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 역사/역사, 세계사 216

삼국지 12 : 황건적의 난 & 도원결의

(蒼天已死 黃天當立 歲在甲子 天下大吉) 창천이사 황천당립 세재갑자 천하대길 푸른 하늘은 이미 죽었으니 마땅히 누른 하늘이 서리라. 때는 바로 갑자년 천하가 크게 길하리라. 중국의 한나라 말기 영제가 통치하던 184년. 부패한 정권과 잇따른 정쟁 속에 백성들의 삶은 점점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에, 태평도의 교주 장각은 황색 두건을 머리에 두른 농민반란군, 황건적을 이끌고 난을 일으켰습니다. 장각의 초기 계획은 184년. 3월 5일 낙양 안팎으로 동시에 거사를 일으켜 단숨에 정권을 뒤집으려고 했으나 제자인 당주가 장각을 배신하여 수도로 가서 황건적 난에 대한 사실을 모두 고발하여 낙양 일대에서 1천여 명의 태평교도들이 피살되었습니다. 장각은 당주의 배신으로 인해, 당초 수도를 한 번에 점령하..

삼국지 11 : 황건적 장각

후한 말기, 후한의 12대 황제, 영제는 십상시와 더불어 돈을 주고 벼슬을 살 수 있는 매관매직을 공식화 함으로써 한나라의 정치는 날이 갈수록 어지러워졌습니다. 조정에서는 백성들의 삶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아 자연재해와 기근을 대비하는데도 소홀히 하여 각지에서는 농민들이 모여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중에서도 태평도(太平道)의 교주 장각이 이끄는 황건적은 종교 무리인데도 불구하고, 무장을 한 농민들이 군대와 같이 훈련에 매진하며 세를 확장해 나갔습니다. 교주 장각은 젊은 시절, 글공부에 뜻이 있었지만 귀족 집안의 자제도 아니었고, 아울러 관직을 얻기 위한 주변에 자신을 추천해 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출사의 꿈을 접은 장각은 어린 동생들을 돌보며 이른 나이부터 짐을 나르거나, 장사를 도우며 생업에 종사했습니다..

삼국지 10 : 조조 상소문을 올리다.

조조는 청년기 시절 낙양에서 소문난 재능을 가진 젊은이였지만 당시에는 사대부들에게 추천을 받아야만 벼슬에 오를 수 있었던 향거리 선제로 인해, 조조의 앞길은 막막했습니다. 환관의 손자라는 배경은 사족(士族)으로부터 배척당하였고 이에, 관직을 구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우여곡절 끝에 교현, 허소 등 명사들의 평가를 받으며 명문거족 사마방의 천거를 받아 벼슬을 얻게 됩니다. 20세 무렵의 조조는 또래의 명문 귀족 자제들보다는 상대적으로 보잘것없는 직급이었던 수도 북문의 경비대장, 낙양북부위를 맡게 됩니다. 삼국지 시대, 조조의 위나라 적국이었던 오나라 신원미상의 인물이 쓴 조조의 전기 이라는 책에서는 조조가 낙양북부위직을 맡았을 때의 일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적국 오나라에서 쓰여진 책, 조만(曹瞞)전은 ..

삼국지 9 : 손견

고대 중국, 후한 시대에서 삼국 시대로 접어들 무렵 남동부 지역에는 현재 중국의 저장성, 장시성 등이 포함된 양주 지역이 위치해 있었습니다. 양주의 첸탕강, 한국어로는 전당강이라 불리는 강의 부둣가에는 평소처럼 짐을 싣고 부리는 상인들의 움직임이 분주했습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어디선가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는데 이는 물가에서 노략질하는 수적들이 나타났다는 신호로 사람들은 짐을 버리고 도망가기 바빴습니다. 당시, 남부 지방에서 악명높았던 수적인 호옥은 사람들을 위협해 물품들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겁탈하며 짐꾼들은 손에 잡히는 데로 베어 죽이는 노략질을 일삼았습니다. 큰 칼과 무기들을 들고 나타난 수적들을 피해 강의 하류 쪽으로 도망간 배들은 얼른, 이들이 재물을 갖고 떠나기만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이때,..

