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 역사/전우용 사담

전우용의 사담 15화 - 80년 5월 18일, 무등산은 알고 있다

Buddhastudy 2019. 6. 6. 20:21

 

정책과 역사가 함께 하는 시간

전우용의 사담입니다.

 

5월도 벌써 중반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가정의 달이죠.

어린이날, 어버이날 등 가족들과 따뜻하게 정을 나눠야 하는 5월에

특히 여전히 마음 아프고, 여전히 슬프고, 그러면서 최근에는 또 다른 언어적 문화적 폭력에 시달리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5.18민주화 운동 희생자 유가족 분들이죠.

 

저는 개인적으로 이 무렵의 기억이 생생한데요,

벌써 40년 가까이 지난 옛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걸어 다니는 한국현대사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는 역사학자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님을 모시고 5.18민주화운동의 참된 진실에 대해 이야기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 오랜만에 뵙습니다.”

, 안녕하셨습니까.”

 

요즘 많이 바쁘시죠.”

, 늘 바쁩니다.”

유튜브 방송 새로 시작하셨다고 하던데

시작한지 얼마 안 됐습니다.”

, 한홍구의 현대사

, 한홍구의 현대사, 그동안 대한민국사를 비롯해서 현대사분야에서 독보적인 업적들을 쌓아오셨는데, 근현대사에 관심도 높아지고 대중적 궁금증도 높아진 상태인데, 5.18민주화운동의 팩트체크, 해볼까 하는데요,

 

당시 정부의 공식 명칭은 광주사태학생운동계 명칭 광주항쟁이렇게 불렀었구요,

서로 극과 극에 있는 명칭이었다가 여러 차례 논란 끝에 5.18민주화운동으로 명칭이 되었는데 용어의 변천과정 간단히 알려주시죠.

 

 

<5.18민주화운동 명칭의 의미>

당시 광주, 5월광주로 줄여 부르던 때, 시간이 지나 광주라는 단어가 빠져버린 것

항설1) 용어 정립 진생에 차질을 빚었다는 항설

항설2) 전국적인 사건을 광주라는 지역에 한정하게 된다.

 

527일 새벽을 중시하는 입장에선 아쉬움이 남는 용어 정립

용어 정립에 지역 명칭을 부각했으면 하는 한홍구 교수

전두환 정권에 항쟁했던 유일한 도시, 광주

 

광주에 대한 빚진 마음, 그리고 광주를 제2의 고향으로 여기는 마음

‘80년대를 치열하게 살 수 있던 모든 세대는 광주의 자녀들

호남, 지역감정의 둘레에서 정립되었으면 하는 용어

 

민주화운동 용어를 바라보는 다른 시각

결과적으로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에 공헌한 ‘5.18민주화운동

‘5.18민주화운동당시, 시민군으로 나섰던 인물 공부부대 만행에 저항했던 인물

이념적 이유보다 소박한 정의감에서 비롯해 거리고 나온 사람들

‘5.18민주화운동의 출발점 정의감이 중요하다는 생각

 

민중항쟁용어를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5.18민주화운동명칭이 바르지 않다는 뜻이 아닌

 

그동안에 오래된 반공, 민중이라든가 항쟁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거부감을 갖는 분들한테 이 사건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일종의 이름을 가지고 중화시키면서 만들어진 개념이겠죠.

이 사건 전체를 5.18이라고 부르고는 있지만, 사건 자체를 구체적으로 보자면 발단은 어디서부터 시작했나요?

 

 

<805180>

사건의 발단, 19805180, 신군부의 전국 계엄령 확대 시행

신군부의 김대중, 김종필 등 정치인 연행과 김영삼에게 내린 가택연금

유시민 vs 심재철, 1980년 서울역 회군 공방

4.19혁명 이후 허정과도정부출범

이승만이 임명했던 국무위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취임 3개월 만에 개헌과 총선을 통해 제2공화국의 문을 열고 바로 물러난 허정

(*과도정부: 19604.19혁명으로 이승만 하야 후 허정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부 수립)

유신잔당 퇴진을 요구한 학생들의 저항

 

1980514, 15일 거세게 나아간 학생들

민주화가 실현 되리라는 희망에 부풀었던 1980년 초 서울의 봄

서울을 비롯한 전국 대학생들의 대대적인 가두시위

이 시위를 얼마나 지속할 수 있을까

한편 무르익은 다음에 나가야 한다는 입장도 존재

 

국내적으로 정치 일정이 지연되고 민주화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은 7912월부터 계속 있었던 것이고요,

한편으로는 계속된 북한 때문에. 치고 내려올지 모르니까 우리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국내의식이 있었죠.

 

계엄철폐 유신잔당 퇴진을 외치는 학생들의 소리로 들끓었던 거기

끊임없이 외쳤던 소리 민주시민 동참하라.

