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 1

[나탐Natam] 인생이 원하는 대로 풀리는 원리 핵심 요약 *중요* | 힘들다면 삶이 잘 풀린다는 신호 |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

Buddhastudy 2024. 5. 14. 20:01

 

 

인생이 항상 원하는 대로 순탄하게 흘러가면 좋겠지만

현실은 기대와는 다르게 펼쳐지곤 합니다.

삶이 뜻하지 않는 방향으로 꼬이고

우려하던 일이 발생해서 괴로워지게 되죠.

 

괴로울 때 이런 착각을 해요.

대체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지?”

이러다 내 인생 진짜 망하는 거 아닌가?” 싶죠

 

하지만 고통을 겪는다는 것은

그동안 잘못 살아온 것이니 인생이 망하게 될 것이다라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잘 살아온 것이고

인생이 뜻하는 방향으로 잘 풀리고 있다는 신호로 볼 수 있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 그냥 그런 식으로 합리화하는 거 아닌가?” 싶다면

이번 영상을 통해서

-고통이 삶에 진짜로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원하는 현실은 어떤 원리로 나타나는 것인지

-왜 내 인생은 더 나아지는 것은 없이

더 힘들어지기만 하는 것 같은지를 알아볼게요.

 

 

여러분이 괴로움을 어떤 자세로 대하느냐에 따라서

괴로움으로 인해서 인생이 더 꼬이기도 하고

인생이 오히려 순탄하게 풀리기도 합니다.

 

마음에서

-원하는 경험은 좋은 것이라 여겨서 집착하고

원하지 않는 경험은 나쁜 것이라 여겨서 밀어냅니다.

-인정받기를 원하면 인정받는 쪽만 바라본 채

인정받는 것과는 반대되는 경험인

무시당하거나 수치당하는 경험은 밀어내죠.

 

우리가 원하는 쪽, 좋은 쪽만 쫓다 보면

종종 간과하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실제로 무엇이

원하는 현실에 대한 인식과 체험을 가능하게 하는가?]에 대한 부분이죠.

삶이 원하는 대로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원하던 대로 이루어졌다고 느낄 수 있는 현실을

인식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럼 [원하던 대로 되었다]고 느낄 수 있는 현실을

나타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원하던 대로 되지 않았다]고 느껴지는 현실입니다.

 

 

 

--원하는 경험은 상대적인 경험이 있을 때 가능해진다

 

왜냐하면 현실은

[상대적인 상태]가 있어야

비로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A를 현실로서 인식할 수 있으려면

A1은 상대적인 상태를 인식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밝음을 인식할 수 있으려면, 어두움을 경험해야만 하고

-어두움을 인식할 수 있으려면, 밝음을 경험해야만 합니다.

 

어둠을 경험한 적이 없게 되면, 빛을 인식하지 못하게 돼요.

현실에 빛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즉 원하는 경험은 절대 그 자체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어요.

상대적인 경험인, 원하지 않는 것에 대한 경험이 있을 때

비로소 원하는 것에 대한 경험이 가능해지게 됩니다.

 

만약에 원하지 않는 것에 대한 경험이 없다면

원하는 것에 대한 인식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에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장면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설명해 볼게요.

마음에서 원하는 바가 나만의 어떤 것을 창작하여서

그것을 사람들과 나누든

가정이나 집단 내에서 사람들에게 필요한 역할이 되든

원하는 바가 사람들과 사회에 도움이 되는

능력 있는 사람이 되어서 [인정받는 것]이라고 해보겠습니다.

 

현실에서

나는 사람들에게 필요하고, 능력이 있고, 도움이 되고, 인정받는 존재이다라고

느낄 수 있는 체험이 가능해지려면

상대적으로

나는 사람들에게 불필요하고, 무능하고, 피해만 되고, 무시당하는 존재이다라고

느끼게 되는 체험이 있게 됩니다.

 

나는 남에게 피해만 주는 무능하고 불필요한 존재라 무시당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될 때

상대적으로 나는 남에게 도움이 되는 쓸모 있고, 필요한 존재

인정받는다는 인식이 일어납니다.

