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나는 상황에서 화를 내야 할까요? 내지 말아야 할까요?
어떻게 하는 것이 분노를 올바르게 다스리는 것인지 알아보겠습니다.
분노에는 여러가지 감정들이 있죠.
짜증, 미움, 증후, 원망, 시기질투, 혐오, 복수심, 적대감, 버림받은 감정, 버리고 싶은 감정, 사랑받고 싶은 감정 등
아주 다양한 종들이 표면의식으로 나타낼 때 분노로 표출되곤 합니다.
--분노의 원인
분노가 왜 일어나는지를 알면 감정을 해소하기가 수월해집니다.
분노가 일어나는 데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크게는 세 가지 경우에서 올라오게 돼요.
*첫 번째는 버림받는다고 인식하는 경우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사랑, 이해, 인정, 도움 등을 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화가 나게 됩니다.
상대방에게 사랑이 아닌 것을 받게 될 때
상처, 비난, 미움, 피해, 버림 등을 받는다고 인식하게 될 때
분노가 올라오게 돼요.
이는 과거 양육자와의 관계 생긴
상처받은 아픔이 해소되지 않은 경우인 것인데
이 아픔을 해소할 때까지
현실에서 상처받는 체험을 반복적으로 하게 됩니다.
이 경우에 이해받지 못한 만큼 나도 상대를 이해해 줄 수 없게 되거나
상처를 받은 만큼 상처를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되는게 정상입니다.
분노를 느끼되 과거의 억눌렸던 상처받은 아픈 마음들을 같이 들여다보는 것이 좋습니다.
*두 번째, 본인 안에 억눌린 모습을 타인을 통해서 보는 경우
내가 억눌러 놓은 마음은 상대방의 모습으로 투사되어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과거의 누군가를 무시하고 싶었던 마음을 억누르고 무지 안하는 척을 했던 경우
현실의 나를 무시하는 상대방이 나타나게 되고
도와주기 싫었던 마음을 억누르고 도와줬던 경우에
현실의 나를 도와주기 싫어하는 상대방이 나타나는 원리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하기 싫을 때마다 무능함을 숨기고 열심히 살아왔다면
내 자식에게 그 마음이 투사되어
자식이 하기 싫어하는 무능한 모습을 보여주게 되고
이런 모습을 내가 보게 될 때 화가 나게 됩니다.
또는 뉴스 등을 보고 화가 나는 이유도
자기 자신에게 억눌린 모습을 보게 되기 때문에 화가 나는 것이죠.
현실은 여러분 무의식이 투사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본인 안에 억눌린 모습을 상대방이라는 거울을 통해서 마주하게 될 때 화가 나게 됩니다.
보통은 내 안에 그런 상태가 억눌려 있다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에
현실에 계속 같은 장면이 반복되어서 나타납니다.
*세 번째, 깊은 감정이 건드려지는 경우
분노는 무의식에 더 깊이 억눌린 감정을 감추는 역할을 합니다.
예를 들어서 누군가한테
“너는 왜 이런 것도 못 해”라고 자존심 상하는 말을 듣게 되면
화부터 나는 이유는
내 안에 깊이 억눌린 수치심이나 죄책감이 건드려졌기 때문입니다.
겉에 나타난 분노를 느끼는 고통보다
깊이 있는 죄책감을 느끼는 고통의 강도가 훨씬 크기 때문에
에고는 이런 깊은 감정들을 마주하지 않고 넘어가기 위해서
반사적으로 분노부터 올리게 됩니다.
고통을 교묘하게 피해 가기 위해서
분노로 수치나 죄책감이 없는 척 포장을 하는 것이죠.
화가 난다면
“나는 왜 이런 상황에서 화가 날까?”
의문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분노가 올라온다는 것은
분노 밑에 해소할 감정 했다는 신호에요.
화가 나면
“아, 내가 버림받는다고 느끼니까 화가 나는구나”
“상대방을 통해 억눌린 모습을 봐서 화가 나는구나”
“수치심이 건드려져서 화가 나는구나”
이런 식으로 의식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을 바로 무의식 정화의 시작입니다.