삼국지 8 : 유비 공손찬 & 노식

서기 161년. 낙양으로부터 동북으로 1800리 떨어진 유주 탁군 탁현에서 유홍의 아들로 태어난 유비는 조조보다 6년 늦게 세상에 나타났습니다. 탁현은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누상촌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데 누상촌은 누각처럼 큰 뽕나무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유비의 집안은 기원전 2세기 전한 시대의 황제 경제(景帝)의 아들 중산정왕 유승(劉勝)의 먼 후손으로 황족이긴 했지만, 광무제 계열이 아니라 황족의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삼국지에서 가장 많은 매니아층을 보유하고 있는 유비는 황제 가문의 피를 이어받은 정통파 계열로 수많은 역경을 참아내고 딛고 올라서며 조조의 천하 통일을 막아낸 인물로 유명합니다. 어린 시절 홀어머니와 함께 돗자리를 팔고 신발을 팔며 생계를 이어간 유비가 조조나 원소 ..

삼국지 7 : 조조 & 허소

전한, 후한 시대에는 인재를 선발하기 위해 보편화되었던 관료 임용 제도로 향거리선제가 있었습니다. 향거리선제는 지방관이나 지방의 유력자가 우수한 인재를 찾아내어 추천하는 방식으로 당시, 중요시 여기던 유교적 도덕 규범에 따른 관리 선발 제도였습니다. 무조건적인 추천제 방식으로만 끝나는 것은 아니었으며 우선은 지방에서 인재를 추천한 다음 황제의 시험을 거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삼국지 배경이 되는 후한 말에는 영제와 십상시 주도 아래, 시험을 치르는 과정보다 매관매직이 공식화되면서 향거리선제 또한 무력화됩니다. 어느덧 조조는 소년배 우두머리 시절이 지나 청년기에 접어들었는데, 조조는 향거리선제의 천거 방식에 상당히 불리한 입장에 놓여 있었습니다. 조조의 조부, 조등은 5대째 황제를 모셔 온 환관급..

삼국지 6 : 조조 & 원소

서기 169년 환관 세력과 관료들이 충돌하여 환관세력이 관료를 탄압했던 ‘2차 당고의 금’ 사건이 일어났을 무렵 155년 태생의 조조는 당시, 10대 시절로 환관 가문의 자제로 청소년기를 보냈는데 학업에는 관심이 없고 동년배들과 패거리를 지어 다녔습니다. 조조의 아버지 조숭은 원래 하후씨 성을 가진 평범한 집안 사람이었으나 환관인 조등의 양자로 들어가며, 벼락출세를 하였습니다. 갑작스러운 집안의 부흥으로 조조는 풍족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변인들에게는 귀족 가문으로서 인정받지는 못했습니다. 조조의 아버지 조숭은 피를 나눈 아들이 아니었고 그러다 보니 조조도 양자 출신의 아들이라는 입장으로서 그 시대 사람들 기준에서는 올바른 집안이 아니었던 겁니다. 환관의 손자라는 입장은 후한 시대의 사회적 ..

삼국지 5 : 1, 2차 당고의 금, 십상시, 두무

후한(後漢) 말기. 어린 황제를 자신들의 손으로 마음대로 주물린 환관 집단, 십상시는 삼국지라는 대격동기의 시작을 알리는 존재들이었습니다. 후한 시대에는 어린 황제가 즉위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여 그에 따른 외척이 권력을 차지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황제들은 어린 시절이 지나 성장기 때부터 본격적으로 자신의 힘을 찾기 위해 궁궐에서 권세를 휘두르고 있던 외척을 없애기로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이때 황제는 자신과 가장 가까이 지내고 있는 환관들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였고 환관들은 황제의 친위대 같은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많은 외척 중에서도 황제 이상의 권세를 누린 외척으로는 지난 삼국지 4편에서 다룬 ‘양기’라는 자가 있었습니다. 양기는 부인 ‘손수’와 함께 모든 정권을 손아귀에 넣어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삼국지 4 : 당고의 금 & 양기