그러나 실제 동참하는 시민들을 볼 수 없었던 불안감이 짙게 지배하고 있던 상황

 

공수부대 투입으로 빠르게 진압

공수부대의 곤봉 살벌한 분위기

(백골단: 1980~1990년대 시위 군중들과 학내 시위자 진압 임무를 위해 구성된 사복 경찰관)

이런 상황에도 흩어지지 않은 광주의 대학생과 시민

광주시민의 적극적인 저항 모습은 합리적인 설명이 어려운 상황

공수부대, 신군부 입장, 쉽게 진압이 가능할 거란 생각

(부마항쟁(1979.10.16~20): 유신체제에 반대하여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

 

처음부터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진압하며 간단했을 상황

경찰로 막으려다 시위만 커지고 각하께서 돌아가셨다

1980년 초부터 충정부대를 중심으로 강도 높은 충정훈련 실시

(충정훈련: 군에서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실시한 공세적 진압 훈련)

강경 진압에도 불구하고 저항을 이어갔던 광주시민들

 

다른 지역들, 서울에서 가장 많은 학생이 있음에도 그게 통했는데, 광주에서는 안 통했다.

그래서 좀 납득이 안 되는 부분은 압도적인 물리력 가지고 있잖아요

곤봉, 최루탄, 왜 발포를 했을까요? 서울에서도 발포를 했을까요? 만약에 상황이 그랬다면?

 

초기에 참여했던 분들에게 저항의 이유를 질문한 한홍구 교수

광주시민들의 대답 잘 모르겠다

잔인하게 시민들을 진압했던 공수부대

옆에 있던 사람이 곤봉에 맞아 쓰러지는 상황

두려운 상황 속 몰려오는 분노와 수치심

죽고 사는 것이 나의 소관이 아님을 느낀

이래죽으나 저래죽으나, 죽음에 대한 공포

선량한 사람들의 분노

어떻게 공수부대와 맞서겠습니까.’

오히려 계엄군이 뒤로 밀리게 된 상황

한홍구 교수 생각, ‘계엄군도 두려움을 느꼈을 상황

 

 

<누명의 역사, 5.18만주화운동>

시민이 무기고를 습격해서 폭도다, 이런 얘기들도 있잖아요.

그것이 과연 정당한 일이었는가 역사적으로 정리를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요.

 

폭도의 역사를 정리하고 싶은 마음

일본경찰이 편찬한 일제 의병탄압 기록 조선폭도 토벌지

일본군이 행한 남한 대토벌 작전폭도란 개념을 쓰기 시작함

이후 제주 4.3사건’ ’여순반란사건에 쓰인 개념

권력에 대드는 사람을 폭도라 규정한 것

중요한 내란의 개념

학생들의 시위가 내란죄가 되었던 시대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도 내란죄로 기소되진 않았어요. 일본인도 안 그랬던 건데.

 

“5.18민주화운동은 내란폭도가 맞물리는 지점이 된 것

저항권의 관점에서 공수부대의 폭력과 시민들의 죽음

그에 맞서는 길 무장을 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

자위권 차원에서 무장한, 광주시민

신군부 입장, ‘다른 도시로 확산되면 사형이라는 생각

 

그 무렵에서부터 언론을 통한 광주의 호도가 본격화하지 않습니까?

신군부가 장악한 언론이죠.

내보내면서, 이게 좀 여론화가 상당부분 사람들한테 영향을 미친 부분도 있을 거 같은데, 어떻게 보십니까?

 

언론의 통제, 전혀 전달이 이뤄지지 않았던 상황

광주 소요 사태의 언론 사진의 플래카드 전두환 찢어죽여라.’

사람들의 반응, ‘광주사람들 지독하다.’

5.18민주화운동 비디오 시청 후 자연스레 나오는 욕설

언론의 왜곡된 이미지 전파

 

허위보도의 대표적인 사건 중 하나 1980524간첩 이창용 사건

70~80년대 간첩 사건 중 남파된 간첩은 몇 안 된다는 것

월북자 가족들 이용하는 등 대부분이 조작 간첩

그러나 이창용은 진짜 간첩이었던 것

5.18민주화운동을 선동할 목적으로 남파됐다는 발표

실제 이창용이 북한을 떠난 날짜는 511

광주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인물

광주와 북한을 연계하는 선전 활동 언론을 통한 확산

 

그렇게 해서 광주가 폭동수준으로 되어버렸고, 계엄군은 최대한의 인내를 발휘하면서 합법적으로 대처하고 있다, 이게 신문에서 나왔던 내용이죠.