 

인식이 일어난다는 것은

그것을 현실로 체험하게 된다는 말이에요.

[무시당하는 경험이 있게 되면, 인정받는 현실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착각을 합니다.

무슨 무시를 받는다고 인정받는 체험이 나타나?

그냥 목표로 한 것을 해냈을 때 인정을 받는 거지,

예를 들어서 원하는 것이 웹툰 작가로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라면

웹툰 분야를 공부하고, 그림 연습을 하고, 좋은 스토리를 구상하고

목표를 향해서 자기 할 일을 꾸준히 해냈을 때 인정을 받는 거지,

무슨 무시를 당한다고 인정을 받는 게 가능해져

라고 생각할 수 있죠.

 

다시 한 번

어떤 현실이 체험될 수 있으려면

반드시 상대적인 상태의 체험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1) 웹툰 작가가 되는 현실이 나타나는 과정에

뒷받침되는 모든 세부적인 체험 역시도

상대적인 체험이 동반됩니다.

 

-‘웹툰 분야를 공부하는 체험

배움을 얻지 못한다고 느끼는 체험이 있어야 가능해지고,

-‘그림 연습을 하는 체험

그림 연습을 하지 못한다고 느끼는 체험이 있어야 가능해집니다.

-‘좋은 스토리를 구상하는 체험

좋은 스토리를 구상하지 못한다고 느끼는 체험이 있어야 가능해지고

-‘목표로 한 일을 해내는 체험

해내지 못한다고 느끼는 체험이 있어야 가능해집니다.

 

즉 웹툰 분야를 잘 알지도 못하고, 그림 연습도 안 하고, 스토리 구상도 안 되고, 목표도 없고 제대로 해내는 것도 없어서

사람들에게 무시당한다고 느끼는 체험이 있게 될 때,

비로소 내 아바타가 웹툰을 공부하고, 그림 연습을 하고, 스토리 구상을 해내고, 목표를 갖고 꾸준히 해내게 되면서

웹툰 작가로서 인정받는 체험이 나타나게 됩니다.

 

2) 하나 더 예를 들어볼게요.

원하는 것이 몸을 건강하게 유지해서

사람들로부터 짐짝 취급을 받지 않고, 사랑받는 것이라고 해볼게요.

그럼 우리는 그 원하는 결과를 내기 위해서

이런 체험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고, 건강식을 먹고, 병이 생기면 제때 치료를 받고,

운동비, 식비, 병원비 등으로 들어갈 돈을 벌 능력을 갖추는 것이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결과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여깁니다.

 

물론 당연히 그런 세부적인 체험들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은 맞아요.

하지만 그런 세부적인 체험들 역시도

상대적인 체험이 뒤따를 때 가능해집니다.

 

운동을 게을리하고, 건강식도 못 먹고, 제때 치료도 못 받고, 돈을 벌 능력도 없어서

사람들에게 짐이 되어 버림받는다고 느끼는 체험이 있게 될 때,

상대적으로

운동과 식단을 꾸준히 하고, 병이 생기면 제때 치료도 받고

돈을 벌 능력도 갖추게 되어서

몸을 건강하게 유지해서 사람들에게 짐을 얹어주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의 짐을 덜어주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인간이라는 아바타를 가지고

이 상대계라는 현실을 체험하기로 한 이상,

마음에서 무슨 체험을 하기를 원하든

그것을 체험하기로 한 대가로

반드시 그것과는 반대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반대되는 체험이 없다면

원하는 체험에 대한 인식이 불가능해져요.

 

예를 들어서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기를 원하면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없는 경험이 있게 되고

-사람들로부터 환영받기를 원하면

사람들로부터 거부당하는 경험이 있게 됩니다.

-성공하길 원하면

실패하는 경험이 있게 되고

-가치 있는 사람으로서 인정받기를 원하면

가치가 없어서 무시당하는 경험이 있게 됩니다.

-마음의 안정을 원하면

마음이 불안정해지는 경험이 있게 되고

-시간, , 자유를 갖기를 원하면

시간, , 자유를 뺏기는 경험이 있게 되고

-깨닫기를 원하면

무지해지는 경험이 있게 됩니다.