--분노를 다스리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분노를 잘 받아들이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화가 날 때
분노를 터뜨리지 않고 조절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화를 내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화를 내든, 내지 않든 현재 올라온 마음 상태를 알아차리고 느껴 준다면 건강한 것이고
이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느껴 주지 못한다면 건강하지 못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A는 화가 나는 상황에서 욱해서 화를 외부로 불같이 표출했는데
표출하고 나서 감정을 즉시 알아차리고 느껴줬고
B는 화가 나는 상황에서 감정을 조절하고
본인에게는 그런 감정이 없는 척 넘어갔다고 해 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감정을 외부로 표출하는 것을 잘못됐다고 보는 경우가 많아요.
마치 욱해서 화를 낸 A보다 화를 내지 않은 B가 대처를 더 잘한 것처럼 보이나
사실 여기서는 B가 더 건강하지 못한 경우입니다.
왜?
A는 화를 냈더라도 그 후에 감정을 해소했고
B는 본인 감정을 무시하고 넘어갔기 때문이에요.
분노를 표출하더라도 알아차리고
그 후에 느껴지는 감정에 그대로 머물러서 느껴 준다면
이는 감정 해소를 잘하는 경우입니다.
여기서 헷갈리지 마셔야 할 것은
그렇다고 화를 표출하는 것 자체가 감정 해소는 아닙니다.
툭하면 열 받아서 매일 같이 불평을 하고, 반복적으로 타인을 공격하는 사람이라면
외부로 분노를 표출 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자꾸 화가 나는 일이 나타난다는 것은 분명
감정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표출하는 것 자체로 해소가 되는 거라면
애초에 이 세상에는 화가 나 있는 사람들이 있을 수가 없겠죠.
툭하면 계속 화가 나게 되는 큰 원인은
화를 낼 때 무의식 상태로 빠져서 감성을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왜 화가 났는지
지금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내 안을 들여다보지 않기 때문에 분노 감정이 전혀 해소되지 않습니다.
또한 자신이 화가 났다는 것을 알아차린 해도
화를 내고 나서 화를 낸 나를 자꾸 억누르는 경우, 감성 해소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자신의 아이를 혼내놓고
“어휴, 난 왜 부모가 돼서 애를 아프게 하지, 다음부터 화내지 말자”
이런 식으로 화낸 나를 억눌러요.
억누르면 자꾸 그 감정을 느껴야 하게끔만 창조 되죠.
화를 내는 나를 누르니까 또 화내고 싶게 창조되고
또 화를 낸 나를 누르니까 또 화내고 싶게 창조되고
이 무한반복 사이클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상처받은 마음 느끼기
화가 올라오는 경우
알아차린 후
즉시 명상 상태로 들어가서
가만히 그 분노를 느껴 줍니다.
예를 들면 화가 나면 보통 피해의식에 해당되는
미움, 증오, 원망, 버림받은 감정, 복수심 등을 느끼게 돼요.
이런 감정들을 느끼면서 과거에 억눌렸던 상처받았던 마음들을 들여다보면서
같이 풀어줘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에고가 속에서 하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그대로 하게 둬야 되요.
예를 들어서 화를 참고, 화가 안 난 척 할 말을 못하고 넘어갔는데
실제 속마음은 나도 내 할 말 하고, 욕을 막 하고 싶었다면
속으로 그 하고 싶었던 말을 하거나
욕을 그대로 읊으면서 느껴야 합니다.
상대방에 대한 미움이 굉장하다면 죽이고 싶은 마음까지 느껴 줍니다.
분이 풀릴 때까지 계속 그 감정에 머물면서 느껴 줍니다.
감정 해소에서 가장 흔하게 하는 실수는
예를 들어서 죽이고 싶은 마음을 보다 말고
“아휴, 내가 왜 이러지, 이러면 안 돼” 또는
“아 그냥 내가 참자”
이런 식으로 분노를 느끼다 말고 다시 억누르게 되는데
이런 경우 원망이나 화가 풀리지 않게 되면서
현실에 또 분노해야 하는 일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런 감정들을 느끼는 것이 당연한 것이니까
절대 이상하게 보지 마시고
내 안에 있는 분노를 필터 없이 그대로 다 꺼내서 봅니다.