 

한국은 사건을 각자가 알고 있는 선에서 합리적으로 설명하길 원하는 성향

화염병을 던지고 돌멩이를 들었던 세대

그러했던 시민들이 총기를 들게 된 상황

살기 위해 택한 길이 폭동이 되어버린 것

 

공수부대의 만행 사실을 지우기 위한

총을 든 사람들에게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한 계획들

북한에서 파견된 간첩들이 개입한 일이다

김대중이 목포에서 깡패들 100명을 투입했다

서울에서 대북군들이 광주로 내려갔다

 

당시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퍼트린 유언비어

5.18민주화운동 유언비어의 피해자 김홍일 전 국회의원

사건을 조작하려던 신군부 혹독한 고문을 당했던 김홍일 전 의원

 

정권과 언론이 5.18민주화운동 유가족 구분

5.18민주화운동 유공자 명단이 공개되지 않는 이유는 불순분자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

 

그게 그 이후로 계속 반복되는 패턴이잖아요.

한국내 불의한 권력과 기성 거대 언론하고 항상 써왔던 패턴이잖아요.

 

국가보안법적 사고방식

스스로 세뇌 되어있는 사고방식

사건의 배후엔 불순분자들이 있었을 거란 일련의 사고방식

805월 광주시민들의 무장

시민들의 정당한 분노를 지우고 각자 나름대로 해석한 무장

그 해석에 폭도’ ‘간첩들이 필요했던 것

 

그리고 나서 광주에서는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했었는데, 광주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 서울이라든가 다른 지역에서의 광주시민들을 지원할 만한 세력이 전부 감옥에 가거나 이런 상황이라서, 완전히 고립된 상태에서 계엄군에게 처분만 맡긴 그런 처지였잖아요?

그야말로 마구잡이로 총을 쏘고 사람이 죽이고 그런 상황은 아닐 거라고 생각은 하는데

왜 그랬을까요?

 

 

<무등산은 알고 있다>

계엄군을 몰아내고 해방 광주를 만들었으나 대책이 막막했던 광주시민, 고립무원 상태

광주시민 조직, 준비, 체계가 없는 상황

역사상, 도청소재지를 장악한 일은 전무한 일

광주시민들의 정당성이 입증되려면 전국의 도움이 필요한 일

 

광주 진압 이후 언론에 다시 나오게 됐을 때

언론의 표제, ‘무등산은 알고 있다

한홍구 교수, ‘무등산만 알고 있다

확산이 필요, 광주시민들이 고립되지 않는 길

외로운 섬이 되어버린 광주

광주시민들의 마음을 그린 노래 <바위섬>

고립의 상태로 만들고 처절하게 짓밟았던 것

국가폭력에 대항할 수 없는 것을 증명해주는 수단이 되어버린 일

 

광주시민들의 투항을 바랬던 전두환

평화적 해결, 시민들이 진행한 자체 총기회수 작업

홍남천 변호사, 김성령 신부, 계엄군의 강경 진압에 맞선 죽음의 행진

시간을 벌어 사태수습을 위한 방안 모색

협상이 가능한 유일 방안, 모두 다 총을 내려놓는 것

도저히 총을 내려놓을 수 없는 마음

 

그냥 항복하고 굴복하면 광주 전체가 폭도들의 난동이었다고 하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이런 말이 있었을 거 같은데

 

인상 깊었던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의 대사

5.18민주화운동 마지막 항전, 도청에 남은 사람들을 설명할 때 인용하는 대사

-빼앗길지언정, 내주진 말라

 

캘빈 소총으로 계엄군의 탱크와 대치했던 시민들

5.18민주화운동이 막바지에 달한 80527일 새벽

계엄군과 항전을 펼친 전남도청을 지켰던 300여명

527일 계엄군의 도청 진압 이후 참혹함이 느껴지는 사진

5.18민주화운동의 희생자가 안장된 망월동 국립5.18민주묘지

당시 쓰레기차에 관을 포개 망월동까지 이동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처절한 패배

처절함을 넘어선 장엄한 패배

 

패배를 다시 딛고 일어설 수 있었던 이유

광주시민이 아님에도 광주의 자녀가 될 수밖에 없었던 근거

당시 사람들의 삶 속으로 불쑥 찾아오지 못했을 것

광주시민 여러분 우리를 기억해주십시오

3만 명이 집결하여 300명이 남은 상황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역사

 

저도 대학시절 때 광주출신의 동기가 있었어요.

도청에 있었답니다. 도청에 있었는데 너는 아직 어리니까 집에 가라선배들이 그래서 집으로 왔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친구의 그런 말이 우리 같이 살던 가끔 다니던 우리들한테는 정말 큰 충격이었어요.