 

 

그럼, 이쯤에서 궁금한 게 있을 거예요.

아니 굳이 꼭 그렇게 원치 않는 것을 경험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원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런 원리라면 내 현실에는 원치 않는 일만 잔뜩 일어나는데

그럼 원하는 일도 잔뜩 나타나야 하는 거 아닌가?

왜 내 현실에는 원치 않는 일만 가득하고

원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 거지?”

 

 

--원치 않는 체험 없이 원하는 것에 대한 체험이 가능할까?

 

알아볼게요.

굳이 꼭 그렇게 원치 않는 것을 체험해야만 원하는 것이 체험되는가?

 

여러분이 실패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상태에서

성공을 인식할 수 있을까요?

해내지 못했다는 실패한 아픔을 경험한 적이 없는 사람은

3자가 보기에 아무리 대단한 것을 이뤄낸다 한들

당사자는 결코 그것을 해냈다라고 인식할 수 없게 됩니다.

 

-약자의 위치에 있어보지 않은 사람은

강자가 되는 경험을 할 수가 없고요.

-사람들과 분리되어 보지 않은 사람은

사람들과 아무리 함께 붙어 있더라도

함께 있다는 느낌을 느낄 수 없게 됩니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아 보지 않은 사람은

세상으로부터 받아들여진다는 느낌을 느낄 수 없습니다.

-너와 나를 다르다고 미워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너와 나는 하나로 사랑임을 인식할 수가 없어요.

-경제적으로 불안정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경제적으로 안정적이라는 느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며,

-자유를 빼앗겨본 적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자유를 가졌다고 인식할 수 있겠습니까?

 

자유를 빼앗겨보지 않은 사람은

자유를 갖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가 없어요.

현실은 인식하기에 존재하는 것이고

인식이 없으면 사라지는 것입니다.

[인식은 상대적인 것이 있을 때만 가능해지는 것]이고요.

 

만약에 자유를 뺏기는 경험이 아예 없다면

현실에 어떻게 나타날까요?

 

쉬운 예로

바다의 고래에게는 자유를 뺏기는 경험이 딱히 없습니다.

고래에게는

, 너 절대 허락 없이 바다에 이곳저곳을 마음대로 헤엄쳐서는 안 돼.

감시할 거야.

누가 그렇게 네 마음대로 바다를 설치고 다니래?

너 앞으로 10년간 감옥살이야라는

억압이나 통제를 받아야 하는 일이 없죠.

 

고래는 억압당하지 않기에

헤엄칠 자유를 빼앗겼다고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다 보니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느낌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만약에 고래가 북태평양에서 남태평양을 이동한다면

우리 눈에는 고래가 넓은 바다를 자유롭게 헤엄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고래 시점에서는 러닝머신 뛰듯이 제자리 헤엄치는 것처럼 느끼게 돼요.

정확히는 제자리 헤엄친다고도 느끼지 못하겠지만요.

 

 

여러분이 꿈속 현실에서

차를 타고 어디로 이동해서 간다면

내가 차를 타고 이만큼을 이동해 왔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는 것과 비슷해요.

 

여러분의 현실에 원치 않은 싫은 경험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면

현실에는 좋은 경험만 가득할 것 같죠?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현실이라는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원치 않는 싫은 경험은 안 하려고 하고

원하는 좋은 경험만 하고자 하는 것은

마치 그냥 돌처럼 존재하면서 아무 경험도 하지 않겠다는 것과 똑같습니다.

돌에게는 무시당하는 경험이 없으니

인정받는 것이 뭔지도 느낄 수가 없어요.

즉 인정받는 현실이 없습니다.

 

돌에게는 분리되는 경험이 없으니

함께하는 것이 뭔지를 느낄 수가 없어요.

즉 함께하는 현실이 없습니다.

 

돌은 마음이 없기에

자신이 무엇이라고 느낄 수 있는 자아가 없고

자아가 없으니 아무 체험도 되지 않습니다.

돌에게는 그저 존재함

그거 말고는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보이지도 않고

아무것도 느껴지지도 않고, 시공간이 아예 존재하지 않습니다.