분노가 간혹 내 안을 향해서 나 자신을 미워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는데
자신이 밉다는 마음 역시 감정이기 때문에 인정하고 느끼면 됩니다.
분노 밑에는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있을 거예요.
이 마음 역시도 사랑받고 싶다고 인정합니다.
에고가 어떤 생각 감정 행동을 하든 무조건 허용하고
관찰자는 그런 마음들을 동시에 바라봅니다.
화를 잘 못 내고 참는 편에 해당 되신다면
화를 못 내고 넘어갈 때마다
“나도 화 내고 싶다”
“근데 마찰을 일으키는 것이 무섭다”
“싸우는 것이 무섭다”
“상처받는 것이 상처주는 것이 두렵다”
“버림받는 것이 두렵다”등의 마음도 인정해 줍니다.
이때 반드시
“상처를 줘도 된다”
“화를 내도 된다”고 허용을 해야 합니다.
*감정 표출 허용하기
여기서
“왜 화를 내도 돼? 화를 내면 안 되지” 라는 생각이 든다면
상처 주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큰 상태입니다.
상처 주면 안 된다는 관념을 갖게 되는 이유는
무의식에 과거부터 상처를 주는 체험에 대한 죄책감이 해소되지 않은 채로 억눌려 있기 때문이에요.
화를 표출하지 못한 사람일수록 상처를 주는 것을 두려워하고
상처를 줬다가 버림받거나 죄책감을 느끼게 될까 봐 무서워서
화를 내지 않으려고 합니다.
마음을 누르면
현실은 자꾸 그 마음을 보라고 여러분을 더 힘들게 할 거예요.
화를 내고 싶은 에고를 억압하게 되면
화를 내고만 싶게끔 현실이 나를 자꾸 화나게 하는 장면을 보여 줄 것이고
상처를 주고 싶은 마음을 억압하게 되면
현실에서 자꾸 나만 상처를 받아서 진짜 상처를 주고 싶게끔만 창조됩니다.
피해를 주는 것은 나쁘다는 관념은
이 사회에 더 많은 피해를 창조해 내고
범죄는 나쁘다는 관념은
사회에 더 많은 범죄를 일으킵니다.
선과 악을 분리 시켜서
악을 악으로 취급할수록
당연히 두려움 에너지를 자꾸 되게 되니까
현실에 악이 계속 창조될 수밖에 없어요.
개인을 넘어서 집단이 윤리적 관념을 강하게 붙들고 있을수록
집단적인 더 큰 에너지가 생성되기 때문에
현실에 그 나쁜 것이 더 큰 강도와 빈도로 창조가 됩니다.
반대로 우리가 어떤 것을 나쁘다고 인식하지 않을 때
현실에서 그 나쁜 것이 사라지게 됩니다.
피해주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닌 것이 될수록
피해 주는 장면이 현실에서 점점 사라지게 되죠.
그렇기에 “화를 내도 된다”
“상처를 줘도 된다”고 허용합니다
이렇게 허용을 하게 되면은
예전 같으면 화가 날 때 화 안 난 척하고 넘어갔을 사람이
화가 나는 상황에서
“나는 괜찮지 않아요!” 라고 감성을 그대로 표출하는 장면이 나타나게 됩니다.
화를 표출하지 않는 경우 느낄 감정은 피해의식 쪽의 감정일 것인데
화를 표출하는 경우는 버림받은 감정뿐만 아니라
가해 의식 쪽인 수치심, 죄책감 등을 느끼게 됩니다.
무의식 차원의 수치심 죄책감은 분노보다 훨씬 깊게 갇혀 있는 감정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깊은 감정을 해소하는 시기가 되면은
화를 외부로 표출하면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게 됩니다.
이는 아주 자연스러운 과정이에요.