삼국지를 접할 때면 대부분의 작품에서는 이야기 초반에 십상시가 등장합니다. 한나라 황제 곁에는 항상 환관들이 있어왔지만 그중에서도 십상시의 힘이 강대해진 이후로는 ‘당고의 금’이라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고의 금’은 ‘당고의 화’라고도 불리는 사건으로 중국 후한 말기에 황관들과 관료들이 충돌하여 황관 세력이 관료를 금고에 처한 탄압 사건입니다. 참고로, 작은 상식선에서 말씀드리자면 현대사회의 금고형과 징역형은 둘 다 죄인을 교도소에 수감하지만 징역은 감옥에서 노동을 하는 데 비해 금고형은 노동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금고형은 노동을 천시하던 옛 시대에 파렴치한 범죄가 아닌 경우 범죄자들에게 다소 우대한다는 의미가 있었는데 한나라 때의 금고형은 관리의 신분을 빼앗아 서인 이하의 신분으로 내리는 것을..

삼국지 3 : 조조를 알아본 교현

서기 2세기 후반에서 3세기간의 중국 내륙에서 벌어진 삼국지는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아왔습니다. 그중에는 삼국지 시대가 끝난 4세기 무렵에 살았던 ‘손성’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박학다식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그의 저서에는 ‘이동잡어’ (異同雑語)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손성의 ‘이동잡어’는 주로 삼국지와 관련된 인물들을 비판하는 형식이었는데 조조의 집안을 두고서는 미천한 자들이라 논하였고 유비를 두고서는 생각이 없는 사람이라 평하였습니다. 하지만, 비판의식이 강한 손성의 저서에서도 조조의 ‘무예 실력’ 만큼은 높이 평가했는데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습니다. ‘조조는 일찍이 중상시 장양(張讓)의 집에 몰래 들어갔다가 장양에게 발각되었다. 그러자 뜰에서 수극(手戟)을 휘두르다 담을 ..

삼국지 2 : 조조 & 하후돈

삼국지에 그리 관심이 없거나, 삼국지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삼국지라 하면 유비, 관우, 장비 그리고 제갈량을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의형제로 맺어진 유비 삼 형제가 천재 전략가 제갈량을 만나 어지러운 천하를 바로잡는 데 일생을 바치고 유비는 숙적인 간사한 조조를 물리쳐야 할 것 같은 그런 이야기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삼국지에 깊은 관심을 두고 삼국지를 읽어본 독자들은 유비 매니아 혹은 조조 매니아로 크게 두 부류로 나뉘게 됩니다. 간혹, 손견 손책 손권 세트인 손씨 패밀리를 선호하는 경우도 있죠.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초반 전개는 십상시가 나라를 어지럽히고 그에 따라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고 유비 삼 형제가 도원결의 한 후에, 의병을 모집하는 내용으로 펼쳐집니다. 이번 영상에서는..

[삼국지] 1 : 시대적 배경, 십상시

2세기 후반~3세기 후한 말기와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삼국지는 역사가 ‘진수’가 저술한 ‘삼국지 정사’와 소설가 ‘나관중’이 집필한 ‘삼국지연의’로 나누어집니다. 이 중,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고 재미 위주로 알려진 삼국지는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의미합니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소설 ‘삼국지연의’의 인지도가 워낙 높은 터라 대체적으로 삼국지라 하면 ‘삼국지연의’라고 가리키며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쓴 기록으로서의 삼국지는 ‘삼국지 정사’라고 지칭합니다. 삼국지에 대해서는 저보다 전문적으로 알고 계시는 분들이 워낙 많은 터라 이 영상은 제 개인 취미 생활로 삼국지 내용들을 정리하는 것 뿐이니 부족한 부분이 많더라도 미리 양해의 말씀을 드립니다. 중국의 한나라는 BC 202년 전한 시대부터 잠시 ..

