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당신은 일어나
어떤 일부터 시작하였습니까?
아마도 당신은 어제 생각해 놓은 일
혹은 어제 남겨진 오늘의 일상적인 일을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반복하였을 것입니다.
공부나 수행을 한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이미 자신 혹은 누군가에 의해
미리 만들어진 생각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매일을 이미
나 혹은 타인에 의해 만들어진 여러 생각들 속에 살고 있습니다.
아마도 우린 어렸을 때
누군가에 의해 주입된 하나의 생각의 영향을
지금까지도 받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넌 그게 문제야” 하는 타인의 생각이
지금도 내 속에서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린 그런 생각이 가져오는
2차적인 관념이나 느낌, 감정들의 지배를 또 받고 있습니다.
무의식 중에 스스로
“맞아 난 문제가 많아” 이렇게 되었는지도 모른단 말이죠.
또 우린 언젠가 누군가가
“이렇게 해야 돼”
말한 명제에 대해
그 이후엔 아무 생각 없이
그 생각에 의해 조종되는 로봇이 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볼까요?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숱하게 들었던 말,
“산다는 게 다 고해고, 사는 게 대충 적당히 그런 거지 뭐”
이런 생각들이
사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삶은 힘든 것이고
그러다 보니 그 속에서 대충 적당히 타협하고 버티는
우리의 일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매일매일이 그런 생각들에 의해 지배당하고 점령되다 보니
우리의 일상은 이제 낡은 옷처럼 지루해졌습니다.
누구도 일상이 너무나 빛나고 기적 같아서
매일매일을 소풍 나온 아이처럼
삶이 기쁘고 환희에 차서 즐겁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어린아이였을 때
우리는 모두 다 그렇게 빛나는 삶을 살았었는데 말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비단 일상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모두가 다 도둑놈이야”라는 비관적인 관점은
이제 우리 사회의 공통 잠재의식적인 생각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저는 그렇게만 보지는 않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숨어서 조용히 제 할 일을 하고
잔잔한 사랑을 실천하는 너무나 아름다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적어도 제가 아는 사람 중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언론들은 그런 관점보다는
사람들을 자극하고 흥분시키는 소재를 더 찾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과연 우리 사회를 어디로 몰고 가려는 것일까요?
종교에 있어서도
인류는 온통 모두가 다 죄인이다라는 원죄사상이나
모든 중생은 다 문명 업장을 가지고 있다라는 업장사상은
우리 내면의 진리를 찾는 우리들에게
우선적으로 부정적인 어두움과 한숨을 먼저 안겨줍니다.
제가 내면의 깨어남을 겪고 나서
이상하게 본 것은
세상의 종교들이 왜 처음에 우리들에게
“본래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라든가
“본래 다 부처입니다”라는
축복과 기쁨의 말로부터 시작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본래 모습이고,
우리가 있어서 모든 진리도 있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종교들은
항상 그것들보다는
우리에게 이러저러한 큰 문제가 있다로부터 시작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어디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 그 시선이
바로 문제라는 말이 있죠.
저는 이러한 우리 스스로 만든
우리 스스로에 대한 한정과 정죄들이
바로 우리들이 만든 우리 스스로에 대한 멍에이자 구속입니다.
그리고 우리들 내면에 태초부터 들어 있는 신성한 능력을 깨우는 길에
가장 큰 장애가 아닐까도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우리의 귀한 존재성을 너무나 평가절하하며 살아오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에게 잘못이 없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을 고치는 길이
먼저 우리 자신을 정죄하고 비난하는 것이어야 할까요?
어린아이도 잘못을 꼬집기보다는
잘하는 점을 먼저 칭찬하고
부족한 점을 더 북돋우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이 아닐까요?
이처럼 저는 내면적으로 깨어나면서
지금 우리가 거대한 생각의 세계 속에 갇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인류가 문명을 발전시켜 오면서
많은 생각들을 만들어냈고
또 그것들을 활용해서
보다 더 편리한 물질문명을 구축했지만
그러나 그 반대로 그것 때문에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이 또한 많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들이 바로
본래의 위대한 우주적 영혼인 우리가
이 물질 육신 안에 갇힌 감각 반응체로 전락했습니다.
또한 이 삼라만상 속에 가득 차 있는
수많은 신비와 비밀스러운 영적 차원이
우리로부터 떠나갔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물질적 편리를 얻기 위해
그것만에 집중한 나머지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들을 잃어버렸다는 말도 됩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는
그러한 생각 차원에 마치 감옥처럼 갇혀있습니다.
그것은 인류 대대로 업장처럼 쌓여
선대의 것이 후세대까지 영향을 미치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특히 정신적인 분야일수록 이런 것들이 더욱 심합니다.
그래서 종교는 교파가 갈라지고
깨달음이나 구원은
특정 종교 집단의 품속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삶 속에서 겪는 눈부신 진리와의 신비로운 만남은
이미 남들에 의해 제시된 틀 안에서
그것을 보완하는 작은 체험 정도로 전락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타인의 체험이나
자기 내면의 직관을 중요시하지 않습니다.
“네 생각이 뭐야?
그 생각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어?”
그들은 바쁘기에 더 이상은 묻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체험과 영적 직관을
죽은 생각과 개념 속에 담아오라고 주문합니다.
그것이 오늘날의 학문이며 세상의 흐름입니다.
저는 이러한 오늘날의 우리의 삶의 방향이
마치 영양분이 풍부한 살아있는 과일을
기계에 넣어서 말려 영양분을 다 빼고 당분만 남긴
‘말린 과일’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입니다.
저는 이제는 우리가
우리가 만든 그러한 어두운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느낍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모든 측면에서
모든 고정관념과 세상을 지배하는 수많은 굳어진 생각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자유롭게 해야 한다고 강렬하게 느낍니다.
바로 우리 삶의 모든 구석구석에서 우리는
스스로 다시 새로이 생각하고
자기만의 창조적인 시각으로 다시 바라다 보아야 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남들이 만들어준 개념 속에서
삶의 실상을 보지 못하고
남의 생각이 지배되는 삶만을 살다가 죽어갈 것입니다.
마치 평생을 제 몸에 딱 맞는 옷 한 벌 맞춰 입어보지 못하고
대충의 기성복만을 사 입다가
많은 불쌍한 사람처럼 되고 말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이 고귀한 한 번뿐인 일생을 살면서
지금보다는 더 신성하고 고귀한 생각과 고귀한 체험을 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가 물려받은 이러한 부정적인 생각들과
우리들이 살아온 세상 속, 고정관념의 지배력으로부터
과감히 깨어나고 놓여나야 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실천하여
우리가 깨어나고 우리의 삶에 하나의 의미 있는 꽃을 피울 것인가요?
그것이 바로 지향하며 논하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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