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3)

[즉문즉설] 제301회 딸을 이해하면서도 화가 납니다

Buddhastudy 2013. 3. 2. 04:21

출처 YouTube

  

오전 법문 할 때도 이미 말씀을 드렸는데 우리가 경험을 통해서 어떤 새로운 거를 발견할 수 있거든요? 즉 딸아이 하는 행동이 내가 어릴 때 어머니에게 대들었던 행동과 거의 비슷하고, 내가 딸아이에 대응하는 행동이 어머니가 나에게 하는 행동하고 거의 비슷하다. 이렇게 지금 말씀을 하셨는데. 그러면 여기서 깨치는 바가 있다는 거요. 딸아이가 하는 행동이 지금 내가 엄마입장에서 볼 때는 못마땅할 거 아니오. 그죠?

 

그러면 내가 어릴 때 한 행동이 엄마입장에서 볼 때는 참 못마땅한 행동 아니었을 거요. 그러니 아이의 내 못마땅한 아이의 행동을 보면서 내가 엄마에게 참회할 수가 있다. 엄마에게 내가 알게 모르게 맺힌 엄마에 대한 오해가 풀어진다. “~ 그때 내 입장에서는 이렇게 생각을 했는데, 엄마 입장에서 볼 때 내가 지금 엄마가 돼서 보니까 아~ 이런 걸 바라고 있었고, 이런 거에 대해서 마음이 불편하셨겠구나.” 그러니 엄마에 대해서 맺히는 나의 문제를 반성할 수가 있다.

 

또 뒤집어서 그때 내가 어린 마음에 엄마의 이러이러한 것이 나한테 다가오지 않고 섭섭해 했던 거를 내가 생각해 보면 내가 지금 딸아이에게 잘한다고 하는 일이 딸아이에게는 이게 섭섭해지고 상처가 되겠구나.’ 이렇게 한다면 내가 딸 때, 어릴 때, 엄마가 이랬으면 좋겠다 하는 게 있었을 거 아니오. 그죠? 그걸 이 딸아이도 거의 비슷하겠다. 이렇게 생각하면 엄마가 딸아이의 입장에 서서 딸아이가 원하는 데로 한 번 해보는 거요.

 

다시 말하면 이 딸과의 갈등을 통해서 나는 엄마를 이해하게 되고, 옛날에 엄마와의 갈등에서 내가 어릴 때의 심정으로 돌아가면 지금 딸아이를 이해하게 되는 거요. 그래서 오히려 엄마도 이해하고 딸도 이해한다. 그러면 엄마도 이해하지 못하고 딸도 이해하지 못하면 내 가슴이 터질 듯 답답한데. 엄마도 이해하고 딸도 이해해 버리면 내 가슴은 시원해지는 거요. 이게 바로 업장이 녹는 거다. 그러니 이 갈등을 통해서. 즉 딸아이로부터 일어나는 내 마음을 보면서 내 마음이 깨어있어야 되는 거요.

 

내 마음을 보면서 나는 엄마로 인해서 맺힌 내 업을 녹이고. 또 그 과거의 엄마로부터 받았던 내 상처를 내 경험을 살린다면 나는 딸아이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게 된다는 거요.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엄마하고의 관계에서는 내가 딸로서 나를 고집해서 엄마가 딸한테 이렇게 할 수 있느냐?’ 하는 생각만 하고. 딸하고의 관계에서는 내가 엄마로서만 고집을 해서 딸이 이렇게 할 수 있느냐?’ 이렇게 적용하는 거요. 이렇게 되니까 엄마도 이해하지 못하고 딸도 이해하지 못하는 거요. 그리 되면 인생이 불행해 진다.

 

그러니 신경질 낼 게 아니라. 화낼게 아니라 그런 나를 보면서 ~ 이렇게 하면 내가 바로 내 고통을 만드는 거다.’ 이렇게 반복하잖아요. 그죠? 엄마가 했던 거를 내가 받아서 반복한다는 거는 바로 모진 시어머니 아래 있던 며느리가 똑같은 짓을 하는 것과 같잖아요. 개선이 안 되죠. 업이 계속 연결이 되죠. 여기서 내가 한 생각을 바꿔버리면 어떠냐? 어머니도 해탈시키고 있고 딸도 해탈시키고 있고 업의 뿌리를 뽑아 버릴 수가 있다는 거요.

 

그러니 안 된다고 화내고 똑같이 한다고 화내고 이러지 말고. 이런 거를 안 될 때는 ~ 이게 안 되구나. 여기 걸리구나. 내가 이렇게 똑같이 닮아가는 거구나.’ 닮아가는 거구나 하는 걸 알았는데 왜 화가 납니까? ‘닮아 가는 거구나.’ 이제 알았으니까 이제 안 닮아 가면 되죠. 닮아갈 때는 닮았는지 안 닮았는지도 모를 때 닮아가거든요. ‘~ 이거 닮아간다.’ 이걸 알았다는 거는 안 닮아 갈 가능성이 열린 거 아니에요. 이게 바로 현재에 깨어있는 거요. 그래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겪는 많은 문제를 가지고 공부를 해 나갈 수가 있다.

