런 상들이 공구해지고, 확고해 지면 나중엔 깨기가 힘들어 집니다. 이거는 어리석음이 강할수록, 또는 탐욕이, 집착이 강할수록 점점 강해집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이 상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삶을 왜곡시키고, 또 이거에 의해서 여러분들이 고통을 받고 이런게 많아지는 거죠. 그래서 금강경에 보면 제일 강조하는 것 중에 하나가 뭐에요?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을 깨라는 거잖아요. 그것이 없는 것이 보살이라 그러잖아요? 그죠?
그래서 이 상이라는 것을 잘 이해를 해야 됩니다. 이 상이라고 하는 것이 그냥 어떤 느낌하고 마찬가지로 이 상이라고 하는 것도 어떤 현상들이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어떤 걸 볼 때 이 상이라고 하는 것도 자꾸 변화되어 가는 것인데도, 그것을 실체화하고, 하나의 고정된 관념. 변하지 않는 실체로서 이해를 하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긴다는 거죠. 그래서 사실 이런 왜곡을 지난번에 제가 설명 드린 잘못된 왜곡을 이끌어내는데 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게 바로 이런 상입니다. 산야라고 하는, 빨리어로는 이걸 산야라고 그러거든요.
그래서 이 두 가지. 이것을 왜 부처님께서 그러면 이 두 가지를 따로 부각을 시켜서 오온에서 설명을 했느냐 하면요 이 부부만 조금 설명을 드리면. 이 느낌이라고 하는 걸 통해서 갈애가 일어나잖아요. 그죠? 그리고 이 상을 통해서 갈애가 더 강해집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예를 들면 이런 거에요. 어떤 사람, 여자를 만났다고 생각을 해 보세요. 이성을. 그러면 그 사람을 생각을 할 거 아니에요. 그때 떠올리는 건, 기억으로 어떤 모양을 떠올리는 건 상의작용입니다. 뭔가 떠올리는 표상작용이죠. 그죠? 그럼 그 떠올린 그걸 보고 계속 느낌이 어떤 느낌이 일어나요? 좋은 느낌이 일어날 거 아니에요 그죠? 그 느낌을 계속 반복하면서 집착하면서, 그거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 할수록 갈애가 점점점점 강해지겠죠. 이런 것이 윤회를 일으키는 가장 근원적이라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가 윤회를 하는데 있어서 느낌이 밥이라면, 상은 인식은 반찬 같은 역할을 한다는 거에요. 그래서 즐거운 느낌을 느끼는데, 요런 상, 요런 표상, 이사람, 저사람. 여러 가지 표상이 있잖아요? 이거에 대한 표상, 보석에 대한 표상, 핸드백에 대한 표상, 그런 표상을 자꾸 갖다 놓으므로서, 이 느낌이라고 즐거운 느낌이라고 하는 이 밥을 밥맛이 없지 않도록 자꾸 변화를 주면서 더 즐기게 만든다 이거죠. 이 수와 상이라고 하는 것이, 윤회를 하게 만드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이 두 가지를 꺼내서 이것으로부터 왜곡된 인식. 또는 이 즐거운 느낌 이런 것들로부터 벗어나야,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윤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이 수와 상을 좀 더 강조를 한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말씀드렸듯이, 이것으로서 앞에서 제가 서두에 마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물질과 이야기했는데. 그 마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그 마음은 일종의 뭐와 같으냐 하면, 오온으로 치면 식온에 해당합니다. 식. 그리고 그 마음자체는 그러니까 문제가 없는데, 여기에 어떤게 결합되느냐에 따라서 오염되기도 하고, 뭐라 그랬어요? 아주 선한 마음이 되고도 하고, 불선한 마음이 되기도 한다, 그랬잖아요. 이 마음이라는 것에 이 행의 작용, 오염원이 작용해서 다섯 가지 장애요소라든가 어리석음이 작용을 하면, 불선한 마음이 되고, 또 알아차림 지혜, 자비, 이런게 작용을 하면 선한 마음이 되잖아요.
그래서 이 마음의 색깔을 정해주는, 선업으로 가느냐? 불 선업으로 가느냐? 선한 마음으로 가느냐? 불선한 마음으로 가느냐? 그것을 정해주는게 일종의 행온입니다. 그래서 그 행온이 우리가 공부를 했던 무명과 5장애요소, 오염원, 선한 마음으로선 알아차림. 지혜, 자비. 이런 걸 이야기 하는 거구요. 지금 말씀드린 수와 상. 이거는 이런 번뇌가 일어나게 할 수도 있고, 지혜가 일어나게도 할 수 있는데, 이 자체는 색깔이 없지만, 느낌과 인식과 마음이라고 하는 건 자기 색깔은 없어요. 그런데 이 행온에 작요에 의해서 선한 마음이 되기도 하고, 불선한 마음이 되기도 하고, 하는 그런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우리가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그 마음의 현상이나, 몸의 현상을 분석을 해 보면 그게 어떤 실체가 있는게 아니라, 물질적인 작용과 정신적인 작용. 정신적인 작용을 조금 더 구분해 보면 느낌과 인식. 그리고 이런 의지적인 작용들. 그리고 우리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자기 자신을 바라볼 때, 이것이 무슨 실체가 있다. 이 오온이라고 하는 것이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항상 말씀을 하시거든요. 무상하다. 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거는 본질적으로 괴로움이고 이것은 실체가 없다.
그래서 이거를 이해하게 되면 우리가 이 오온의 공함을, 무아임을 이해하는게 반야심경에서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는 거라 그랬잖아요? 그죠? 이 오온을. 자기 자신을 볼 때 나라는 것은 우선 실체가 있는 자아로서 보지 말고, 오온의 결합이다. 조건에 의해서 이루어진 오온의 결합이, 라고 바라보는 것이 올바른 이해고요. 이 오온을 가지고 뭐라고 하냐하면 유위법이라고 합니다. 형성된 법이다. 불교에서 쌍카라, 라고 그러잖아요. 쌍카라, 라는 것이 바로 오온을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바라보면 이 오온의 결합에 불과하다는 거에요.
이 물질 세계는 색온에 불과하고, 이 정신세계는 수상행식의 결합에 불과하다. 이렇게 바라보는 것이 불교적으로 바라보는 것이고, 이게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나는 첫걸음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다음시간에는 오온이 왜 일어나는가? 오온이라고 하는 것은 사성제로 보면 오온에 대한 이해가 고성제에 대한 이해입니다. 그런데 이 오온이 일어나는 원인이 뭔가? 윤회가 어떻게 일어나는가? 그게 집성제라고 이야기 하는데요, 그건 연기법하고 관련이 있는데. 그건 제가 다음 시간에 또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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