 

즉 여러분이 고래나 돌이 아니고 인간 아바타를 가지고 있는 이상은

현실로 A라는 경험을 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A와는 반대되는 경험을 해야만 A를 인식할 수 있게 됩니다.

 

 

[원하는 경험과 원치 않는 경험은 본질적으로 정확히 같습니다.]

무시당하는 체험과 인정받는 체험은 달라 보이지만

그 본질은 정확히 같은 거예요.

 

동전의 앞면과 뒷면은 다른 듯하지만

본질은 같은 것과 같습니다.

앞면과 뒷면을 떼어내면, 더 이상 동전이 존재한다고 할 수 없죠.

앞면과 뒷면이 함께 있을 때 동전으로 존재합니다.

 

마찬가지로 원하는 경험과 원치 않는 경험을 떼어낸다면

현실이 아예 체험되지 않습니다.

두 경험이 함께 있을 때 비로소 현실이 존재하게 됩니다.

 

즉 여러분이 인정받는 경험을 1만큼 원하는 한

무시당하는 경험도 1만큼으로 가져갈 수밖에 없어요.

10만큼 자유를 뺏기는 덕분에 10만큼 자유를 갖게 되는 것이고

100만큼 무시를 당하는 덕분에 100만큼 인정을 받게 되는 겁니다.

 

아직도 헷갈릴 분들이 있을 거예요.

아니 그래도 굳이 자유를 빼앗기지 않아도

자유를 갖는다는 게 뭔지를 느낄 수 있는 거 아닌가?

굳이 자유를 빼앗겨야 하나?”라는 마음은

자유를 빼앗기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자 저항이죠.

 

여러분이 자유를 빼앗겨 보지 않아도

자유를 갖는 것이 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은 이유는

이미 여러분은 현생뿐만 아니라

전생, 부모, 조상 그리고 집단의 생을 통해서

자유를 빼앗긴 경험과 자유를 갖는 경험을

수도 없이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 현생뿐만 아니라

이미 모든 개체로서

모든 시공간 대의 모든 경우의 수의 삶을 살면서

양극으로 나뉘어진 상태를 반복적으로 경험했습니다.

그 경험에 대한 기억을 무의식 속에 갖고 있어요.

실패와 성공, 무시당함과 인정받음, 분리됨과 함께함

이런 걸 수도 없이 이미 겪어봤기 때문에

그것들이 뭔지를 관념적으로 알고 있는 거예요.

 

그렇기에 직접적으로 자유를 빼앗기지 않아도

자유를 갖는 게 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은 겁니다.

하지만 자유를 관념적으로만 아는 거랑

실제로 자유롭다고 느끼는 현실을 경험하는 것은 다르죠.

 

무의식을 의식화해서

자유를 빼앗긴 나로서의 분노, 절망감, 수치심, 죄책감을 느끼고 수용한 사람에게는

현실에 자유를 갖는 체험이 나타납니다.

현실이 실제로 자유롭다고 느껴지게 펼쳐져요.

 

하지만 자유를 빼앗긴 나로서의 감정을 느끼지 않고 저항하는 사람은

자유를 갖는다는 것을 관념적으로는 알 수 있겠지만

실제로 자유롭다고 느낄 수는 없게 됩니다.

 

여러분이 실제로 자유롭다고 느끼고

현실 장면 역시도 자유롭다고 느낄 만한 상황으로 나타난다면

여러분은 자유를 빼앗겼던 기억에 대한 감정을 해소한 것입니다.

 

이때 나는 뭐 무의식이고 뭐고 감정해서 뭐고, 그런 거 하나도 모르는데

내 삶은 자유로운데라고 느낀다면,

여러분 전생 부모님, 조상 아바타의 인생 중에

자유롭지 못한 경험에 대한 감정이 해소되었기 때문에

그의 후생, 후손의 아바타의 인생에는

자유로움을 느끼는 체험이 나타나게 됩니다.

 

 

여기까지 이해하신 분이라면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아니 굳이 인정받고자 하면 무시당하는 고통이 뒤따른다고?