*상처 주는 마음 느끼기
우리 무의식에 상처를 받은 마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 시절에 부모에게 상처받은 아이는
똑같이 상처를 주고 싶은 마음을 느끼게 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여러분에게 피해의식이 100 크기로 억눌려 있다면
가해의식 역시 100 크기로 억눌려 있습니다.
이 상대계에서는 어떤 것에 대한 체험을 하기 위해서는
그것과 정반대되는 상태를 체험해야만 가능해지죠.
이런 영상을 보시는 우리 여러분들은
세상을 이롭게 하는 역할을 하기 위해서
부모한테 피해를 주는 입장으로 태어나
무의식에 죄책감을 세팅하게 됩니다.
부모한테 피해를 준 입장이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감정에 대한 이해나 사랑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어린 시절부터 상처를 받은 아이는
같은 크기로 상처를 주고 싶은 마음을 느끼게 되는데
문제는 아이가 분노나 공격성을 보일 때마다
양육자가 이를 자꾸 저지 함으로써
아이는 양육자의 버림 받는게 무서워서
분노한 나를 자꾸 억누르게 됩니다.
상처를 주고 싶을 때마다 그 마음을 꾹꾹 눌러 썼기 때문에
여러분에게는 상처받은 마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크기로 상처를 주고 싶은 마음 역시 억눌려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셔야 하고요.
사랑을 받지 못했으니 줄 사랑이 없고
받은 것이 상처밖에 없으니 줄 것이 상처 밖에 없는게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면
그런 에고를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이 현실 게임을 시작할 때
애초에 사랑을 주고받는 체험을 하기 위해서
상처를 주고받는 체험을 하기로 설정했다는 것을 명심하시구요
이를 해소하려면
화도 내보고 상처도 줌으로써 그 후에 느껴지는 감정을 느껴야 합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대로 하고 싶은 말을 해 보고 화도 내 보세요.
물론 동시에 관찰자로 화를 내고 있는 나를 알아차리고 바라봅니다.
에고가 마찰을 피하게 되는 이유는
버림받는 고통을 느끼기 싫어서죠.
당연히 싸움을 일으키게 되면 버림받는 수치를 크게 느낄 것이고
그 뒤에 죄책감 역시 크게 느끼게 될 겁니다.
그 고통을 그대로 마주하고 느낍니다.
만약에 상처를 줘 놓고서
“나는 잘못한 거 없는데?”하고 죄책감을 못 느낀다면
감정 억압이 굉장히 심한 상태인 거예요.
죄책감이 안 느껴진다면
상처받은 분노 원망 등이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것이니
그거부터 느껴 줍니다.
상처받은 것에 대한 분노 감정을 잘 해소하는 경우는
상처를 준 것에 대한 죄책감이 저절로 느껴지게 됩니다.
죄책감은 억눌렸던 감정이 사랑으로 정화되기 직전에 느껴지는 감정입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행위를 해 본 사람만이
죄책감을 느낄 수 있게 되면서
상대방도 자신과 똑같이 아팠던 사람임을 알게 되고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죄책감이 해소되면 저절로 참회가 일어나면서
에고의 무지가 벗겨지고
억눌렸던 감정이 사랑으로 치유되면서
현실은 사랑이 되고 사랑을 나눠줄 수 있는 상태가 됩니다.
상처 준 고통을 느껴본 사람만이
상대방을 진심으로 분별없이 사랑하고 감사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화가 안 난다면
마지막으로
“나는 화가 별로 안 나는데” 라고 하는 분들도 있을 것 같아서
별로 화가 안 나는 경우를 짚고 넘어갈게요.
화가 별로 안 난다는 것은 두 가지 경우로 볼 수가 있는데
하나는 진짜로 화가 별로 없어서 화가 안 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화가 올라옴에도 불구하고 화가 없는 척하는 경우입니다.
이 둘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진짜로 화가 없어서 화가 안 나는 경우는
무의식이 비어 있기 때문에 실제로 화가 날 일이 없게 됩니다.