[세계사, 4대 문명] 코린토스 전쟁 3: 페르시아, 반 스파르타 연합군에 지원하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동지였던 순간도 잠시 BC 431년부터 도시 국가들끼리 간의 패권 다툼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치루게 됩니다. BC 404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승리를 거머쥔 스파르타는 그리스의 다른 도시들을 강압적으로 지배하려 했고 이에 스파르타에 불만을 품은 반스파르타 동맹군이 형성되었습니다. 스파르타 다음으로 세력이 강한 폴리스들인 아테네, 코린토스, 테베, 아르고스 등은 페르시아에 지지를 받으며 BC 395년부터 스파르타와 반스파르타 연합 간의 전쟁인 코린토스 전쟁이 벌어지게 됩니다. 전쟁 초기의 주요한 전투로는 네메아, 크니도스, 코로네이아 전투가 있었습니다. 이 무렵의 스파르타는 아게실라오스 2세 왕이 페르시아에 위협을 줄 만큼 강한 군사력으로 페르시..

[세계사, 4대 문명] 코린토스 전쟁 2 - 스파르타 왕 아게실라오스 2세

스파르타에서 가장 유명한 왕으로 손꼽히는 왕으로는 기원전 480년. 테르모필레 지역에서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의 대규모 군대를 맞아 정예병 300명의 병력만으로 맞서 싸운 레오니다스 왕이 있습니다. 테르모필레 전투는 영화 300처럼 단 300명만이 막아낸 전투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페르시아의 수십만 대군에 맞선 그리스 연합군 7천 명은 터무니없는 숫자의 병력이었습니다. 페르시아 전쟁의 일부인 테르모필레 전투는 비록 레오니다스 왕이 죽으면서 페르시아군에게 길목을 내주긴 했으나 스파르타 육군의 활약은 이후 그리스 세계의 내전인 펠로폰네소스 전쟁까지 그 명성을 이어가게 됩니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리스 연합군은 아테네 함대 중심의 활약으로 페르시아를 막아내는 데 성공하였고 이를 계기로 아테네는 그리스 세계의 ..

[세계사, 4대 문명] 코린토스 전쟁 1 - 스파르타 vs 반스파르타 연합

코린토스 전쟁 (Corinthian War)은 BC 395부터 BC 387년까지 지속된 고대 그리스 전쟁입니다. 코린토스 전쟁의 시작은 스파르타 동맹인 펠로폰네소스 동맹과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Achaemenid Empire)의 지지를 받은 반스파르타 동맹인 테베, 아테네, 코린토스, 아르고스로 이루어진 연합과의 대립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코린토스 전쟁이 시작되기 10년 전인 BC 404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승리한 스파르타는 그리스 도시들과 페르시아 제국의 지지를 얻으며 에게해에서 대부분의 섬 국가들을 지배하게 됩니다. 하지만, 스파르타를 향한 견고했던 지지 기반은 전쟁 이후 몇 년 내에 분열됩니다. 그리스의 내전이라 할 수 있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아테네 중심의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 중심의 펠로..

[세계사, 4대 문명] 테베의 역사, 그리스 신화 테베 왕

고대 그리스 여러 도시 국가들 가운데 아주 잘 알려진 아테네와 스파르타 이외에도 그다음으로 강력한 세력을 보였던 폴리스들인 테베와 코린토스가 있었습니다. 테베는 보이오티아의 고대 지역 중 가장 큰 도시였으며 보이오티아 연맹의 지도자로 아테네의 주요 라이벌 국가 중 하나였습니다. 테베는 페르시아 전쟁 때는 스파르타 연합군과 함께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페르시아에 맞서 싸웠으나 이때 패배하게 되면서, 이후로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페르시아를 지원한 전력이 있습니다. 테베는 중부 그리스, 보이오티아(Boeotia)의 도시로 이곳은 그리스 신화에서 카드모스 (Cadmus), 오이디푸스, 디오니소스, 헤라클레스 등의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땅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테베에 대한 고고학 발굴은 미케네 정착지와 ..

[세계사, 4대 문명] 코린토스 역사 2: 참주정 ~ 페르시아 전쟁

기원전 480년. 스파르타 연합군은 거대한 페르시아 제국의 침공을 막기 위해 테르모필레 지역에서 소수의 병력으로 페르시아 군대를 막아섰습니다. 테르모필레 전투는 이 흥행되면서 현대 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습니다. 헤로도토스는 당시의 페르시아군의 규모가 군인과 잡역부를 합쳐 470만으로 제시하고 있지만 다수의 역사가들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숫자로 여겨 10만~ 50만 정도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100만이 되지 않는 숫자라 하더라도 스파르타군의 300명만이 수십만의 병력을 막아내긴 어려웠습니다. 이에 그리스 연합군의 구성은 300명의 스파르타 완전 시민 1000명의 스파르타 외부 자유민 3000명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시민 그 외 노예계급인 헤일로타이 등을 모두 합쳐 약 7000명 정도로 추정하..