그럼 그냥 아무 체험도 안 해버리는 게 낫지 않나?

나는 무시당하기 싫으니까 인정도 안 받아버릴래

 

여러분이 원하는 것에 대한 마음의 집착을 바로 놓을 수만 있다면

사실 고민할 게 없죠.

문제는 원하는 것에 대한 집착이

그렇게 쉽게 놓아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몇 가지 예를 들어볼게요.

마음에서 놓아지는지를 보세요.

 

-나는 내 돈 시간 자유를 뺏기기 싫으니까

돈 시간 자유를 갖지도 않을래.

-나는 무능한 사람이 되는 거 싫으니까

능력 있는 사람이 되지도 않을래.

-나는 이해 못 받는 거 싫으니까, 이해를 받지도 않을래.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거 싫으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지도 않을래.

-나는 괴로워지는 거 싫으니까, 편안해지지도 않을래?

 

이게 되나요?

이게 하루아침에 놓아지는 거라면

여러분은 애초에 인간으로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인간이 밀물 썰물을 막아보겠다는 거랑 똑같아요.

집착을 억지로 놓으려고 하는 것 자체가

두려움이자 저항입니다.

무시당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저항하는 이상

현실에 무시당하는 체험은 계속 나타나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원하는 것에 대한 집착이 있음을 [알아차리고]

원치 않는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을 그저 [받아들이는 거]

그거밖에 할 게 없어요.

 

-무시당하는 경험을 받아들이고

-돈과 시간과 자유를 뺏기는 경험을 받아들이고

-무능해지는 경험을 받아들이고

-고통스러운 경험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바로 여러분이 원하는 바를 그대로 이루어지게 합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이루게 되는 바탕에는

일이 꼬이고, 걱정하던 일이 터지게 되는 것처럼

원치 않는 경험이 있기 마련입니다.

 

애초에 여러분 인생이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을 예정이었다면

여러분이 원치 않는 경험을 하게 될 이유도 없습니다.

인생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 원하는 대로 풀리게 되어 있는 겁니다.

 

 

 

--원치 않는 일을 겪는데도 원하는 현실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

 

그럼 원치 않는 일을 겪는데 대체

왜 원하는 바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인지 알아볼게요.

 

물론 여러분이 붙든 카르마의 크기에 따라

즉 원하는 것에 대한 집착의 크기에 따라서

그것을 현실로 경험하게 되기까지는

몇 시간에서 몇 천 년도 걸릴 수 있는 것이지만

시간적인 부분은 빼고 설명드릴게요.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경우와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원치 않는 경험을 수용하는가?

아니면 거부하는가?]에 달려 있어요.

 

예를 들어볼게요.

-쓸모없는 나로서 무시당하는 경험이 있게 되면

쓸모있는 나로서 인정받는 경험이 나타나는 원리입니다.

 

이때 쓸모없는 나로서의 경험이란

현실에 무능해서 무시당한다고 느껴지는 상황이 펼쳐질 때

내가 정말 쓸모없는 사람 그 자체가 되어서

생각, 감정, , 행동을 하게 되고

그런 생각, 감정, , 행동을 보인 나를

나 스스로 온전히 수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쓸모없는 나를 보게 됨으로써

나는 진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구나,

나는 아무 도움도 안 되는구나,

나는 피해만 주는구나라는 것이 인정이 되고

그에 따른 분노, 수치심, 죄책감, 절망감,

그로 인해서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을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정말 고통스럽죠.

 

하지만 내 안으로 들어온 숨은

날숨에 사라지는 것이듯이

내 안에 일어나는 감정은

알아차리고 느껴주면 사라지는 것입니다.

감정이 풀려난 후에는 정반대의 인식이 일어납니다.

 

나는 할 수 있는 게 많고

세상에 필요한 도움이 되는 존재이고

세상은 절대 나를 버리지 않고 따뜻하게 받아준다는 인식이 이루어져요.

현실 장면 역시도 그런 인식을 할 수 있게끔 펼쳐집니다.