 

만약에 우리가 스승과 제자 사이 같은 것도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그죠? 그러면 저도 어른이 있으니까 어른이 이래라 저래라하는 얘기를 들을 때, 어떤 때는 ~ 큰스님이 이러 이런 건 너무하지 않느냐?’ 내가 어떤 행동에 대해서 큰스님이 이렇게 반응하시는 거는 좀 너무하지 않느냐?’ 이런 생각이 들 수가 있죠. 그런데 반대로 또 지도하다 보면 어때요? 반응하는 걸 보면 어때요? ‘요즘 애들은 왜 저래?’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잖아. 이걸 딱 뒤집어 놓고 보면 ~ 큰스님이 내가 그렇게 했을 때 좀 섭섭했을 수 있겠다.’

 

~ 큰스님이 나한테 그렇게 하신 거는 애정을 갖고 하셨구나. 야단친 게 아니구나.’ 이렇게 이해를 할 수 있게 된단 말이오. 그렇게 되면 위로부터 받은 과거의 오해가 풀려지고 또 아래에서는 아~ 내가 어릴 때 이러이러한 마음이었다 하는걸 알게 되기 때문에 어때요? 그런 문제를 고려하게 된다. 이렇게 우리가 자기의 경험을 살려나가는 거요. 그러면 지나갔던 나의 어리석음 까지도 다 뭐가 됩니까? 깨우침의 밑거름이 된다.

 

그래서 우리가 이 법의 이치를 깨치게 되면 과거의 업도 미래의 업도 녹이는 거요. 과거의 잘못도 다 좋은 의미로 사용되는 거요. 그러니까 후회할 필요가 없다. 이런 것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자기인생을 개척 안 해가고 보통 어떻게 합니까? 애 키우다 말 안 듣고 하면 뭐라고 합니까? “니도 나중에 애 낳고 키워봐라.” 이렇게 얘기하기가 쉽잖아. 성질나니까. 악담이라는 거 알아요? ‘너도 나중에 내 나이 되서 애 키우면서 니 자식이 말 안 들어 가지고 나처럼 속이 팍팍 끌어라.’ 이렇게 악담하는 거란 말이오.

 

나는 너를 키우는 데서 이러지마는 너는 나중에 자식 키울 때 이러지 마라.” 이래야 부모가 자식한테 하는 거 아니오. 그런데 우리가 성질나면 그래 안 돼요. 니도 나중에 한번 해봐라. 부모자식 간에도 우리가 악담을 한다니까. 또 다른 얘기도 있죠. 남편이 어떤 일을 하려고 하는데 내가 말려도 계속 하면 아이고 내 말이 맞는지 안 맞는지 두고 보자.” 이럴 때가 많잖아요. 내 말이 맞는 거를 증명하려면 망해야 되잖아. 그죠? 이런 경우도 많아요. 실제로. 아주 가까이에도 그렇게 되요.

 

그러고 만약에 망하거나 애가 시험에 떨어졌거나 하면 딱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뭐요? “거 봐라.” 이렇게 나온단 말이오. ‘거 봐라.’ 하는 거는 화도 나는 마음이지만, 기분 굉장히 좋은 말이거든요. “내 말 맞지.” 이 말이에요. 그러니 그게 악담이란 말이오. . 상대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 그 이유는 내 말 안 들었기 때문에. 내 말을 안 듣는 놈은 천하의 누구도 용서할 수 없는 거요. 부부지간에도. 부모 자식 간에도.

 

그런데 이게 실제 심리가 여러분들 자기 말 안 듣고 뭐하다가 잘되기를 바래요? 안되기를 바래요? ‘내 말 안 들으면 안 될 거야.’ 이런 생각이 있잖아요. 이게 내 생각이 옳다는 게 얼마나 나도 모르게 주위에 심대한 피해를 주는지를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내생각이 옳다는 거를 고집하면 안돼요. 고집하면 자꾸 이런 현상이 일어나요.

 

그러니까 내 생각하고 남편생각하고 서로 다른 거요. 토론을 해봤는데. 자기 생각대로 하겠다니까 그럼 한번 해볼 수밖에 없다. 내 생각이 옳다고 고집하면 틀렸다는 걸 증명을 해야 되거든요. 증명 하는 방법은 망하는 거 밖에 없단 말이오. 애 생각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는 방법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거요. 그러니 그런 불행을 자처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