[세계사, 4대 문명] 코린토스 역사 -1 키프셀루스 & 페리안드로스

코린토스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중간에서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잇는 좁게 펼쳐진 땅이었습니다. 현대의 코린토스시는 고대 유적에서 북동쪽으로 약 5킬로미터에 위치해 있으며 1896년 이후부터 고대 코린토스에 대한 체계적인 고고학 조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코린트’라고도 불리는 코린토스는 호메로스의 기록에서는 중요한 도시로 부각되지 않았으나 시(City)의 유적에서 미케네 시대 전기의 도기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먼 옛날부터 번영해 온 도시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곳은 지리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상업과 무역으로 크게 번영을 누릴 수 있었으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활동으로 인해 그리스의 폴리스가 쇠퇴한 헬레니즘 시대에도 상업시로 번영하여 ‘헬라스의 별’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코린토스는 기독교..

[세계사, 4대 문명] 고대 그리스의 매춘

서양의 고대를 대표하는 문명이며 유럽 문명, 문화의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는 기원전 800년경부터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이 택한 정치 방식은 초기에는 귀족정이었으나 식민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평민들의 권한이 확대되었고 이에 아테네에서는 민주정 스파르타에서는 과두정의 형태로 발전해 나갔습니다. 아테네를 비롯한 큰 폴리스들은 상공업을 중심으로 도시가 발전해 나갔는데 그중 고대 그리스에서 일반적으로 이루어지는 업종으로 매춘이 있었습니다. 주요 도시들, 그중에서도 특히 많은 항구들에서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매춘부로 고용되었으며 이들은 경제 활동의 큰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매춘은 은밀히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었으며 사람들은 사창가를 비난하지 않는 대신 규정을 도입하여 합법화했..

[세계사, 4대 문명] 스파르타 역사 10분 완벽정리

고대 그리스 폴리스들 중 스파르타는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도시국가였습니다.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지역을 통치하고 지배하며 큰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또한, 기원전 431년부터 27년간 치루어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와 델로스 동맹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어 33년 동안 그리스 남부에 대한 지배력도 강화하게 됩니다. 스파르타인들은 타 국가에 대한 불신이 큰 나머지 내정에 관한 기록을 만들진 않았습니다. 스파르타에 대한 역사 기록은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는데 유일한 역사 기록은 아테네 출신이지만 스파르타의 용병으로 활동했던 크세노폰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집필한 투키디데스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헤로도토스 그리고 그리스 로마 제정기의 시인 플루타르크의 글에만 등장합니다. 더군다나 이 네 사람의 공통 ..

[세계사, 4대 문명] 30인 참주 : 아테네 최악의 공포정치

기원전 431년부터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각각 자신들의 그리스 지역 동맹국들을 이끌고 27년간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치루었습니다. 그리스 세계 전체를 황폐화 시킨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이 나고 전후의 아테네 인구는 절반으로 줄었습니다. 하지만, 승자였던 스파르타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으며 그 외 테베, 메가라, 코린토스 등의 국력도 크게 감소하면서 그리스 세계에서는 내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기원전 404년. 전쟁에서 패배한 아테네는 그대로 멸망의 길을 걸어갈 듯 했으나 스파르타는 다른 국가들도 견제하는 등의 목적으로 아테네를 존속하기로 결정합니다. 하지만, 아테네를 멸망시키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피레우스까지 연결되는 성벽을 해체하고 오랫동안 그리스를 평정했던 아테네 함대를 해체할 것이며 정치..