 

반대로 아무리 무능해지고 무시당하는 상황을 겪는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쓸모없는 사람 자체가 되는 것을 거부하게 되면

쓸모없는 사람으로서의 경험을 한 것이 아닌 것이 되기 때문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 인정받는 경험 역시도 나타나지 않게 됩니다.

 

무시당하는 상황이 나타날 때

더 열심히 노력하고, 도움받기를 거부하고

피해 안 주려고 하고, 더 잘해 낼 수 있는 척을 하게 되면

이건 쓸모 있는 사람이 되려는 것이지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경험을 하는 것이 아닌 것이 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경험 역시도 나타나지 않게 됩니다.

 

또 예를 들어서

, 시간, 자유 등에 내 것을 빼앗기면

, 시간, 자유 등을 내 것으로 갖게 되는 원리예요.

 

근데 아무리 빼앗기는 상황을 겪는다고 해도

정작 뺏긴 나로서의 경험을 거부하게 되면

뺏기는 경험을 한 것이 아닌 것이 되면서

갖는 경험 역시도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해도

그것을 가졌다고 인식하지 못하고, 부족하다고만 느끼게 되는 거에요.

내 것을 가져보지 못한 수치, 아픔,

그래서 나도 남의 것을 빼앗아 내고 싶은

그 분노와 죄책감 등의 감정을 보지 않게 되면

뺏긴 나를 경험한 것이 아닌 것이 되기 때문에

갖는 나에 대한 경험 역시도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또 예를 들면

상처 주는 나를 경험하면

사랑을 주는 나를 경험하게 되는 원리입니다.

 

하지만 내가 상대로부터 상처와 피해를 받아서

나 역시도 상대를 상처 주고, 피해 주고 싶을 때

가해자인 나로서

상대를 가해하고 싶은 생각, 감정, , 행동을

나 스스로 수용하지 않고 거부하게 되면

내가 상대를 상처 줬다는 거

그리고 내가 가해자였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게 되면서

사랑을 주는 체험 역시도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사랑을 준다고 느낄 수 없도록

사랑을 받는다고 느낄 수도 없게 돼요.

즉 현실에는 상처와 피해만 받는 장면이 나타나게 됩니다.

 

 

*삶이 순탄하게 풀리는 방법.

정리하자면

삶에 원치 않는 상황이 나타난다는 것은

원하는 것에 대한 체험이 있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원치 않는 두려운 상황이 나타남에 감사하고

두려운 상황을 마주할 때,

내 아바타를 통해 나타나는

생각, 감정 말 행동을 억압하지 않고 수용을 하게 되면

삶은 알아서 원하는 방향으로 풀리게 됩니다.

 

 

--고통으로부터의 진정한 자유는?

 

근데 제가 진짜 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따로 있어요.

여러분이 감정을 수용하고

원하는 바를 이루게 된다고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마음의 집착은 또 올라올 수 있습니다.

 

고통을 수용하여서 평화를 경험한다고

평화로운 느낌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고통은 또 일어날 수 있는 겁니다.

 

돈을 뺏긴 나를 수용해서

돈을 갖는 나를 경험한다고 해도

돈을 가진 느낌이 영원히 체험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또 돈이 없다는 느낌이 들 수 있다는 이야기예요.

 

그 이유는 결정적으로

이 인류 전체가 완전히 인간 체험을 종료하지 않는 이상

여러분 개개인은 전체의 무의식에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붙든 무의식에 부모, 조상, 전생 등에서 해소되지 않은 집착이 있다면

여러분 삶에 집착된 마음은 언제든지 또 올라올 수 있습니다.

 

특히 이런 영상을 이해하는 분은

이미 인간 체험을 수도 없이 많이 한

현실 체험, 게임, 고인물 중에서도 탑고인물들이기 때문에

카르마가 커서

해소해 내야 하는 감정 역시도 큽니다.

 

이번 생의 레벨을 초고난이도로 설정하고 태어났기 때문에

마음 해소하고 잠시 편안해진다고 해도

얼마든지 또 고통스러워질 수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의 조상 전생 체험 중에는

상대방을 쓸모없다고 버리고

상대방으로부터 쓸모없다고 버림을 받은 경험이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에

쓸모없는 나를 해소해서

쓸모있는 나로서 인정받는 체험을 하게 된다고 해도

인정받는다는 느낌을 영원히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또 자신이 쓸모없어서 무시당한다고 느껴지고

그로 인해서 인정받고 싶은 집착이 올라오게 될 수도 있는 겁니다.

