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우라고 써야 되는데 왜 바루라고 써 놨느냐? 문제 제기를 하려니까 스님 법문에 문자에 집착하지 마라. 그러니 내가 문자에 집착하는 건가? 이런 생각이 들어서 지적을 못하겠고. 그렇다고 덮어놓고 가려니까 틀린 걸 저걸 놔두고 가야 되나? 이런 생각이 들고. 이렇게 해서 질문을 하셨는데. 우리나라 말이에요. 발우. 정확하게 말하면 발우에요. 그럼 발이라는 말도 정확하냐? 한문으로 하면 정확해요. 인도말에 발다나라는 말이 있어. 발다나. 그게 적당한 양이란 뜻이오. 그 발다나를 다 따지도 않고 그 중에 첫 자만 딱 따서. 요건 인도말로 발음을 인도말로 따고 인도말로만 써놓으면 뭔지 모르잖아. 그지?
그러니까 그 뒤에다가 (그릇 우)자. (밥그릇 우)자를 붙여 합성어를 만들었어. 우리도 역전하면 이미 그게 역 앞이란 뜻이지. 그지? 그래도 역전이라는 단어를 하나 만들어버리니까 우린 뭐라고 그런다? 역전에서 만나자 그래요? 역전 앞에서 만나자 그래요? 역전 앞에서 만나자 이러지. 그러니까 그거는 앞에 앞에 이런 말이란 말이오. 따지면. 그러나 역전이라는 말은 역 앞이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역전이 한 단어가 돼서 뭐다? 역이란 뜻이 되어 버렸어. 아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역 앞에서 만나든지 역전에서 만나자든지 정확한 표현이에요. 그러나 우리가 역전 역전 자꾸 쓰다 보면 역전이라는 게 그냥 역이라는 뜻이 되어 버리니까 역전 앞에서 보자. 이렇게 되는 거와 같다. 그러니까 발다나 라는 발하고 그릇 우 자를 따서 합성어를 만들어서 뒤에는 뜻글자고 뒤에는 소리글자요. 그래서 두 개를 합해서 뭐로 만들었다? 발우라고 만들었어. 이거를 우리가 자꾸 읽으면 발우 발우 하니까 결국 어떻게 읽힌다? 바루라고 읽히잖아. 그죠? 그러니까 쓰다가 보니까 한문으로 따지면 발우라고 써야 되는데 소리 나는 데로 쓰다 보면 바루라고 써져.
그런데 앞에 발 자가 그게 뜻을 꼭 새겨야 될 글자면 모르겠는데 그게 인도 말이야. 그러기 때문에 발우라고 쓰는 게 굳이 따지면 정확하다고 말 할 수 있지만 일상적으로 바루라고 써도 괜찮아. 그래서 스님법명을 외국사람한테 이거를 제대로 알린다고 법. 법. 륜. 륜. 이래서 글자를 써놓으면 외국사람들이 법법법 륜. 법륜. 발음을 못해. 그럼 못 읽어 써 줘도. 이 (법 법)자에다가 (바퀴 륜)자를 써주면 그냥 발음을 어떻게 해요? 법륜. 이러죠. 법륜스님 이러잖아. 그러면 법륜이라고 소리 나는 데로 딱 써주면 잘 읽어. 법륜. 그냥. 금방.
그런데 이거를 한문글자 그거 맞춰서 이렇게 쓰면 문자를 못해서 r_y_e_u_n 이렇게 써 놓으면 륜. 륜. 그것도 영어도 기호마다 나라마다 발음하는 방식이 틀리잖아. 그죠? 그래서 법륜. 이렇게 써주면 그것도 B라고 안 쓰고 P로 쓰잖아. 앞에 첫 자는 그죠? 그래 놓으니까 인도에 가면 내가 기공식에 참여한 게 기초석에 사람 이름 넣지 않습니까? 거기에 다 뭐라고 썼냐? 법륜을 법 자 P하고 륜자 R해서. PR스님이라고 해놨어. 이거 뭐 쓰려니까 복잡하니까. 그러니까 법륜만 쓰지 스님을 안 쓰든지. 앞에 뭐 붙은걸 안 쓰면 괜찮은데. 이걸 이런 식으로 우리는 법륜. 이게 의미가 있지만 외국인이 볼 땐 의미가 없다.
그래서 P.R. 스님. 사람들이 내 이름이 뭔 줄 안다? 스님인 줄 알아. 이름이 스님인줄 안다 이 말이야. 그런 해프닝이 생기는 거요. 그런 것처럼 이것도 인도에서 중국에 와서 발우라고 쓰는데 우리는 발음하면 바루가 되다 보니까 바루라도 써도 괜찮아. 굳이 그게 한문이 무슨 글자냐? 이렇게 따지면 발우라고 써야 돼. 그러고 발우라고 써놓고 읽기를 뭐라고 읽는다? 발우라고 읽으면 돼. 그러니까 지금 말씀하신 대로 이런 거는 지적을 해주면 돼.