[세계사, 4대 문명] 스파르타 리산드로스 vs 아테네 알키비아데스 : 펠로폰네소스 전쟁 10

기원전 5세기 초, 페르시아 제국은 광대한 오리엔트 지역을 통합한 후 서쪽 끝자락에 있는 그리스 세계를 침공. 페르시아 전쟁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리스 세계의 도시국가들인 폴리스들은 서로 힘을 합쳐 페르시아 제국의 침공을 막아내는데 고군분투 하였으며 그 결과 아테네 중심으로 한 델로스 동맹이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최종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아테네는 가장 강력한 패권을 가진 폴리스가 되어 그리스 세계를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두려 했고 이에 맞서 스파르타 중심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저항하며 그리스 세계에서는 폴리스들끼리 서로 싸움을 벌이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전개됩니다. 기원전 431년부터 시작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돌아가며 유리한 승기를 잡는 반복이 이어졌으나 전..

[세계사, 4대 문명] 아테네 vs 스파르타 : 알키비아데스 키지코스 해전

페르시아 전쟁으로부터 그리스를 지켜낸 아테네와 스파르타 등의 폴리스들은 이제, 그리스인들끼리 평화를 만끽할 법도 했으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으로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가장 세력이 강했던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전쟁이 벌어지게 됩니다. 기원전 431년부터 시작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하는 펠로폰네소스 동맹 간의 전쟁으로 어느덧 20여 년의 세월이 흘러 기원전 413년 무렵이 되었습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초기에는 스파르타가 우세를 보이는 듯했으나 전쟁이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페르시아 전쟁 때 주로 활약한 아테네 함대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승기를 이끌게 됩니다. 하지만, 아테네는 평화로운 시기 때 민주정이라는 가장 인간 존중에 가까운 정치체제를 ..

[세계사, 4대 문명] 아테네의 심각한 위기, 알키비아데스 귀환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원전 5세기 초. 그리스 세계는 거대한 제국인 페르시아 제국으로부터 침공을 당했으나 그리스의 여러 도시들은 힘을 합쳐 이를 막아냅니다. 페르시아 전쟁 이후, 전쟁 때 큰 활약을 했던 아테네는 급성장을 하여 마치 제국처럼 세력이 커졌고 이에 위협을 느낀 그리스 세계는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아테네에 저항합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초기 양상은 작은 폴리스들 간의 갈등인 에피담노스 분쟁을 시작으로 점차 확대되어가며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맞붙게 되었고 아테네는 역병을 겪어가며 다수의 시민을 잃었지만 단단하게 다져온 강력한 해군을 앞세우며 전쟁의 주도권을 잃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두 강대국이었던 아테네와 스파르타간의 전투가 치열해지면서 양쪽의 강경파들이 사망하고 기원전 421년에는 아..

[세계사, 4대 문명] 그리스 최강 아테네 해군 vs 시라쿠사 스파르타 연합

기원전 431년부터 시작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그리스의 최강 함대를 보유한 아테네와 그러한 아테네의 번영을 두려워하는 스파르타 중심의 펠로폰네소스 동맹군과의 대결이었습니다. 아테네는 얼마 전 페르시아로부터 무적함대를 내세우며 그리스를 지켜냈지만 앞으로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아테네가 외세의 침입을 막아준다는 명목하에 다른 폴리스들로부터 상납금을 받기 시작했고 이에 불만이 쌓이던 다른 폴리스들과 펠로폰네소스 동맹국들은 아테네 중심의 델로스 동맹에 맞섰습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초기 양상은 스파르타의 왕 아르키다모스가 강력한 스파르타 육군을 활용해 자주 아테네로 원정을 떠난 형태로 아테네에서는 지도자 페리클레스가 농성 전술을 택하여 불필요한 소모를 줄였습니다. 하지만, 아테네에서 역병이 퍼지기 시작했고 이로..

[세계사, 4대 문명] 아테네의 시칠리아 침공, 흔들리는 아테네

기원전 477년. 페르시아 전쟁을 마무리한 그리스 세계는 앞으로 다가올 외세의 침입에 대비하자는 뜻에서 아테네 중심으로 델로스 동맹을 창안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는 페르시아라는 외부의 적만 견제하였을 뿐 이제 그리스 내부에서는 자신들끼리 힘싸움이 시작되었고 그 중심에는 아테네가 제국 형태로 세력을 키워갔습니다. 아테네는 페르시아로부터 지켜준다는 명목하에 기금을 거두었고 막대한 재력을 이용한 아테네는 해군력을 증강시키며 그리스 세계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권력을 손에 넣었습니다. 아테네가 그리스 세계의 패권국으로 떠오르자 이에 반대하는 폴리스들도 나타났는데 이들은 최강의 육상 전투로 명성이 자자한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아테네에 대항하였습니다. 아테네 중심의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 중심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세계사, 4대 문명] 아테네 vs 멜로스의 비극, 무력과 정의의 기준