수행을 통해서 억눌렸던 감성을 사랑으로 정화한다면
내부의 사랑이 외부로 투사되어 현실을 분별없이 인식할 수 있게 되죠.
어린아이의 무의식이 비어 있어서 편안한 것처럼
무의식 정화를 하게 되면
예전 같으면 잘못됐다고 인식할 것들을 더 이상 잘못했다고 인식하지 않게 됨으로써
자연스럽게 화가 날 일이 없게 됩니다.
이런 경우라면 수행을 꾸준히 잘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화가 나더라도 감성을 금방 해소하고 고요한 상태에 잘 머물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가 아닌 대부분의 경우는
현실에 심기를 건드린 장면이 나타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모른 척, 화가 안 나는 척을 하게 되는 경우에요.
두려운 장면이 나타났을 때
고통스러운 감정을 느끼는 것이 싫으니까 고통을 피하려고 하는 것인데
이때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화가 안 나는 척하고 넘어가는 거죠.
반복적으로 감정을 마주하지 않고 회피하는 경우
나중에는 내가 기분이 나쁜지 슬픈지 화가 나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가 됩니다.
화가 나는 상황에서 적절하게 화를 느끼지 못하게 되죠.
내부에 감정이 분명히 있는데 이를 전혀 느끼지 못한 상태가 됩니다.
감정이 메말랐다고 표현하죠.
이 경우에
“나는 불편한 감정 없어, 난 여기서 편안해” 라고 착각을 하게 되죠.
감정 회피가 심한 사람일수록 보통
생각만 열심히 하고 감정을 억제하기 때문에
정신체(멘탈체)와 감정체(아스트랄체)의 불균형이 나타납니다.
머리는 열심히 굴리는데 감정 배출이 없으니까
컴퓨터가 과부하 걸린 것처럼 살다가
결국 나중에 고장이 나 버리게 돼요.
화를 표출하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분노 에너지가 나가지 못하고 무의식 차원에 계속 쌓이게 되는데
이 에너지가 커질 대로 커지게 되면
본인 에고 또는 타인 에고를 공격하게 됩니다.
자신이나 자신과 가까운 사람에게
병이 생기거나 다치거나 자해, 자살, 사고 죽음 등의 장면이 현실로 나타나죠.
현실이라는 게임 안에서 보면
병리학적인 문제로 병이 생기거나
어떤 원인에 의해서 사고가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게임 밖에서 보면
감정 에너지가 억눌린 채로 계속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본인 에고 또는 타인 에고가 잘못되도록 게임 내용이 구성되어서 나타납니다.
이때 에고에게는 이 장면이 허상임을 전혀 알아차릴 수 없게
명백한 원인과 결과가 있는 것처럼 해서 나타나게 돼요.
감정을 억제한 사람이 수행을 한다고 간혹 성인군자 코스프레를 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것이 분명히 거슬림에도 불구하고
“나는 수행한 사람이니까 타인을 이해해야지
어차피 모든 것이 돼 마음이 일으킨 허상인데 좋은게 좋은 거라고
화를 내서 무엇하리 ”
이런 식으로 되지 않는 이해를 하려고 합니다.
남의 자식한테는
“어 그랬구나 괜찮아” 하고 받아주는 데
정작 화가 나 있는 내 자식한테는
“넌 대체 왜 그러니” 하면서 못마땅해해요.
분노 감정을 억압함으로써
결국 더 분노해야 하는 일이 도돌이표로 현실의 계속 나타나게 되죠.
그래서 관찰자 모드로
분명히 거슬리는 것이 있는데 회피하는 것은 아닌지 체크하는 것이 좋습니다.
수행한다고 깨달은 척 평온한 척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에고 자체를 어떤 이상적인 상태로 만들도록 채찍질하고 고쳐나가야 하는 것이 절대 아니에요.
에고는 에고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세요.
대신에 여러분은 그걸 알아차리고 바라보고 계시면 됩니다.
진짜 수행은 여러분의 에고가
어떤 감정, 생각, 말, 행동을 하든
그런 에고를 인정하고 분별없이 허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현실이 사랑이 돼서 돌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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