 

또한 내 개인 무의식을 청산했다 하더라도

사람들과 어울려서 살아가는 이상

이 사회가 붙든 집착이

여러분 개인을 통해서 나타나게 되기도 합니다.

 

이런 영상을 이해하는 분은

전생 조상 카르마를 해소하는 역할이자

집단 카르마를 정화하도록 돕는 역할이기 때문에

특히 일반 사람보다 마음의 고통을 더욱 크게 경험하게 되어 있습니다.

 

고인물이라

뉴비들 몬스터 잡는 것까지 도와주는 역할을 하게 되다 보니까

힘들 수밖에 없죠.

남의 감정도 내 감정으로 가져와서 정화하게 된다는 이야기예요.

물론 그 감정이 결국 내 감정이지만.

 

물론 고통이 크기에 사랑에 대한 체험도 크게 일어납니다.

뉴비보다 고인물이 개인 보상을 더 크게 받습니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이 이원성의 세계를 사는 동안은

매일 밤과 낮을 경험하고

밀물과 썰물을 경험할 수밖에 없듯이

마음의 고통이 일어남과 사라짐은 반복됩니다.

 

저라고 완벽한 세상에 사는 게 절대 아니고

제 아바타도 여러분 아바타와 마찬가지로

어느 날은 죽을 것 같이 힘들어서 펑펑 울었다가

어느 날은 괜찮았다가 하면서

마음의 고통이 일어남과 사라짐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살 뿐입니다.

 

우리가 인간 아바타를 갖고 사는 이상은

두려움 없이 100% 사랑만 있고

수치당함 없이 100% 인정받음만 있고

고통 없이 100% 쾌락만 있는 상태에는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아무 고통 없이 모든 것이 완벽하기만 한 상태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 자체가

고통에 대한 저항입니다.

물론 여러분은 게임을 너무 많이 한 탓에

카르마를 쌓고 고통스러워졌으니까

현재의 삶에서 카르마 해소하고

인생이 순탄하게 풀리게 되는 것은 맞아요.

 

하지만 만약에 여러분이 무의식을 100% 다 정화해서

완전한 평화를 얻고, 게임을 종료한다고 해도

게임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될 것이기 때문에

고통은 또 시작됩니다.

 

 

*그럼 우리가 진짜 가져야 할 자세는 무엇이냐?

낮과 밤이 있음을,

밀물과 썰물이 있음을

그대로 두고

그것을 바라보는 거

그뿐입니다.

 

원치 않는 체험을 하면 원하는 현실이 나타난다고?

그러면 원치 않는 체험을 더 많이 하면 되겠네라고 할 필요도 없는 것이고

원치 않는 경험은 싫으니까 원하는 경험만 해야지라고 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 어느 한쪽이 낫다고 할 수가 없어요.

어차피 삶과 죽음, 밤과 낮, 원치 않는 경험과 원하는 경험은

반복되는 것이기에

이것이 쌍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이고 바라보는 것

그게 전부입니다.

 

물론 여러분에게는

이 모든 것을 너무나도 받아들이기 싫도록 고통스럽기에

이 모든 것을 초연하게 받아들이고

자유로워지는 것 역시도 가능해지는 것이긴 하지만요.

 

고통으로부터의 진정한 자유는

라는 존재가 낮과 밤

원하는 경험과 원치 않는 경험,

삶과 죽음

마음의 고통이 일어남과 사라짐

너머에 있음을 알고

그 자리에 그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는 어떻게 존재하느냐?

여러분이 겪는 그 고통이

여러분의 본래의 자리를 찾게 해줍니다.

 

고통은

이 현실이 마음이 만들어낸 꿈 세계이며

본래 나는

이 꿈속 현실 너머, 지금 여기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합니다.

 

시청 감사합니다, 여러분.

사랑합니다.

그럼, 다음에 만나요.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