분별심이다 따지지 말고 틀렸다 이러지 말고. 이러든 저러든 큰 상관이 없다 하더라도 그래도 우리가 스님을 법륜스님이라 해가지고 법륜. 이렇게는 안 쓰잖아 그죠? 법륜이라고 쓰지. 그래 놓고 읽기는 어떻게 읽는다? 법륜스님이라 읽는 것처럼. 스님 이거는 비록 발음을 바루라고 나더라도 쓰기는 어떻게 써야 된다? 발우라고 쓰는 게 좋지 않습니까? 이렇게 건의를 하면 돼. 지금 건의를 하는 게 분별심도 아니고 내버려 둔다고 그냥 진실을 안 밝히고 그냥 덮어두는 게 아니고. 지금이 이게 분별심이오.
그냥 고쳐야 되겠다 하면 건의를 하면 되고. 그냥 둬도 되지마는 고쳐도 되는 거지. 건의를 하면 되는 거고. 뭐 글자 뭐 발우라고 쓰면 어떻고 바루라고 쓰면 어떠냐? 이렇게 생각하면 그냥 놔둬도 되는 거고. 그런데 이게 내 마음속에 번뇌가 되는 것. 이게 뭐다? 분별심이오. 이게 분별심이오. 그러니까 분별심이 없는 사람은 가법 게 얘기하는 거요. “어~스님이 발우라고 썼는데 발음은 바루지마는 원래 이게 바루라고 써야 안 됩니까?” 이렇게 얘기하는 거요. 그러면 오늘같이 나 같은 사람이 듣고. “오 그래 바루라고 쓰자.” 이렇게 하면 간단하게 끝나는 거고.
“야~ 그거 인도말에서 따온 건데 발우라고 쓰나 바루라고 쓰나 마찬가지다.” 이러면 “아 예.” 이러고 끝나버리면 되는 거요. 그런데 이거를 말을 못하고 할까? 말까? 할까? 말까? 하면 분별심이라 그러고 안 하려니까. 덮어둘 거 같고. 요런 생각하는 게 뭐라고? 분별심이오. 요게 분별심이오. 그러니까 어떤 잘못이 있을 때 아무 말도 안 하는 게 좋은 게 아니오. 가볍게 말해야 되요. 그럼 말하면 좋은 거냐? 아니에요. 말을 하되 가볍게 해야 돼.
남편이 늦게 들어온다고 ‘아이고 절에 다니는 게 늦게 들어온다. 일찍 들어온다 말하지 말라 그랬으니까 말하지 말자. 아이고 그래도 일찍 들어와야 되는데 그래도 말하지 말자.’ 이게 수행자 아니오. 가볍게 말해요. “여보 일찍 들어왔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말해. 그런데 여긴 또 어떤 거냐? “일찍 들어왔습니다.” 하고 말하면 상대가 들어줘야 된다는 또 집착을 해. 내가 세 번이나 말했는데 당신 한 번도 안 듣고. 이러면 안 돼. 말하는 건 누구 자유다? 내 자유요. 듣고 안 듣고는 누구 자유다? 상대편 자유. 그냥 가볍게.
“여보 좀 일찍 들어오면 좋겠네.” 이렇게 얘기하면 되요. “난 늦게 들어오면 좋겠는데” 하면 “당신 알아서 하세요.” 그러고 이튿날 또 그래도 일찍 들어와야 되겠다 싶으면 “여보 일찍 들어오세요.” “안 된다 그랬잖아.” 성질내면 “그래도 나는 일찍 들어오면 내 마음이 좋겠는데.” 생글생글 웃으면서 자꾸 이래. “알았어요. 늦게 들어오세요.” 그 이튿날 나갈 때 또 “일찍 들어오세요.” 기분이 안 나쁘면 백 번 말할 수 있나? 없나? 있어. 그러면 그 사람 들어올 확률이 높나? 낮나? 높지.
그런데 일찍 들어오세요. 그랬는데 안 들어오면 성질 팍 내고. “일찍 들어오든 늦게 들어오든 당신 마음대로 해. 몰라 나는.”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 이 말이오. 말 안 하는 것도 도가 아니고 말한다고 해도 도가 아니다. 아시겠어요? 하고 싶으면 해. 무슨 얘기든 해. 스님한테. 하되 그것이 내 뜻대로 돼야 된다는 집착은 하지 마라. 이거야. 집착은 하지 마라. 나는 이런 생각이 들지만 상대는 다른 생각이 들 수가 있다. 이런 얘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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