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을 들고 나와라. 투항하라.
시내 모든 주요시설은 군이 완전히 장악했다.
투항하면 생명을 보장한다.
경찰의 방침
절대 희생자가 발생 않도록 (경찰의 희생자가 있더라도)
5월 광주는 저에겐 좀 특별해요.
“여기 모인 사람들 난 관심없어.
목적이 나랑 같다면 난 그거로 충분해.
저기 우리 엄마...”
-영화 <26년> 中
5.18 민주화운동 희생자 2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아무래도 광주 민주화 운동이 굉장히 민감한 얘기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고민도 많이 됐었는데
희생자들을 기리고 그런 억울함을 세상에 더 기억하게 할 수 있고
들어낼 수 있는 그런 기회가 저에게 주어진 거니까, 감사하다는 생각이 참 많이 들었어요.
영상이랑 희생됐었던 분들의 사진들을 많이 봤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잔인하고 혹독했었던 그런 기록들이라서 참 충격적이었죠.
이게 정말 실제 일어났었던가?
1980년 5월 광주
치안책임자는 전남 경찰 국장 안병하
시민들 사이엔 경찰의 가족도 이웃도 있을텐데, 경찰이 무기를 쓸 수는 없다.
안병하 치안감은 신군부의 발포 명령을 끝가지 거부했습니다.
“도망가는 시민을 쫓지 말라”
“시민들이 다치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하라”
-안병하 전남 경찰국장
김종필, 이희성 등과 육사 동기
육군 사관학교 출신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었을 텐데
그는 무능한 경찰로 몰리고 맙니다.
직무유기 혐의로 보안사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한 뒤
부하들에겐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사표를 써야 했습니다.
그리고 8년
통한의 세월.
안병하 치안감이 생전에 작성해 놨던 비망록엔
5.18 당시, 그가 경찰들에게 하달했던 방침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요
“일반 시민들 피해 없도록.
주동자 외에는 연행하지 말 것
경찰봉 사용에 유의.
시민들에게 반말 욕설 금지”
그리고 안병하 치안감이 80년 5월 현장에서 목격한 5.18 발생원인
‘5.18은 신군부가 과격한 진압과 유언비어 유포를 통해
시민들을 자극해 발생했다.’
-안병하 치안감 비망록 中
그러나 어떤 이는 다르게 말합니다.
‘광주 사태 초기 계엄군 시위진압에 나설 수밖에 없게 된 것은
안병하 전남 경찰국장의 중대한 과실 때문이었다’
-전두환 회고록 中
생전 마지막 언론 인터뷰에서 안병하 치안감이 물었다고 해요.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나요?” -안병하
“안병하 치안감,
그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시민의 경찰이 되어야 한다.
안병하 (1928.07.23~1988.10.10)
한헤진,
안병하를 기억하여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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