그 행위자체가 아까 말씀하셨듯이 빼앗길지언정 내어주지 마라.’ 이런 말도 있었지만, 똑같은 1907년 영국기자 F.A. 맥켄지가 의병들을 직접 만나 취재했던

우리는 죽을 거다. 노예로 살기보다는 자유인으로 죽겠다.’ 이게 당시 의병들의 생각이었잖아요.

당시 의병들을 일본인은 폭도라고 불렀던 거죠.

 

<5.18의 기억, 지독한 트라우마로 남다>

하버드 대학생들의 강의 내용을 기반으로 한 <정의란 무엇인가>

805, 정의를 실천한 사람들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분들의 이루 말할 수 없는 삶의 처지

2012년 광주트라우마치유센터 설립을 위한 기초연구를 맡았던 한홍구 교수

오죽했으면 그 연구가 나한테 왔을까...’

트라우마라는 단어 자체가 없던 시절

가정에서조차 존경받을 수 없던 ‘5.18민주화운동의 희생자

 

5.18민주화운동 희생자 유가족에 관한 많은 노력이 이뤄지고 있는 상황

5.18민주화운동 기념식, 희생자 유족에게 포옹을 나눈 문재인 대통령

그러나 진전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

 

“5.18민주화운동 유가족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분의 가족도 겪어 온 붕괴, 권위의 붕괴, 이런 것들을 다 겪고 오신 거 아니에요.

 

“OECD 최상위권을 차지하는 한국의 자살률

‘5.18민주화운동유가족 자살률은 일반인 자살률의 십수 배

고통 속에 살아온 5.18민주화운동 희생자 유가족들의 삶

5.18민주화운동에 제기되는 반문이 민망하다 느끼는 한홍구 교수

 

우리가 3.1운동 당시, 직후에 3.1운동을 실패한 운동으로 기억했다가, ‘3.1운동 100주년이 되어서 대한민국 탄생의 기점이다.’ 이렇게 얘기하고 있잖아요.

광주, 이게 실패한 운동이냐, 아니면 성공한 운동이냐, 기억이 달라질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어떻게 봐야 할까요?

 

<영원한 민주화의 성지>

3.1운동이 실패한 운동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 이유

당시 독립운동가, 사회주의 활동가 농민조합에 참여했던 분들의 조서

3.1운동의 영향으로 자각하게 된 국민으로서의 존재

관용구처럼 나오는 3.1운동에 대한 이야기

 

광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처절한 패배

5.18민주화운동의 불꽃이 이어진 6월 항쟁

5월이 없었으면 결코 오지 않았을 6

‘5.18민주화운동은 우리 역사 속 단기간에 성공한 운동

20세기에 벌어진 국내 국가폭력 사건들

‘5.18민주화운동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던 사람들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이룩하게 된 역사

 

과거사를 정해가는 기준점 5.18민주화운동

광주시민들이 이룩한 성과 5.18민주화운동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일을 모두가 고민했으면 하는 바람

 

최근 들어서 5.18민주화운동에 과한 북한군 개입설, 또 유공자 명단 공개하라.

역사적 그리고 현실적 가치를 깎아 내리는 행위가 최근 들어서 강하게 나오고 있어요.

이게 왜 그러는 것이며, 어떻게 대처해야 된다고 보십니까?

 

당시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의 통제 상황

북한군 침투 자체가 엄청난 안보 실패가 되어버리는 격

그렇게 믿고 싶은 사람들이 존재할 뿐

전두환 대통령이 선량한 국민을 살해했을 리 없다

광주에 대해서는 명분이 없었다는 사실

북한군 개입설선동으로 인한 혼란 가중

여전히 ‘5.18민주화운동을 향한 왜곡된 시선

 

지만원 5.18민주화운동의 북한군 개입설 주장

5.18민주화운동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분들에겐 가슴 속 깊은 상처

그날 도청에 남았던 분들이 꿈꾸던 대한민국의 미래

그 분들이 물려주고 싶던 세상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는 오늘날

5.18민주화운동 정신을 계승하는 길

 

음식에 관련해서는 불량식품하고 먹어도 되는 식품을 가리는 훈련을 열심히 해왔어요.

그런데 특히 역사와 관련된 정보에 관해서는 불량정보와 정통정보를 가리는 훈련을 제대로 안한 거 같아요.

 

불량식품에 비유할 수 있는 가짜뉴스

 

제가 마지막 말에 대해서는 토를 안 달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벌써 이제 39년이 지났고

그 긴 세월 동안 광주는 언제나 옛날 일이 아니었습니다.

늘 새로운 논쟁거리를 만들었고, 희생자 유가족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거듭되어 왔었죠.

이제 그런 일들을 끝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가 이제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자랑스러워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808월 광주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마음의 빚에서 출발한다는 사실

다시 한 번 생각하는 5월이기를 바랍니다.

 

, 전우용의 사담

다음 주에 다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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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