기원전 5세기 경. 페르시아의 침입으로부터 그리스 세계를 막아낸 폴리스들은 평화에 만족하지 않고 힘이 큰 세력을 중심으로 저마다 그리스의 주인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중 아테네는 그리스 세계 전체를 손에 넣고자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델로스 동맹을 창안했고 세력이 커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스파르타는 이에 맞서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구축하게 됩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대립은 처음에는 직접적으로 맞부딪히지는 않았지만 주변 세력의 작은 도시 국가였던 에피담노스의 분쟁으로 시작해 케르키라와 코린토스의 대립으로 확장 결국 기원전 431년부터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본격적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돌입하게 됩니다. 스파르타는 거의 매년 펠로폰네소스 동맹국들의 대군까지 끌어모아서 정기적으로 아테네가 있는 아티카..

[세계사, 4대 문명] 소크라테스의 동성 연인, 전쟁 천재 알키비아데스

페르시아로부터 지켜낸 그리스 세계는 아테네 해군들의 활약으로 인해 앞으로는 외세의 침입으로부터 굴하지 않는 평화로운 시대가 열리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인간 사회에서 인간 본성의 욕심이 있는 한 꼭 외부의 침입이 아니더라도 갈등이 나타나기 때문에 이제는 그리스인들끼리의 다툼이 시작되었습니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두각을 보였던 아테네는 이때부터 다른 폴리스들에게 그리스를 지켜준다는 명목으로 상납금을 받아가며 제국화 되는 과정을 거쳤고 이에 다른 폴리스들 중에서는 불만이 쌓여가는 도시국가들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리스 최강의 육군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형성되어 대립했습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간의 갈등이 격화되어 기원전 431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초반 경과는 스파르타..

[세계사, 4대 문명] 펠로폰네소스 전쟁, 아테네 스파르타에 공세

기원전 492년부터 약 50년간 이어진 페르시아의 침공을 마주한 그리스 세계에서는 외부의 침입 기간 동안에는 폴리스들 간에 서로 견제를 멈추었습니다. 거대 제국 페르시아를 맞아 민족 단결의 힘을 보여준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은 마라톤 전투, 테르모필레, 살라미스 해전 등을 통해 그리스를 지켜내는데 성공하죠. 하지만, 기쁨도 잠시 페르시아로부터 그리스를 지킨 결과는 전쟁에서 일등 활약을 보였던 아테네가 군림하는 형태의 제국화 그리고 이에 대항한 그리스 최강의 육군 스파르타의 대립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스는 아테네를 중심으로 하는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하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으로 양쪽 진영을 끊임없이 견제하는 형태로 이루어졌습니다.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미텔레네를 압박하고 스파르타는 델로스 ..

[세계사, 4대 문명] 펠로폰네소스 전쟁, 포로 문제와 아테네의 역병

기원전 5세기 초, 페르시아 제국의 그리스 침공은 오랜 세월동안 각각 다른 도시 국가에서 살아가던 그리스인들에게 민족성을 고취, 연대하여 그리스를 지켜내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외세의 침입이 끝난 후 페르시아 전쟁 때 뛰어난 활약을 했던 아테네는 그리스의 작은 도시 국가들을 상대로 상납금을 거두며 제국처럼 군림하였죠. 그리스 세계는 아테네 중심으로 이루어진 델로스 동맹과 이에 대항하는 스파르타 중심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세력이 큰 두 나라는 서로를 견제하고 있었지만 직접 맞부딪히게 된다면 그리스 전역이 불타오를 것이라 여겼기 때문에 기원전 446년에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에 평화조약을 맺으며, 서로의 동맹에 간섭하지 않기로 약속하죠. 하지만, 델로스 동맹과 펠로폰네소스 동맹 간에는..